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6백 원 더 비싼 주유소에 '법인 차량' 장사진 왜? -취재 뒷얘기- ①

조기호 기자 2017. 8. 2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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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7원. 60원도 아니고, 600원이나 차이가 났습니다. 평균적인 휘발유 값보다 말이죠. 뭐 이런 데가 다 있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고급 법인 차량들은 매일 넘쳐났습니다. 주유를 하기 위해 20m 이상 줄을 서는 장사진도 펼쳐졌습니다. 현상은 보이는데 배경은 숨어 있었습니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뻗치기(용어 설명: 하염없는 대기)에 들어갔습니다. 2주 동안 촬영, 1주 간 동안 검증, 그 모든 과정을 SBS 취재파일 애독자에게 공개합니다.

● 손가락 세 개 펼치니 3만 원이…

서울 용산의 D 주유소는 새벽 5시에 문을 엽니다. 그때부터 차량들이 줄줄이 들어옵니다. 95% 이상이 번호판에 ‘허, 하, 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운전자들은 기름을 넣고, 세차를 마치고, 걸레로 정성껏 닦습니다. 직원들과 이런저런 얘기도 나눕니다. 짧게는 15분, 길게는 1시간 가까이 머물기도 합니다.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담았습니다. 이들 운전자는 대부분 법인 대표나 임원을 수행하는 ‘기사’들이었습니다.

뷰파인더를 더 가까이 당겨보니 기사들에게서 일정한 패턴이 보였습니다. 주유를 하기 전이나 마칠 때쯤 이들은 손가락 신호를 합니다. 한 개, 두 개, 세 개. 그런 뒤 카드를 몇 개 건넵니다. 사무실에 다녀온 주유소 소장은 휴지와 영수증, 카드를 잘 포개 기사에게 건넵니다. 그 사이를 잘 보니 현금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 번 접어놔서 아주 잘 봐야 합니다. 몇몇 부주의(?)한 기사들 덕분에 그 속에 있던 현금을 따로 빼서 들고 다니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손가락 개수만큼 ‘카드깡’을 하는 현장입니다. 예를 들어 카드는 50ℓ를 넣었다고 결제합니다. 하지만 실제 주유는 30ℓ만 합니다. 나머지 20ℓ에 해당하는 돈을 현금으로 받는 겁니다. 당연히 범죄입니다.

‘포인트’를 적립하는 건 간단합니다. 여러 카드 중에 주황색 카드가 있습니다. 주유할 때 이 카드를 주고받습니다. 리터 당 50~200원 안에서 포인트가 적립됩니다. 그걸 나중에 현금으로 그대로 돌려받습니다. 내 카드로 결제하고 포인트를 쌓았다면 ‘절약’입니다. 그러나 결제 카드는 법인 카드입니다. 포인트는 법인에 귀속됩니다. 그걸 개인이 가져간 겁니다. 횡령입니다.

별도 카드를 주고받지 않고 영수증에 사인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매달 한 번에 결제하는 ‘외상’ 방식입니다. 카메라를 통해 확인한 이 세 가지 패턴은 굉장히 유기적이었습니다. 포인트를 쌓으며 카드깡을 하거나, 포인트를 쌓으며 외상을 하거나, 포인트는 기본에 외상을 하면서 카드깡을 하는 등 패턴들의 배합이 교묘하게 이뤄지는 그곳은 정말이지 ‘수상한 주유소’였습니다.

● 자기 차도 모자라 지인 차에도 ‘공짜 주유’ 하는 일부 기사들

패턴을 알고 나니 배경이 보였습니다. 낯익은 기사가 등장하면 ‘또 오셨네’ 혼잣말이 튀어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일부이긴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싶은 기사들도 있었습니다. 상당히 신뢰할 만한 복수의 제보자에게서 확인을 거친 기사들의 ‘민낯’은 이렇습니다.

모 법인 소속 기사는 30분~1시간 주기로 법인 차량 석 대를 가져와 포인트 적립에 카드깡을 하고 갔습니다. 당당했습니다. 쭈뼛함도 없었습니다. 모 연예기획사 대표의 차량을 모는 기사는 매번 가져오는 차가 달랐습니다. 한 대는 해당 법인 차가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차량들은 각각 외제차, 국산차로 모두 개인 차량이었습니다. 취재 결과 두 차량 중 한 대는 기사 본인의 차였고, 다른 차는 기사의 지인 차였습니다. 복수의 제보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상 시 대표 차에 주유하고 남긴 기름이나, 적립한 포인트로 개인 차량에 기름을 넣는 분이다.” 카드깡은 기본이고 말이죠.

모 법인 기사의 경우 카드깡은 안 하는 대신 포인트만 차곡차곡 쌓는다고 합니다. 그러곤 100만 원 가까이 되면 한 번에 현금으로 찾아간다는군요. 법인에서 허락했다면 상관이 없겠죠. 하지만 과연 해당 법인에서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요?

모 법무법인의 차량 기사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차량 관리를 전담하는 팀장도 이 주유소를 찾았는데, 공짜 세차만 하고 사라지는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차량 문 한번 열지 않고 마치 익숙한 듯 움직이는 동선이 예사롭지는 않았습니다.

정부 기관, 공공 기관의 관용차도 있었습니다. 법인은 주주의 돈이 새나가는 것이지만, 해당 기관들은 국민의 세금을 도둑 맞고 있는 겁니다. 정부 모 부처 차관급 차량의 수행 기사도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제보자에 따르면 일부러 남긴 기름을 자신의 차량에 주유하거나, 아예 말통을 가져와 담아간다고 합니다.

해당 보도 이후 많은 법인들이 감찰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부인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영수증을 제출한데다, 연비도 다른 기사들과 엇비슷하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건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D 주유소가 자체적으로 기사들의 카드깡, 포인트나 주유 적립 등에 대한 별도의 자료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해당 주유소가 최근 증거 인멸에 나선 사실이 확인됐지만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으니 결과를 지켜볼 일입니다.

8시 뉴스에서는 ‘수상한 주유소’를 찾는 일부 법인 차량들만 공개됐습니다. 제한된 방송 시간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해당 법인에서 가담한 차량 대수도 고려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과는 담 쌓고 성실히 일하는 기사들이 오히려 역피해를 볼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여 다음 후속 취재파일에서는 SBS 카메라에 포착된 법인을 최대한 공개할까 합니다. 아울러 이 ‘수상한 주유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다뤄볼 생각입니다.

끝으로 해당 주유소의 실제적인 소유주가 제보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또 다른 불법을 모의하고 있는 정황도 감지됐습니다. 보는 눈이 많아졌습니다. 자중하시길 당부 드립니다.   

조기호 기자cjkh@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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