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적은 나라, 공시생만 많은 나라

김태훈 기자 2017. 8. 2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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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6월 24일 2017년도 서울시 지방공무원 필기시험장이 마련된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고사장을 확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오후 1시 정각, 건물마다 청년들을 뿜어낸다. 늘 북적이지만 점심시간이면 더욱 인파가 몰리는 서울 노량진의 풍경이다. 공무원 학원이 있는 건물들 주변은 학원 수업을 마치고 한꺼번에 나오는 공무원시험 준비생들로 걸음을 떼는 속도도 느려진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선 공약대로 공무원 채용 인원을 늘린 영향도 적지 않았다. “대선 전부터 공무원 뽑는 걸 늘린다고 했으니까…, 하루 아침에 확 늘어난 건 아니지만 작년 이맘때랑 비교하면 공시생들이 더 많아진 게 체감이 되죠.” 학원가 주변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는 상인의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동안 공무원 일자리 17만4000개를 만들어내겠다고 공약했다. 그 첫걸음이 올해 하반기에 경찰 등 중앙공무원 2575명을 더 뽑는 결과로 나타났다. 7월 22일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서 통과된 추가경정예산안으로 올해 하반기 공무원 채용규모는 기존보다 약 1만명 더 늘어나게 됐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소방·사회복지 등 지방직 7500명을 추가 고용할 방침이다.

■야당, 정부의 공무원 증원 방침에 반대
문호가 넓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손쉽게 합격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 추경예산안 통과로 공무원 채용 확대가 확정된 지 한 달 가까이 지난 현재 노량진으로 몰리는 ‘공시생’들의 규모 역시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계청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지난 7월의 청년층(15~29세) 실업률은 9.3%로 전년 동기 대비 0.1%포인트 상승했고, 특히 청년들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실업률인 청년층 고용보조지표3은 1.0%포인트 상승한 22.6%를 기록했다. 여기에는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거나 학원 수강을 하는 등의 취업준비생 수가 11만명가량 늘어난 점이 반영돼 있다. 실업률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공시생·취업준비생 등 잠재적 구직자들의 규모까지 반영한 결과 여전히 청년층에게 일자리가 부족한 현실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서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늘리는 게 청년층 실업률을 낮추는 방안이 될 수 없는 것인가. 이 문제는 지난 7월 임시국회에서 문 재인 정부의 ‘일자리 추경’ 통과를 두고 여야 간에 논쟁이 오간 사안이다. 보수야당은 공무원을 늘려 일자리를 만드는 대책이 국민들의 세금부담을 늘려 비생산적인 일자리를 만드는 방안이라며 정부의 공무원 증원 방침을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국제적인 비교를 통해 보면 한국은 정부 등 공공부문의 인력 고용 비중이 눈에 띄게 낮은 나라다. 거꾸로 보면 공공부문의 인력을 늘려 일자리를 만들 여지가 남아있다는 뜻도 된다.

지난달 발간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한눈에 보는 정부 2017 (Government at a Glance 2017)’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비교 대상 회원국 29개국 가운데 정부의 인력 고용 비중이 가장 낮은 나라로, 일본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전체 고용에서 정부의 고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7.6%에 불과했다. 공공부문 인력 고용 비중이 가장 낮은 일본의 5.9%보다는 1.7%포인트 높지만 OECD 평균인 18.1%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쉽게 말해 한국은 공무원이 적은 나라라는 것이다.

특히 34세 이하 청년층으로 한정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중앙정부에 고용된 공무원 중 34세 이하 청년층이 차지하는 비중은 9%에 불과했다. 비교 대상 회원국들 가운데 다섯 번째로 낮다. 청년층 공무원 비중이 낮은 순서로 1~3위를 기록한 나라들이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경제위기를 겪는 와중에 특히 청년실업이 극심했던 남유럽 국가들임을 고려하면 한국의 청년실업 수준도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 중앙정부 공무원 중 55세 이상 장년층의 비중은 한국이 12%로 가장 낮다는 점 역시 눈에 띈다. 한국은 고용에 가장 취약한 연령대일수록 공공부문에서도 일자리를 잡기 어려운 게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가뜩이나 공무원 일자리가 많지 않은데, 특히 청년층에게 열린 신규채용 문호도 넓지 않다보니 국가직과 지방직을 가리지 않고 최근으로 올수록 공무원시험 경쟁률은 높아져가고만 있다. 지방직 가운데 가장 지원자가 몰리는 시험 중 하나인 서울시 7·9급 공채의 경우 올해 6월 치러진 시험에 13만9049명이 접수했다. 뽑는 인원은 1613명이다. 평균 경쟁률 86.2대 1을 뚫어야 하는 것이다. 늘린 채용정원을 반영해 다음달 치러지는 올해 하반기 경찰공무원 시험에는 2589명 모집에 6만8973명이 몰렸다. 올 상반기 시험(6만1091명) 대비 7000명가량 늘어 26.6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고 있다.

■‘스펙 공화국’에서 다른 진로 찾기 어려워
시간이 지나도 낮아지지 않는 경쟁률 탓에 늘어나는 것은 ‘장수생’ 공시생뿐이다. 공무원 경쟁률이 갈수록 높아지는 현실 탓에 불합격을 맛보는 인원도, 다시 도전의지를 불태우는 수험기간도 늘어난다. 경쟁이 치열하다고 해서 일반 기업에 지원하는 등 다른 취업진로를 찾기도 어렵다. 여기에는 ‘스펙 공화국’이 된 한국의 취업시장에서 그나마 공무원이 ‘스펙’ 경쟁 없이 시험공부로만 승부를 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노량진에서 3년째, 대학 졸업 전 준비하던 시간까지 더하면 5년 가까이 행정직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는 양모씨(28)도 공무원시험이 ‘마지노선’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흔히 말하는 ‘지잡대’ 나와서 학벌은 어떻게 바꿀 수가 없잖아요. 그나마 학점이나 토익 같은 스펙은 준비해 놓은 게 있어서 일반 기업에 이력서 내면 어쩌다 최종면접까지 간 적도 있는데, 꼭 거기서 미끄러지더라고요. 같이 면접본 사람들도 다른 스펙은 고만고만하겠지만 적어도 ‘인서울’ 대학 출신이니….” ‘눈높이를 낮춰 취직하라’는 조언대로 눈을 낮춰도 안되는 현실 속에서 양씨가 찾은 거의 최후의 길이 공무원시험이었던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펙 과잉’의 한국 사회 현실이 젊은 구직자들을 공무원시험으로 내몰아 ‘병목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또한 국제비교로 확인된다. OECD의 ‘OECD 직업능력 개발 전망(OECD Skills Outlook)’ 보고서에 따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및 직업교육을 이수한 25∼34세 청년 비율은 한국이 67.1%로 조사 대상국 가운데 1위였다. OECD 평균(42.7%)보다는 25%포인트가량 높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보다 이른바 ‘상향 평준화’가 이뤄져 청년층 내부의 능력 편차를 매우 적게 만든 것이 도리어 문제가 됐다. 한국의 29세 이하 청년층 중 ‘직업이 있는 집단’과 ‘구직·직업훈련·교육에 참여하지 않는 집단’ 간 능력치의 차이는 1% 이하로 OECD에서 가장 낮았다. OECD 평균은 6%로, 직업이 있는 집단의 능력이 없는 집단보다 높았다. 바꿔 말하면 한국 청년은 취직에 실패하는 것이 단지 능력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복합적인 요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청년들이 공무원시험으로 몰리는 현실에 대한 대책으로 공무원 등 공공부문 고용규모를 늘려 경쟁률을 낮추는 한편, 일반 기업에서도 ‘스펙’보다는 실무에 적합한 적성과 능력 위주로 채용하는 풍토가 자리잡아야 한다는 대책이 제시되고 있다. ‘청년고용 일자리네트워크 토론회’에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김종진 연구위원은 “청년고용 대책들이 일회적 법안이 아니라 통합적이고 보편적이면서 정책 중요성 등을 고려한 사회정책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며 “대표적인 정책인 청년고용할당제를 공공부문에서는 5%로, 민간기업에서는 300인 이상 대기업으로 확대 시행하는 등의 방안을 꼽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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