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무엇에 분노하는가"..내 짝을 찾는 기준

입력 2017. 8. 2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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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고 운 것은 거의 1년 만이었다.

7월24일, 한낮의 서울역 광장에서 취한 노숙 남성이 다가와 "맛있게 생겼다"며 희롱을 하고, 8월8일 아침나절 압구정 한적한 횡단보도에 함께 서 있던 남자가 돌연 몸을 돌려 수십초간 히죽거리며 내 몸을 훑었을 때 내가 느낀 공포에 대해서 풀어놓았을 때 "에이, 네가 오해한 것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을 남자여야만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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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픽사베이

뉴스를 보고 운 것은 거의 1년 만이었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벌어졌을 때 울었고, 이번에 한 왁싱(제모)숍을 운영하는 여성이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서 울었다. 1년 전 그때, 피해자가 여성이라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하던 경찰과 언론을 기억한다. 그저 여자들만이, ‘이것이 나도 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도 기억한다.

어떤 사람에겐 이런 뉴스가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그저 흉흉한 사건사고의 한 꼭지로만 여겨질지 모르겠다. 나와는 상관없고, 내가 굳이 겪지 않을 것 같은 일.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고, 아무리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관계도 그 사회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가장 사적이라 여겨지는 연애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왁싱숍 살인사건을 접하고 괴로워하는데, ‘너는 가정집에서 혼자 일하는 게 아니니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텐데 왜 걱정하느냐’는 남자친구의 반문에 말이 막혔고 너무 실망했어요. 제가 너무 예민한 건가요?”라고 물어온 후배의 하소연이 증명하듯이.

연애가 그저 먹고 마시고 영화 보고 가끔 섹스하는 것이라면 누군가의 죽음을 소재로 대화하지 않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연애를, 그리고 관계를, 내 삶을 공유하는 소중한 ‘무엇’으로 인식한다면 이 서러운 죽음들은 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소중한 것을 끊임없이 내어주고 또 공유해야 하니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나에게 소중하고 엄중한 무엇에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라는 반응이나 하는 사람일 때, 그 관계는 금세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고 분노하는 나에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여자들 살기 좋은 세상 아니야?’라고 묻는 사람과는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개그콘서트>를 즐겨 보는 남자와는 사귈 수 없고, 밤길을 걷는데 앞에 가던 여자가 돌연 뛰어가서 기분이 나빴다는 남자와는 더는 나눌 대화가 없으며, 성매매를 해본 경험이 있는 남자와는 밥 한끼도 겸상하기 싫다.

다만 나는 같은 유머에 웃음을 터뜨리고, 같은 뉴스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지를 본다. 무엇에 분노하는가의 문제는, 어떻게 살기 원하는가의 문제와 가깝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절반이 겪는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는 이에게 미래 따윈 없기 때문이다. 7월24일, 한낮의 서울역 광장에서 취한 노숙 남성이 다가와 “맛있게 생겼다”며 희롱을 하고, 8월8일 아침나절 압구정 한적한 횡단보도에 함께 서 있던 남자가 돌연 몸을 돌려 수십초간 히죽거리며 내 몸을 훑었을 때 내가 느낀 공포에 대해서 풀어놓았을 때 “에이, 네가 오해한 것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을 남자여야만 하겠지. 나는 앞으로도 내내 그런 일을 겪어야 할 테니까.

‘나만 믿어, 내가 널 지켜줄게’라고 자못 믿음직스럽게 말하는 남자조차 찾기 힘든 세상이지만, “너의 도움 없이도 나 스스로도 나를 지킬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을 때 그걸 이해할 남자는 또 몇이나 될까? 오늘도 시나브로, 인류애를 잃어간다.

곽정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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