허정한 "당구선수 해볼 생각없나? 한마디에 덜컥.."

입력 2017. 8. 24. 12:08 수정 2017. 8. 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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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빌리어드뉴스 창간 인터뷰] 허정한 ①
중3때 당구 시작..고교 때 마산‧창원‧진해 휩쓸어
"당구선수 전에요? 학원에서 영어·수학 가르쳤죠"
2009년 '이상천추모배' 첫 우승 후 '태극마크' 도전 나서

한국의 5번째 ‘월드컵 챔프’ 허정한(경남연맹‧40). 큐를 잡은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선수로 돌변한다. 상대가 누구든 지고 있어도 끝까지 쫓아가며, 이기고 있을 땐 잔인하리만큼 철저히 제압한다.

반면 사석에서 그의 성격은 정반대다. 상대에게 깍듯하게 예의 지키는 ‘젠틀맨’으로 통한다. 이런 그를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그가 운영하는 당구클럽에서 만났다. 우승컵을 들었던 작년 12월 ‘후루가다월드컵’부터 중3때 당구를 처음 접한 사연 등을 나누다 3시간이 훌쩍 지났다. 분 단위로 꽉 찬 바쁜 스케줄임에도 “지금까지 한 인터뷰 중 제일 길고 재미있었다”며 끝까지 기자를 배려했다.

인터뷰 하던 허정한이 "젠틀맨"이란 말을 듣고 쑥스러워 하고 있다.
“예의가 바르게 보인다는 말요? 그것보다는 ‘상대하기 편한 사람’이란 말을 많이 들어봤어요. 저는 항상 밝게 살려고 노력하거든요.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남들과 부딪히는 게 싫어요. 하지만 경기장에선 냉정해지죠. 말도 잘 안하려고 합니다. 부모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예쁨 받던 막내, 고교때 지역 ‘당구왕’ 되다

허정한은 3남1녀 중 막내다. 태어난 곳은 경남 진주지만 학창시절, 20대 후반 상경하기 전까지 그의 부모님과 마산에서 쭉 살았다. 어릴 적 그의 부모님은 생활고로 맞벌이를 해 자녀들을 챙길 여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녀들에게 예의를 항상 강조했단다. 또 특히 막내아들만큼은 예뻐했다.

“특별히 귀하게 키운 건 아니고, 형‧누나들 다 혼날 때 저는 맞진 않았어요.(웃음) 당구선수가 됐다는 것도 나중에 아셨는데, 그때도 별 말씀 없으셨죠. 대신 학창시절에 공치러 다니던 건 싫어하셨어요. 아는 형님이나 친구 집 등에서 외박하던 일이 잦아 그러셨나 봐요. 그때 부모님 속 많이 썩였죠.”

허정한은 처음 큐를 잡은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93년 1월 1일, 중3 겨울방학 때였다고 했다. 전날 친구들이 자신만 빼놓고 당구장 다녀왔다는 말에 약이 올라 “나도 가야지”하고 당구장에 첫 발을 디뎠다. 그 후로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4구로 시작해 반년도 안 돼 300점을 넘었어요. 400점 올리려다 3쿠션으로 넘어갔는데, 4구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렇게 신나게 치니 고등학교 때는 마산 창원 진해 일대에서 가장 잘 치는 학생이 됐어요. 그때는 몰랐죠. 30살에 선수가 되고, 데뷔 5개월 만에 주목받는 신인이 될 줄 말이죠.”

▲2006년, 데뷔 5개월만 ‘무명’돌풍…1년간의 ‘방황’

2006년 5월. ‘2006 도하 아시안게임’ 최종선발전에 낯선 이름이 보였다. 그해 1월 등록한 신인 선수였다. 그는 4차까지 진행된 치열한 예선을 거치며 최종 16명에 오르더니 강자들을 물리치고 최종 4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비록 마지막 게임에서 박춘우에게 패하며 아쉽게 태극마크를 놓쳤지만, 당구계는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에 크게 고무됐다. 그리고 곧 이런 기사가 났다. ‘혜성처럼 나타난, 태풍같은 신인 허정한’

“그 기사 봤어요. 당시에 엄청 빡세게(힘들게) 선발전을 치렀는데, 유명했던 선수들이 많이 나가떨어지더라고요. 그때 저는 제가 속한 경남연맹에서도 아는 사람이 드문, 철저한 무명이었어요. 그런 선수가 최종 4명안에 드니 난리가 났죠.”

하지만 ‘무명 돌풍’을 일으킨 허정한은 이듬해 돌연 잠적한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당구선수란 개념이 희박했다. 개인 후원은 꿈도 못 꿀 때다. 매번 입상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이 서른’의 허정한은 당구선수와 평범한 사회인, 그 기로에 섰다.

“고향인 경남 마산에 내려갔습니다. 생각을 정리하려고요. 당구장을 운영할까, 아니면 사회생활을 제대로 시작해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죠. 당시 국내 톱클래스 선수도 연간 300만원의 후원을 받을 때였거든요.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결론을 찾았어요. 결국 제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 당구선수를 하자는 거였죠.”

샷 시범을 보이고 있는 허정한.
▲‘월드컵 챔프’의 전직, 영어‧수학 강사

2007년을 회상하던 허정한은 “그때 당구선수 안했다면 학원으로 또 갔을텐데, 아마 적응 못하고 제2차 방황에 들어갔을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허정한의 대학 전공은 실용영어과(창신대학)다. 2003년부터 2년간 학원 강사로 활동하며 중학생 영어, 초등학생 수학을 가르친 경험도 있다.

“전공을 살린 건 아니에요. 부끄럽지만, 학창시절에 공부를 소홀히했어요. 대학 갈 마음도 없었는데, 부모님이 대학 졸업장을 원해 재수끝에 대학에 들어갔어요. 졸업 후에도 전공 관련된 직업은 생각도 안했는데, 친구가 고모님 학원 강사자리를 제안해 시작하게 됐죠.”

‘학원 강사’ 허정한은 곧 교과서와 씨름을 해야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당구공이 들어차 있어 공부가 쉽지 않았다. ‘팔자에도 없는 이 짓을 왜 하고있나’란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죽을 만큼 힘든 시기였습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던 놈이, 남을 가르치기까지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회의감이 들었다. 평생 그 길을 갈 자신도 없었다. 그때 아는 동생이 서울로 기분전환하러 가자고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따라나섰다. 상경 후엔 서울과 일산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서울 일대 유명 당구장을 찾아다니며 마음껏 공을 쳤다. 그렇게 1년 가량 지났을 때 쯤이다.

“아는 형님이 제가 워낙 잘 치니 선수해볼 생각 없냐고 했어요. 그 제안에 그냥 ‘알았다’고 하고, 2006년 1월 선수등록 했어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선수가 5개월 뒤 생애 처음으로 태극마크까지 달 뻔한거죠. 지켜보던 사람들보다 제가 더 놀랐어요.”

▲2009년 첫 우승 “결승상대요? 최성원요”

방황을 끝내고 심기일전한 허정한. 32살의 그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2008년 12월 ‘아담&유니버셜배 3쿠션 서울오픈’에서 2위를 차지한 것. 결승에선 국내 톱랭커 이충복과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그리고 5개월 뒤인 2009년 4월, 허정한은 ‘이상천 추모배’를 맞이한다.

“선수들은 경기를 하다보면 컨디션이 좋고 나쁨을 금세 알 수 있어요. 당시 제 큐 감각은 정말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발동이 걸린거죠. 자신감이 넘쳐흘렀어요.”

파죽지세로 강동궁(4강) 등 전국 강자들을 잡은 허정한은 결승까지 오른다. 상대는 그의 절친 이자 ‘한국당구 간판’인 최성원. 당시에도 두 사람은 여러 대회를 통해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하지만 승부는 승부. 허정한은 독기를 품었고, 게임을 8이닝(30점 경기)만에 끝냈다. 애버리지는 무려 3.75.

“마지막 샷은 아직도 기억나요. 두꺼운 각도로 끌어친 제각 돌리기였죠. 정말 기분 좋았어요. 이제 막 기량이 꽃피기 시작했을 때, 얻은 첫 성과였거든요. 큐 들고 환호하다가 성원이(최성원 선수)한테 가 악수했죠.”

상대인 최성원 선수의 당시 표정이 궁금했다. 허정한은 “아무래도 결승에서, 그것도 친구에게 졌으니 썩 좋진 않았겠죠. 그런데도 저에게 웃으면서 축하인사를 건네더라고요. (경상도 사투리로)지가 ‘축하한다’ 해야지 안그라믄 우짤끼고. 하하”

이처럼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려가던 허정한은 마음속에 진한 아쉬움이 하나 있었다. 바로 ‘태극마크’에 대한 갈망. ‘2006 도하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에서 떨어진 기억이 생생했다. 그러던 2010년 9월, ‘광저우아시안게임’을 두 달 앞두고 당구 국가대표 선발전이 치러졌다.

허정한은 이번에도 고 김경률, 최성원과 함께 최종 3인에 이름을 올렸다. 김경률은 ‘2010 안탈리아월드컵’ 우승으로 자동출전하게 돼 남은 한자리를 놓고 최성원과 격돌해야 했다. 당시 당구국가대표는 국제대회 및 국내대회 성적, 최종선발전(5게임) 성적 등을 합산해 선발했다. 최종선발전을 앞둔 당시 최성원의 성적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 허정한이 최종 선발전 5게임 중 4게임을 이겨야 했다.

<2부에 계속>

[MK빌리어드뉴스 이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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