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暴 제지하다 합의금 5000만원.. 빚더미 앉은 순경

김은중 기자 입력 2017. 8. 22. 03:10 수정 2017. 8. 2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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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집행 했는데.. 소송 휘말려 속앓이 하는 경찰들]
- 執猶 선고받으면 파면되는데..
치료비 300만원까지 물어주고도 형사소송서 징역6개월·선고유예
주폭, 損賠 4000만원 추가 요구
'1년째 소송' 사연 알려지자 동료 경찰들 1억4000만원 모금

'도와주세요, 경찰 가족 여러분. 그저 성실하게 일하던 2년 차 순경. 눈 깜짝할 새에 5000만원이 넘는 빚을 졌습니다.'

지난 17일 경찰 인트라넷(내부 통신망)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서울 한 지구대 소속 박모(34) 순경은 지난해부터 주폭(酒暴·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소송전(戰)을 벌이고 있다. 만취 상태의 남성(34)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전치 5주의 상처를 입혔다며 소송을 당한 것이다. 동료 경찰들이 "나도 범법자들로부터 억울하게 당한 일이 있다. 남의 일이 아니다"며 모금 운동에 나섰다.

◇주폭의 소송 위협에 시달리는 순경

지난해 7월 16일 박 순경은 "남자가 주점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피우고 영업을 방해한다"는 신고를 받았다. 그를 현행범으로 체포해 지구대로 데려왔다. 술에 취한 남성은 박 순경을 때릴 듯한 자세를 취했다. 박 순경은 이를 제지하려다 왼쪽 손바닥으로 상대의 목 부위를 밀쳐 넘어뜨렸다. 이 남성은 바닥에 부딪혀 머리 등에 전치 5주의 상해를 입었다. 박 순경은 "공무 집행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취객을 폭행한 혐의(특가법상 독직폭행)로 기소됐다. 좀 더 방어적으로 대처했어야 한다는 게 기소한 검찰의 판단이었다.

이 남성은 박 순경을 상대로 형사와 민사소송을 냈다. 경찰공무원법에 따르면 현직 경찰이 재판에서 자격정지 이상의 형(刑)을 받으면 퇴직해야 한다. 재판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박 순경은 형사합의금 5000만원과 치료비 300만원을 냈다. 억울했지만 조금이라도 유리한 판결을 얻기 위해서였다. 박 순경은 무리하게 대출을 끌어다 썼고, 동료들은 사비(私費)를 털어 보탰다.

박 순경은 지난 7월 징역 6개월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만취 남성이 위협적인 행동을 했지만, 박 순경이 주먹이나 팔을 잡는 방법으로 제압이 가능했다"고 했다. 박 순경은 가까스로 경찰직은 유지했다. 경찰 내에선 "위협을 받는 찰나의 순간에 나온 대처에 너무 엄격한 잣대를 댔다"는 말이 나왔다. 이 사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이 남성은 작년 9월 또 술에 취해 영업방해를 한 혐의로 구속돼 옥살이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박 순경을 상대로 지난 12월 민사소송을 냈다. 정신이상 증세를 앓게 됐다며 4000만원의 손해배상과 함께 치료비를 요구했다.

◇경찰, 동료 위해 1억4000만원 모금

동료들이 움직였다. 많은 경찰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개의치 말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며 응원했다. 지난 17일 글이 올라온 후 이틀 동안 경찰 5730명이 적게는 1만원에서 많게는 30만원까지 약 1억4000만원을 박씨의 계좌로 보내왔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 모여 이틀 만에 모금을 중단했다. 글을 올린 박 순경의 직속상관(지구대장)은 "민원인에 의해 억울한 경험을 했던 경찰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박 순경은 주변에 "손해배상을 하고 남은 돈은 나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동료 경찰을 위해 쓰겠다"고 했다.

경찰에 공무 집행을 하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직원을 지원하는 제도는 따로 없다. 경찰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억울한 상황에 처한 동료에게 소송비 등을 지원하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는 일종의 자발적 '품앗이'다. 경찰이 공무 집행 중 범죄자로부터 위협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경찰에 대한 공무 집행 방해 사범은 1만4556건(2015년 기준)에 달한다. 그러나 범죄에 적극 대응하다 소송과 민원에 시달리는 경찰이 많다.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부 경찰 간부는 "이번 기회에 공무 집행을 하다 억울한 일에 휘말린 경찰들을 위한 구제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했다.

경찰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무 집행 방해 사범에 무관용 원칙으로 강력 대응하겠다. 민·형사상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밝혔지만 매번 공염불에 그쳤다. 서울 지역에 근무하는 한 경찰관은 "결국 민원인과 피의자에겐 절대 저항하지 말고 얻어맞으라는 것 아니냐"며 "경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범죄를 막아 시민을 보호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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