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라디오·흑백TV.. 지금도 고쳐드립니다

이재형 입력 2017. 8. 22.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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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가전제품 수리해온 충남 '고려전파사', 발길 끊겨도 가게 문여는 이유

[오마이뉴스 글:이재형, 편집: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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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태상 사장이 가전제품을 수리하며 352테스트기로 건전지의 전류(암페어)를 측정하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1960년부터 30여 년 동안 농촌지역 읍면소재지에서 성업을 했던 가게 중 대표적인 것이 '전파사'다. 농촌 전기 공급으 로 기계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그와 함께 들어온 라디오, 카세트, 흑백텔레비전 등을 수리하는 몫을 맡았다.

그곳에선 음악 소리와 라디오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텔레비전이 처음 나왔을 땐 시골 꼬맹이들이 가게 유리창 안을 구경하느라 까치발을 서가며 머리통 싸움을 해댔다.

어디 그뿐인가. 요술상자 같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뜯어놓고 납땜을 해가며 수리를 하는 가게 사장님의 모습을 보며 장래의 꿈을 키운 소년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읍면 소재지마다 성업을 했던 전파사들이 이젠 시대변화에 밀려나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 지도 오래다.

충남 예산군 고덕면 소재지에는 1960년대에 이일대(고덕, 봉산, 면천 등) 최초로 전파사를 열었던 가게가 지금까지 문을 열고 있다. 고덕사거리에서 남쪽, 면사무소 방향으로 조금 더 가면 보이는, 간판이 허름한 '대우전자 고덕대리점(옛 고려전파사)'이 그곳이다. '말자'가 개명을 했어도 여전히 말자네 집으로 불리듯,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아직도 '고려전파사'라고 부른다.

10평 남짓한 엉성한 가게 안에는 제때 팔지 못한 제품들이 먼지를 쓰고 있다. 한태상(81) 사장은 뒤통수가 나온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1967년 현재 가게 건너편에 세를 얻어 문을 연 뒤로 50년 세월 동안 면 소재지를 지켰으니 이 업계는 물론이고 지역의 산증인이다.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땐 '고려무선'이었어요. 한참 뒤에 '전파사'로 바꿨지.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땐 삽교, 덕산에도 없었고, 예산읍에 주교무선과 신흥사 딱 두 곳뿐이었어."

그때만 해도 고덕이 쌀 주산지였기 때문에 부자들도 많고 상권이 커서 자연스럽게 수요가 생겼다.

"일제 내쇼널·소니라디오가 부잣집에나 있을 때지요. 이런 라디오 한두 대 있는 곳이면 부촌이라고 했지. 고덕 전체를 통틀어 100대 정도나 됐으려나. 선거철이 되면 라디오 있는 집으로 다 모여서 뉴스를 듣고 그랬어요. 금성사에서 부락별로 이장 집에 라디오를 놔주던 시절도 있었고…."

라디오는 1945년 미 군정이 광석 라디오를 들여오면서부터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1950년에 나온 제니스 트랜스오셔닉 라디오는 당시 쌀 50가마 가격이었다. 1957년에는 공보처가 진공관이 5개인 필립스 5구 라디오를 수입해 공급했다. 1959년에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A501 금성 라디오를 만들었다. 그리고 1960년에 트랜지스터 6석 라디오를 본격 생산했고, 당시 국내 라디오 보유 대수는 40여만 대였다고 한다.

 한태상 사장이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가게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농촌 마을 구석까지 전기가 들어오고 라디오가 가정에 보급되면서 생활가전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고려전파사로 일거리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초기엔 서울 세운상가에서 라디오 케이스하고 부속품을 사다가 직접 조립해 만들어서 팔았어요. 그 라디오 한 대에 쌀 세 짝 값을 받았는데 하나 만드는데 재료가 한 짝 값이야. 한 대 팔면 쌀 두짝이 남는데 하루만에 최고 48대까지 팔아 봤으니까. 그럼 쌀이 몇 짝이야. 쌀 시세가 최고인 시절 아닌감."

라디오에 이어 흑백텔레비전이 보급되고 전기밥솥에 각종 가전제품이 늘어나자 호황기는 1980년대까지 지속됐다. 직원도 두세 명이나 두고 면천면 소재지(시장 안 중앙옥 옆)에도 점포를 냈다. 마을마다 집마다 출장 수리도 많이 다니고 일거리가 많아 밤새 '달그락'거리며 수리를 한 적도 한두 날이 아니었다.

"돈을 많이 벌었겠다"는 물음에 한 사장이 사람좋은 표정으로 웃기만 하자, 옆에 앉아있던 부인 권영화(78)씨가 거들고 나선다.

"많이 벌었지유! 그리고 사업한다구 많이 까먹었슈. 어디 한 두 번이야쥬. 그저 사람만 좋아서 다 자기 같은 줄 알고…. 너무 믿는 게 탈이유. 내가 뭐라고 하면 '그릇이 넘쳐서 나간거다. 먹고 살믄 되잖냐'고 해유. 그래서 내가 그랬네유. 돈 다 떼먹었어도 사람 안 떼먹고 그냥 놔둬서 다행이라고."

그러고는 부부가 같이 한바탕 웃는데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젊은 시절 사업에 크게 실패한 경험이 있음에도 돈이 모이면 가만있지를 못했다. 40여 년 전에는 오가에 건전지공장을 차렸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셋이 시작했는데 돈 많이 까먹었다"고 한다. 15년 전 즈음엔 도계장사업에도 손댔다가 실패했다. 참으로 그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이다.

한 사장은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고급기술을 어디서 배웠을까.

"군대 제대하고 내무부(지금의 행정자치부)에서 한 2년 근무했어요. 시험 봐서 들어갔지. 그런데 적성에도 안 맞고 안 좋은 일도 있었고 해서 그만두고 친구들 셋이 사업을 시작했어요. 인천 소사에서 '아이디아'라는 라디오 조립회사를 창업했는데 3년인가 하다가 동업자 간에 다툼도 생기고, 게다가 큰돈은 아니지만 경리가 챙겨 달아나는 바람에 문을 닫았어. 돈도 없고 갈 데가 있나, 고향으로 내려왔죠. 그때가 28살 때인 거 같은데."

그러고 얼마간 쉬었다가 나이 30에 성에 차지 않지만, 조그맣게 고려무선을 개업했다. 한 사장은 특별히 학원에 다니거나 누구로부터 기술을 전수하지 않았다. 필요한 모든 지식과 기술은 책으로 해결했다. 원리를 터득하고 정확한 구조를 아는데 책 이상 없다는 게 그의 신조다. 그 때 공부했던 전문서적이 창고에 몇 상자나 쌓여 있다고 한다.

"책 보고 연구하고, 학원 가서 회로도면 구해다가 공부하고, 새 제품 나오면 우선 뜯어보고 그랬지. 그만한 힘 안 들이고 밥 먹고 사나."

한 사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이 양반은 뭐든지 넘한티 배우지는 않고 책 갖고 씨름해유" 하는 부인의 표정에 무한한 신뢰가 묻어난다.

 각종 부속들을 용도별로 보관한 부속함과 40년이나 됐다는 352테스트기(바닥에 놓여있는 기계).
ⓒ <무한정보>이재형
가전제품이라면 안 고쳐본 게 없고, 한 번은 의료기기도 수리를 해 보았단다.

"30년 정도 됐지 아마. 의사가 마취통이란 걸 고쳐달라고 가져왔는데 처음 보는 물건이야. 독일제인데 국내에도 몇 대 없는 귀한 거래. 마취주사약을 적당량 주입하는 기계라는데 작동이 안 된다는 거예요. 나사도 육모보드라 뜯으려고 해도 당장 연장이 있어야지. 일주일간 매달려서 전부 뜯고 수리해서 고쳤는데 의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개한테 우선 실험해 보더니 잘 고쳐졌다고 좋아하데. 서울서도 못 고쳤는데 시골 와서 고칠 줄은 몰랐다고 얼마나 고마워하던지."

진공관과 트랜지스터에서 I·C(집적회로)로 발전하고, 컬러TV가 나오고, 컴퓨터가 나오고, 그렇게 세월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1990년대 들어 호황기가 주춤하더니 가전제품대리점들이 속속 생겨나고 AS가 보편화 됐다. 그동안 고쳐 쓰던 세상에서 새로 사 쓰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전파사가 할 일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은 고치질 않아요. 저게 한참 전에 나온 120만원짜리 텔레비전인데 부품이 전부 외국거라 고치려면 50만 원 넘게 들어. 그러니 뭐하러 고쳐, 그 돈이면 더 좋은 거로 사는데…. 선풍기만 해도 그래요. 한때는 1년에 200대씩 팔았는데 올해 3대 밖에 못 팔았어요. 우리 집은 신일선풍기를 취급하는데 요즘은 절반 값이면 살 수 있는 중국산이 판을 쳐요. 쓰다 고장 나면 버리고 다시 사면 되니까. 게다가 중국산은 고쳐 쓸 수 없게 만들어 놨어요"

언제까지 가게 문을 열 계획이냐는 물음에 한 사장은 "지금 이 나이에 전업을 할 수도 없고 하루에 100원을 벌건, 1000원을 벌건, 내 가게니까 그냥 열어야죠. 친구들 심심찮게 찾아오는 사랑방도 되니까" 하고는 껄껄껄 웃는다.

한 사장의 편안한 웃음과 여유 있는 풍모를 볼 때 고려전파사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문을 열 것 같다.

 한태상 사장이 옛날이야기를 풀어놓자 부인 권영화씨가 옆에 앉더니 말을 보탠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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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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