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 '국뽕'은 통한다

입력 2017. 8. 2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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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중국의 ‘고대사 판타지’ 훙산문화,
한국 고대사에 편입시키려는 사이비역사가들

뉴허랑 유적 박물관에 현장 보존된 적석묘와 제단 유적. 한겨레 노형석 기자

언제부터인가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의 이목을 끄는 유적이 있다. 바로 훙산문화(紅山文化)다. 훙산문화는 네이멍구(내몽골) 동남부와 랴오시(요서) 일대를 중심으로 기원전 4500년 무렵부터 기원전 3000년까지 약 1500년간 존속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3500~3000년에 문명이 발생했다고 여기므로, 대략 어느 정도 과거의 유산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진짜고대사 ⑤’에서 훙산문화를 다루는 이유는 사이비역사가들이 훙산문화(국내에선 ‘홍산문화’라고도 일컫는다)에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세계 4대 문명보다 일찍 성립했고, 우리 민족의 주 활동 무대인 만주와 한반도를 벗어나 중원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했기 때문이리라. 사이비역사 및 일부 종교단체는 훙산문화가 세계 4대 문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5의 문명이고, 우리 조상들이 역사의 시작부터 창대한 흔적을 남겼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주장한다. 사실이라면 얼마나 환상적인가!

‘투 트랙 팩트 체크’ 필요하다

한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방송에 나온 동북아 지역의 고대 문명 분포 지도. 이곳을 비롯해 한국에 훙산문화에서 한민족의 기원을 찾는 움직임이 있다. 강진원 제공

흥미로운 점은 전문 연구자들 가운데서도 훙산문화가 한국사와 관련돼 있다고 보는 경우가 드물게나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한 언론은 대학교수 등과 함께 훙산문화 유적의 답사 보도를 한 적도 있었다. 훙산문화에 대한 관심 자체를 ‘진짜고대사 ①~④’에서 살펴본 부류의 사이비역사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훙산문화의 전체적인 조망 속에 한국사 관련 여부를 검토하기보다 ‘훙산문화는 우리 역사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접근한다는 점에서 사이비역사의 ‘고대사 판타지’와 무관할 수 없다.

훙산문화 관련 팩트 체크에 앞서 살펴볼 것이 있다. 훙산문화가 바로 중국의 ‘고대사 판타지’, 중국판 ‘역사 국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 구계문화유형론을 주장한 쑤빙치(1909~97)란 학자가 있었다. 그는 현재의 중국 영토를 6개 문화구로 구분하고 이 6개 지역의 문화가 상호 융합하면서 현대 중국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쑤빙치의 설은 중국 고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훙산문화 역시 중화문명을 이룬 일원으로 주목받기 이르렀다. 쑤빙치의 이론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 국가라는 ‘중화주의’와 중국 대륙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는 모든 종족의 역사가 곧 중국사라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고고학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중국 대륙에 존재했던 모든 종족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으로, 동북공정도 여기서 출발했다. 중국의 ‘설계’대로라면,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훙산문화를 위대하다고 할수록, 중국 고대사가 위대해지는 아이로니컬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런 배경 탓에 다른 고대사 왜곡 프레임과 달리 훙산문화는 한국과 중국의 자의적 해석에 대한 ‘투 트랙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첫째는 훙산문화가 정말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 고대 문명에 필적하는 문명인가, 둘째는 훙산문화가 우리 조상과 관련 있는가다.

고대 문명이 될 수 없는 이유

첫 번째 질문부터 살펴보자. 훙산문화는 신석기시대의 문화로, 주로 뗀석기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고대 문명의 3요소는 문자, 도시, 청동 야금술이다. 동아시아로 보면 갑골문자, 궁정 유적, 청동 예기를 갖춘 황허문명이 그에 해당한다. 물론 라틴아메리카 고대 문명처럼 석기를 사용했다고 해서 문명이 발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라시아의 고대 문명, 이른바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그런 사례는 없다.

그 점을 차치하더라도 고대 문명으로 인정될 조건이 부족하다. 문명의 조건은 △도시(국가)의 존재 △관료제 △계급화 △문자 사용 등이다. 메소아메리카의 경우만 봐도 테오티우아칸·칸쿠엔·사포텍처럼 규모가 상당한 도시(국가)들이 형성됐고, 위계질서가 확립됐으며, 공동체를 원활히 다스리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 학계에선 훙산문화가 초기 국가 단계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황허문명의 얼리터우(二里頭) 유적 같은 궁정도 없고, 수메르문명의 우루크처럼 거대한 성곽도시와 계층사회를 이루지도 못했다. 전문적인 장인의 존재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취락 사이 우열 관계도 뚜렷하지 않으며, 유력자를 따로 구분할 정도로 계층 기준이 명확히 만들어지지도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 규모와 껴묻거리(부장품)의 종류·수량에서 일관된 경향성이 없는 점, 즉 거대 권력의 출현을 입증할 왕릉이 나타나지 않은 점 등 세계 학계가 훙산문화를 문명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물론 뉴허랑(牛河梁)에서 발견된 상당한 규모(남북 22m, 동서 2~9m)의 제사 건축, 즉 여신묘에 주목하는 입장도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 문명에선 소속 공동체 전체를 포괄하는 종교 건축이 존재하는데, 여신묘를 그렇게 본 것이다. 하지만 훙산문화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성소’가 존재한 것은 아니며, 권역별로 자신들 취락 공동체에 의례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전 사회를 아우를 신 관념이 성립한 것은 아니었다. 혈연 범위를 뛰어넘는 배타적 권력이 종교 의례를 독점했다는 흔적도 찾기 어렵다. 은 왕조의 경우 최고의 신인 ‘제’와 소통하는 유일한 인물은 왕이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왕을 ‘신들의 왕’인 마르두크의 대행자로 여겼고, 고대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모든 사원의 수장’으로서 지상에서 신을 대신했다. 그에 비해 훙산문화에서는 전 사회를 아우르는 강력한 권력자가 출현했다거나 종교권력이 획일화됐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

이제 두 번째 질문을 생각해보자. 훙산문화는 한국 내 일부 기대처럼 한민족의 기원이자 우리의 뿌리일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보기 어렵다. 훙산문화에선 여러 유물과 유적이 출토됐다. 그 가운데 한국의 역사 애호가들이 주목하는 세 가지는 △옥저룡 △여신묘에서 출토된 인물상 △적석총(돌무지무덤)이다.

옥저룡은 짐승 형상을 한 옥 재질의 장신구로, 모습이 용 같지만 한편으로 돼지(猪) 같다고 하여 그렇게 명명됐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곰(熊)과 비슷하므로 옥‘웅’룡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여신묘에서 진흙으로 빚은 곰발이 나온 걸 고려하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단군신화에서 알 수 있듯이 곰은 우리가 예로부터 신성하게 여긴 동물이다. 그렇다면 이 장신구를 만든 사람들은 우리 조상과 깊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웅녀, 양날의 칼

훙산문화 유적인 여신묘 발굴 현장에서 출토 당시 촬영된 여신상(왼쪽)과 복원을 거친 모습. 한겨레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여신묘의 인물상, 즉 여신상이다. 여신상은 당시 공동체의 숭배 대상이었다. 훙산문화가 곰과 관련 있다는 전제 아래 이 여신상을 보면 웅녀 같은 우리 신화 속 성녀를 형상화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적석총도 다르지 않다. 고구려인이 적석총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를 통해 우리와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을까.

옥저룡과 여신상부터 말해보겠다. 우선 옥저룡이 곰을 닮았는지 돼지를 닮았는지는 나중 문제다. 곰을 닮았다 하더라도, 곰을 숭배하는 풍속은 유럽부터 아메리카까지 세계 각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여신상으로 대표되는 여신 숭배 또한 세계 도처에서 확인된다. 단적인 사례로 중국 신화에서 삼황 중 한 명이자 인류를 창조한 것은 여신인 ‘여와’이며, 선계의 성스러운 어머니 ‘서왕모’는 모든 신선을 감독하는 최고위 신이었다. 수메르 신화의 여신 ‘인안나’는 하늘과 땅을 지배했으며, 이집트 신화에서 하늘의 신인 ‘누트’ 또한 여신이었다. 곰이나 여신 숭배 같은 요소는 인류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적석총이다.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은 아무리 올려잡아도 기원전 400~500년이다. 훙산문화와는 2500년 넘는 시기적 격차가 존재한다. 더욱이 고구려 적석총이 산재한 압록강 중류 일대와 훙산문화 유적지는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다. 속성도 다르다. 훙산문화 적석총은 무덤인 동시에 제단이었다. 주검을 묻지 않은 적석총은 무덤과 무관한 제단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고구려 적석총은 무덤이었고, 그 자체가 제단으로 여겨진 것은 아니다. 외형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무리하게 연결하는 일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무덤)와 마야의 피라미드(제단)를 동일 선상에 놓는 것과 같다. 사실 고대에 피라미드 형식의 구조물은 꽤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기술적 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높은 건축물을 쌓으려면, 상부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하부를 넓게 퍼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와 지구라트(성탑), 적석총의 모양새가 비슷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훙산문화를 일군 사람들 내지 그 후예가 동쪽으로 이동했고, 그 흔적이 2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압록강 중류에서 나타났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길이 없다. 현재까지 연구 성과에 비춰보면, 고조선의 출발을 아무리 올려잡아도 훙산문화는 그 이전 시기의 산물이며 지역도 동떨어져 있다. 더욱이 훙산문화는 이후 랴오시에서 일어난 청동기문화와의 연결고리마저 약한 실정이다.

역사인가 신앙인가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사이비역사가들이 주목한 훙산문화의 특징적 요소가 중국의 역사 왜곡 프로젝트인 동북공정 이념, 즉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곰이 대표적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훙산문화를 삼황오제 중 한 사람인 황제(黃帝) ‘헌원’이 남긴 흔적으로 보고 있다. 황제는 오늘날 중국인에게 단군 같은 민족의 구심점이다. 이때 유효한 증거로 활용된 것이 바로 옥‘웅’룡이다. 황제가 세운 나라의 이름이 ‘유웅’인데, ‘곰=웅’이기 때문이다. 즉, 곰 장식은 훙산문화와 황제의 연관성을 밝히는 지표였다. 적석총도 마찬가지다. 중국 쪽 이해를 바탕으로 훙산문화와 고구려의 관련성을 바라보면 고구려는 중화문명을 이룬 훙산문화의 후신이니, 그 역사도 중국사라는 논리가 탄생한다.

중국 학계가 세계 학계로부터 고립돼 고대사를 부풀리는 일은 황당한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500년 무렵의 초기 청동기문화인 얼리터우 문화를 실존 여부가 불분명한 하 왕조의 유산으로 보며, 그 건국 연대를 기원전 2070년으로 확정한 일이 대표적이다. 또 신화적 인물인 삼황오제를 역사적 인물로 환원해, 중국 각지에 존재하는 유적·유물에 그들의 전승을 접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마치 오늘날 그리스에서 신화 속 영웅 ‘테세우스’의 무용담을 사실로 보아 이를 복원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증거가 불분명한 결론은 신앙이다.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잣대는 동등해야 하지 않을까.

강진원 젊은역사학자모임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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