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의 연극화는 역사의 화석화에 맞서는 작업이었다"

문학수 선임기자 2017. 8. 2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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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세월호 이야기를 쓴다는 것 - 극작가 4명 좌담

극작가 4인이 ‘세월호를 이야기로 쓴다는 것’을 주제로 특별좌담을 했다. 왼쪽부터 고연옥, 구자혜, 한현주, 이양구 작가.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연극계는 2014년 참사 이후 이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연극동인 ‘혜화동1번지’ 6기 동인들은 참사 이듬해인 2015년부터 ‘세월호 프로젝트’를 여름마다 공연해왔다. 3년째를 맞은 올해에는 ‘세월호 2017’이라는 타이틀로 지난달 6일부터 이달 13일까지 모두 8개 작품을 올렸다. 모든 공연을 마무리한 직후, 4명의 극작가들이 모여 ‘세월호를 이야기로 쓴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좌담했다. <할미꽃단란주점 할머니가 메론씨를 준다고 했어요>(윤한솔 연출)를 쓴 윤미현 작가는 다른 일정이 겹쳐 참석하지 못했다.

구자혜(사회, 이하 구): 오늘 모임은 혜화동1번지 6기 동인의 기획초청공연 ‘세월호 2017’에서 신작을 발표한 극작가 네 명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이번에 공연한 작품을 어떻게 쓰게 됐는가? 어떤 고민에서 출발했는가?

이양구(이하 이): 경기도 안산을 오가면서 노래주점에 간 적이 있다. 2014년 초에 주점을 개업했는데 세월호 참사 후 가게 앞이 촛불집회 장소가 됐다고 했다. 처음에는 슬픈 마음에 함께했는데 한 달, 두 달, 세 달이 가도 촛불이 꺼지지 않아 가게가 망했다고 했다. 일년 후 다행히(?) 촛불이 소강상태가 돼 재개업을 했다. 술과 안주를 자꾸 먹으라고 내주시기에 사양했더니, “여러분이 제 고통을 아시나요? 정말 힘들었어요”라고 하시는 거다. 그 말이 인상에 남아서, 그 이야기를 연극으로 해보기로 했다. 별로 함께하고 싶지 않았어도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고 고통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었다.

‘비온새 라이브’. 전진아 제공

고연옥(이하 고): 재미있기는 하지만, 극적인 순간, 극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는데 (참사나 고통에서) 비껴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이: (내) 작품 속에서 ‘수해’(물난리)는 세월호를 뜻하기도 하지만, 내가 어릴 때 살던 마을이 실제로 물에 잠겼던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우리 마을은 수몰됐지만 윗마을에서는 길만 끊겼다. 옆마을은 지름길만 끊어졌고, 또 다른 마을은 오히려 아스팔트길이 생겨 교통이 편리해졌다. 사건을 이해하는 방식이 단순화되기 쉬운데,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 사람이 연루되는 방식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한현주(이하 한): 세월호 희곡 제안을 받고 곧바로 수락했다. 부채감과 열패감 때문이다. 공연 시작 타이밍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쓰기 시작하면 맺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시공간적 배경을 달리하거나 동화적 장치를 통해 한 발짝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나는 제일 먼저 유가족을 등장시키기로 결심을 해버렸으니 답이 영 안 나왔던 거다. 대사 한 줄 쓰기 어려웠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캐릭터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검은 입김의 신’. 박태준 제공

고: <검은 입김의 신>은 아주 오래 생각했던 작품이다. 탄광 이야기 같은 극적인 삶을 그려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잊고 있다가 세월호 유가족들을 보면서 다시 떠올렸다. 3년간 우리 역시, 그분들과는 좀 다른 의미의 검은 하늘 아래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죽어간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계가 탄광의 어둠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게 돼 우리를 구한 것이 아닐까, 갇혔던 건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고 이 세계가 아니었을까? 의무감에 와서 보고, 울고, 면죄부를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문을 던지는 작품, 길게 가는 작품이면 좋겠다.

구: 세월호를 정말 먼 얘기로 만드는 사람들 얘기를 해보자 싶었다. 그래서 원래 썼던 대본을 엎고 새로 쓰기 시작했다.

고: 2015년 탄광 취재를 다녀온 후, 시놉시스도 정리돼 있었는데, 쓰면서 맞닥뜨려야 할 두려움이나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유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연을 할 자리가 마련되니 안 쓸 수가 없었다. 깊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탄광촌이 단지 세월호의 메타포로 읽히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와 닮았지만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도 보여졌으면 했는데.

구: 세월호 작업의 경우, 배우들이 작가의 의도를 궁금해 했을 것 같다.

한: 첫 리딩 때 작가가 너무 겁을 내니까, 이연주 연출이 배우들에게 어미 하나도 바꾸지 말고 그대로 읽어보자고 했다더라. 사실 다른 작품을 할 때는 작가와 협의 없이 대사를 삭제하거나 바꾸면 예민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에 개의치 말자고 마음을 먹고 연습실을 찾아갔다. 대사 한 단락이 통으로 날아가도 아무렇지 않았다. 세월호 어머니들의 공연인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와 연속으로 공연된다는 게 너무 두려워서 최종 리허설에도 못 갔다. 그분들 앞에서 내 작품을 하는 게 죄송스러워서였다.

‘유산균과 일진’. ‘혜화동 1번지’ 6기 제공

고: 작품을 하면서 제일 두려웠던 것이 유가족들이 보시고 불쾌해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극단을 만들고 직접 공연을 하면서 연극적 문법에 익숙해지는 걸 보면서 마음이 놓였다. 안산에서 우리의 작품을 공연할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구: 2015년 공연 때는 유가족이 보러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배우 한 명이 무대에서 손을 떨었다고 하더라.

이: 2014년부터 세월호 관련 작업을 했다. <노란봉투>는 유가족이 자살하는 작품이라 부담이 됐는데, 그 공연을 본 유가족들과 같이 얘기를 나눈 다음에 마음의 부담이 줄었다. 오히려 연극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밝은 모습으로 그려졌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유가족 부부 사이의 문제였다. 이들이 서로를 잘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다큐멘터리를 봐도 엄마는 엄마끼리 아빠는 아빠끼리다. 서로 바라보는 게 너무 힘들 것 같다. 그런 상황을 직접적인 이야기로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탄광촌 부부 얘기로 썼다. 광부인 남편이 다치고 의처증에 걸리는. 그 장면이 계속 걸렸다. 탄광에서야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가 흔하지만, 실제로 연극을 보면 (세월호) 유가족 얘기라고 분명히 연상을 할 텐데…. 유가족들이 섭섭하게 느끼면 어떻게 할까, 그런 걱정들이 있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해 더 깊은 곳까지 얘기해야 전체의 얘기가 될 수 있다. 언제부턴가 고통을 덜 표현하거나 고통의 표현을 목표로 삼지 않는 작품이 많아진 것 같은데, 세월호와 관련해서는 그 고통을 표현해야 한다. 연극이 제의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표현이 단지 세월호에 국한되는 얘기만은 아니길 바란다.

구: ‘세월호 연극’을 앞으로도 계속하는 게 유효할까, 의미가 있을까?

고: 계속돼야 한다. 매년 다른 방향으로라도 좋으니 지속되고, 매년 문제작들이 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여기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다시 공연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한다.

이: 홀로코스트 서사를 인류의 보편적 트라우마로 확대하는 데 예술이 기여했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런 서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도덕적 보편성을 재구성해야 한다.

한: 세월호는 누가 뭐라 해도 영원히 치유돼야 하는 고통이다. 그 해결의 완성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계속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서사이든 인문학적 방식이든 계속 얘기돼야 한다. 그래야만 치유든, 도덕적 인식의 재정립이든 가능해지지 않겠나.

이: 세월호를 연극으로 만드는 작업은 굳어지려는 물질을 액체로 만드는 작업이다. 관객 한 명이 공연 끝나고 뒤풀이에서 자꾸 울길래, 물어봤더니 세월호를 잊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거다. 우리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잊게 된다. 연극을 하는 것은 화석화하는 역사에 맞서는 작업이다.

고: 광주, 4·3, 사북 등 문제적 역사가 화석화돼 있는 것은 민주화의 경험이 짧았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고통의 계승이 아니라 어떤 정신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세월호가 했다.

구: 나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쓰고 혼자 연출 콘셉트를 만드는 스타일에 가깝다. 그런데 같이 사유하며 같이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고 그것에 더 익숙해지고 있다. 솔직히 연극은 ‘고독한 작업’이라 생각했다. 3년간 같은 배우들과 세월호 작업을 하면서 많이 바뀌었다. 세월호는 연극을 작업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줬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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