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 25돌] 베이징 '코리아타운'의 눈물

입력 2017. 8. 20. 19:26 수정 2017. 8. 2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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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사드 직격탄 맞은 왕징
경쟁력 악화 속 불매운동 덮쳐
한식당 매출 30% 이상 줄고
여행·콘텐츠 업계도 '설상가상'

[한겨레]

배우 ㅅ(49)씨는 올해 2월17일 유명 요리사와 함께 중국 베이징에 식당을 열었다. 주요리는 한식, 전채와 후식은 양식·일식을 곁들인 대형 고급 식당이었다. 그러나 석달을 채우지 못하고 지난 5월 문을 닫았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와 관련해 한국을 겨냥한 중국의 불매운동이 극성일 때였다.

베이징에서 가장 오래된 한국 식당으로 꼽히는 ㅅ식당도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중국 손님들은 한국인 지배인을 불러다 사드 문제로 시비를 걸었다. 단체 손님이 예약을 하고 와서는 “왜 한식당이냐”고 자기들끼리 다투다 죄다 가버린 일도 있었다.

베이징의 한국 외식업계는 올해 들어 한국 식당 매출이 30%가량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심한 곳은 70% 가까이 매출이 떨어진 식당도 있다고 한다. 10여년 전만 해도 한국 식당 손님은 한국인 위주였는데 이후 중국인 비중이 70~80%에 이르게 돼 불매운동의 충격이 더욱 컸다.

왕징 한국인 사회의 한숨은 오는 24일 수교 25년을 맞는 한-중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베이징의 한국 식당들이 어려움을 겪는 사태가 처음은 아니다. 1995년부터 유학생 밀집 지역인 우다오커우에서 ‘곰집’을 운영해온 김용수(49)씨는 “초기에 베이징에 개업했던 한국 식당이나 슈퍼마켓 가운데 97%는 실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개업 초기 동네 불량배들이 찾아와 ‘자릿세’를 요구했는데 다행히 충돌 없이 마무리지었던 아찔한 경험이 있다. 주변 식당들이 하루아침에 철거되는 와중에 힘겹게 자리를 지킨 기억도 있다.

성공의 약속은 없었지만, 성공을 좇는 역사는 이어졌다. 중국 외교부 산하 자문기구인 중국아시아경제발전협회 취안순지(권순기) 회장은 “그 무렵 한인들은 누군가 실패하고 돌아가면, 다른 누군가가 다시 그 자리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김용수씨는 “초기에는 서비스 노하우, 인테리어 등에서 한국 식당의 수준이 중국 식당과 격차가 컸다”고 회상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형성된 것이 베이징의 다른 외국인 공동체에서 찾기 힘든 ‘한국인 밀집 주거지역’이었다. 1997~1998년 외환위기 무렵 한국인 주재원들이 시내 집값을 감당할 수 없어 외곽으로 쫓겨나듯 몰려든 베이징 동북부의 ‘뉴타운’ 왕징, 그리고 베이징어언대를 비롯해 베이징대, 칭화대 등 주요 대학들이 몰려 있어 유학생들이 모여든 서북부의 ‘자취촌’ 우다오커우는, 한글 간판의 세례를 받으면서 명실공히 ‘코리아타운’화했다.

다만, 사드 후폭풍을 맞기 전에도 최근 몇년간 한인 사회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었다. 우선 베이징 부동산 가격이 무섭게 상승했다. 김용수씨는 “한국 식당 주인들 중에 건물주는 아무도 없다. 상가는 대부분 집체소유여서 좀처럼 매물이 없다”고 말했다. 인건비도 올랐다. 곰집 종업원 월급은 1995년과 지금을 비교하면 7.5배 차이가 난다. 한식의 독특함을 내세울 환경도 달라졌다. 김씨는 “중국 소비자 입장에선 한식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음식이 됐다. 조선족 동포들과 경쟁하다 보니 한국 식당이 ‘오리지널’을 강조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사드 피해’는 중국 시장에서 이처럼 한국 기업들의 환경이 악화되는 와중에 일어난 ‘설상가상’의 타격이었다. 여행업계는 단체관광 중단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사드 이전’부터 중국 항공사들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미주·유럽·동남아 직항편을 늘리는 변화에 고전하고 있었다. 전자상거래 발전에 기반해 급성장한 온라인 기반 중국 여행사들 때문에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도 큰 숙제였다.

한류 콘텐츠 업계가 이른바 ‘한한령’ 탓에 큰 피해를 입던 시점도, 외국 사상의 침투를 백안시하는 중국 당국이 언제 손을 쓸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던 때였다. ‘한류’가 결국엔 중국의 자국 콘텐츠 성장을 위한 디딤돌에 그칠 거란 우려도 있었다. 사드 이후 한국산 자동차의 난항은 전기차 등 새로운 요소와 더불어 급격히 재편되는 중국 자동차 시장의 변화, 중국 국내 업체들이 부쩍 급성장한 상황과 떼어놓을 수 없다. 한국이 오랫동안 강세를 보여온 스마트폰 업계도 사드 사태 한참 전부터 중국 업체들의 도전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현재의 사드 국면이 어떤 식으로 해소가 된다 해도 예전처럼 희망을 갖기는 쉽지 않을 거란 비관이 베이징의 한인 사회 내에 팽배해 있다.

베이징 한국인 밀집 거주지역 왕징의 '한국성'으로 불리는 건물에는 한국 식당과 태권도 학원, 휴대전화 가게 등이 모여 있어, 한국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간판을 정비하면서 큰 글씨는 모두 중국어로 대체됐다. 이 건물의 다른 이름인 '한식 미식성' 간판은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거셌던 지난 2월 '한식'이란 단어를 떼어내 '미식성'이라는 이름만 남았다. 베이징/김외현 특파원 oscar@hani.co.kr

한인들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코리아타운’은 도로 중국화하고 있다. 2011년 베이징시 당국이 채택한 ‘대왕징 과학기술상무신구’ 계획에 따라 왕징의 동북쪽엔 알리바바, 메이퇀(배달), 우버, 다중뎬핑(식당 등 평가공유 사이트), 셰청(씨트립·여행예약), 치후360(보안) 등 중국의 대표적 정보기술(IT) 기업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왕징의 한 부동산업체 직원은 “6~9월이 한창 성수기인데, 집 구하려는 한국인 손님은 작년에 견줘 절반쯤 줄었다”며 “한국 손님들은 오히려 온 지 얼마 안 돼서 갑자기 귀국하게 됐다는 경우가 많은데, 그 자리를 중국인 손님이 메우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은 아직 주재원들을 줄였다는 이야기가 없으니,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먼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국인을 상대로 운영되던 슈퍼마켓, 학원 등도 사람이 줄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임대료가 좀 더 저렴한 순이, 옌자오 등 외곽으로 이주했다. 지난해 말 기준 중국 공안이 파악한 6개월 이상 베이징 거주 한국인 수가 약 2만명, 단기 방문자를 고려해도 전체 6만명을 넘지 않는다. 한때 회자됐던 ‘베이징 10만 한인’ 시대는 옛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한국식(한식)이라는 글자가 사라지고 미식성이란 간판만 남은 왕징 한국성 건물. 베이징/김외현 특파원

1994년 중국에 와 줄곧 베이징에 살고 있는 서만교(46) 포스코ICT 중국법인장은 한-중 관계를 남녀관계에 빗대며, “연애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부부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했다. 서 법인장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첫 10년은 처음 만난 남녀처럼 서로 잘 모르면서도 우호적으로 대하며 알아가던 ‘탐색기’였다면, 이후 10년은 양국관계가 활활 타오르던 ‘밀월기’였다고 묘사했다. 그리고 지난 5년은 잠재됐던 문제들을 깨닫기 시작하는 ‘관계 재정립기’이고 앞으로도 당분간 이런 상태가 계속될 전망인 만큼,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사드 배치라는 난제를 맞닥뜨린 가운데 힘겹게 이뤄지는 ‘관계 재정립’ 속에서 한국인 사회의 성찰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제안들도 나온다. 서만교 법인장은 “중국의 한인 사회는 25년 전 한국인이 하나도 없었던 상황에서 너무 빠른 시간 안에 지금 규모까지 성장했다”며 “앞으로는 그동안 미뤄왔던 중국 사회와의 융합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현지화해 외부 영향을 최소화하자는 제안이다. 베이징한국중소기업협회 수석부회장(외식분과)을 맡고 있는 김용수씨는 “큰 도시에서 크게 시작하는 것만 볼 게 아니라, 작은 도시에서 작게 시작해서 예의 바르게 한다면 아직 중국엔 기회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김외현 특파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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