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받이로도 썼나..사살당한 일본군복의 조선 위안부

이동석 PD 입력 2017. 8. 19. 23:30 수정 2017. 8. 2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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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그 섬의 박꽃 ⑦

[이동석 PD]

 
2015년 12월 28일 오후 3시 32분,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적 대안'을 도출했다는 위안부 합의문이 발표됐다. 일본 총리의 직접 사과는 없었고, 합의 내용에도 일본 정부가 출연하겠다는 10억 엔 외에 새로운 것은 사실상 없었다. 그런데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고 했다. 역사에 과연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게 있을 수 있는가? 시간을 더듬어 올라갔다. 지난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수치심을 이겨내고 공개석상에 선 이후, 진실은 조금씩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이 추악한 만행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갖은 협박과 위협을 이겨내고 무단히 노력했다. 이동석 PD도 그 중에 한명이다. 

1973년 TBC에 입사해 KBS에서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MBC를 통해 <잊혀진 전쟁-종군위안부>를 연출·제작한 한국 다큐멘터리의 산증인 이동석 PD가 1992년 프로그램 제작 취재기를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총 8회에 걸쳐 연재될 이 취재기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도 함께 담겨 있다. 이동석 PD의 말이다. 

"나는 1992년에 <잊혀진 전쟁-종군위안부> 3부작을 MBC를 통해 8.15특집으로 제작 방송하였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과, 자료 수집 과정,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모를 수회에 걸쳐 소개하겠다. 이 글에서 소개되는 프로그램의 타이틀 <종군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등으로 그 용어가 바로 잡히기 전에 통용되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프로그램 당시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종군위안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일본은 반성의 기미가 없다. 오히려 역사의 시계를 돌리려는 시도마저 하고 있다. 지금, 이동석 PD의 취재기는 우리가 역사에 묻힐 뻔한 진실을 어떻게 발굴해 냈는지 그 치열함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인간은 무엇인지, 역사는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할 것이다. 한국 외교부가 마침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전반적인 검증 작업에 착수한다고 했다. 이 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 정부와 시민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로 이 글은 1992년 취재 현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연할 목적으로, 당시의 정치 사회상을 가능한 그대로 담으려 노력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봤을 때는 이미 수정된 개념이나, 용어 등이 서술 과정에서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편집자 

지난 연재 보기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증거를 찾아라 ①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비오는 날 그의 집 앞에서 ②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피하라, 그저 피하라 ③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두 일본인을 만나다 ④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피해 여성의 사례를 듣다 ⑤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일본군 위안부 사건의 전모 ⑥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조선 여자 사냥 ⑥

일본군 40명에 위안부 1명 필요..."길에 있으면 무조건 끌고갔다"

일본은 1941년 6월, 중일전쟁의 전선이 확대되어가는 중에도 남만주 요동반도 일대에 주둔시킨 관동군의 특별대연습을 준비한다. 독소전쟁을 계기로 소련과의 일전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80여만 명의 대군이 동원되는 이 특별훈련에도 '위안부' 동원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실전 전쟁터에 여성을 동원한 군부는 이제 훈련장에도 여성을 동원하려는 것이었다. 군이 있는 곳에 여성이 있다는 선례를 원칙화시킨 것인지 모른다. 책임장교 하라시는 조선총독부로 달려갔다. 이 상황을 르포 작가 센다 가쿠오는 설명했다.

"여자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관동군사령부에서 계산했더니 병사 40명에 위안부 1명이면 병사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수치가 나왔답니다. 최소한 2만 명의 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죠. 하라시는 서울의 조선총독부로 달려가서 여자 2만 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작전개시일인 8월말까지는 채 20일도 남지 않아 시간이 없었습니다. 고심 끝에 조선총독부는 '국가총동원령'이라는 법률을 시행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당시 일제의 국가총동원령이란 1938년 4월에 공포한 전시 통제의 기본법으로 이른바 '국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국가의 모든 힘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운영함'을 말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법 제4조 징용령을 적용하여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여성들을 동원할 것을 검토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센다 가쿠오의 설명,

"이때부터 국가총동원의 이름으로 위안부 사냥이 시작됐습니다. 늙고 어리고 못생긴 여자는 군수공장으로 보내고 나이 찬 여자를 위안부로 보내는 것이죠. 이것이 정신대였습니다."

▲국가총동원 홍보영상

다행히도 국가총동원령에 의한 징용령이 시행되기 직전에 관동군특별대연습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이미 8000명의 여성들이 사냥되어 있었다. 서울 변두리 달동네에서 지난 50년의 세월을 숨 죽이며 살아온 마음 여린 할머니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길에 있으면 무조건 끌고 갔어요. 집집마다 딸이 열서너 살 되면 무조건 시집보내. 안 뺏길려고. 나는 열세 살에 도쿄 방직공장에 끌려갔어요. 거기서 열일곱 살 먹도록 일했는데 어느 날 열아홉 명 조선여자들을 오사카로 이동시켰어요. 나중에 들으니까 자기들끼리 '물모리 간다'고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위안부로 빼내는 거래요. 어린 여자들을 공장에서 일 시키며 키워가지고 나이차면 위안소로 빼내는 거죠. 나도 그렇게 오사카로 물모리 갔어요."

달동네 할머니는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빼돌려 결국 종군위안부로 끌어간다는 점에서 앞서 설명했던 황금주 할머니와 유사한 경우였다. 

중국 전선의 끝없는 소모전의 수렁에 빠진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하여 미국과 연합군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대동아공영이라는 기치를 세우고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일대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이제 전선은 중국은 물론이고 미대륙 서해안에서부터 남태평양일원(남양군도) 그리고 인도양의 미얀마까지로 넓어졌다. 더 많은 병력 더 많은 군수물자 그리고 더 많은 여자가 필요했다. 한반도는 물론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여성들도 '위안부'가 됐다. 현지에 주재했던 유럽 여성들까지 납치되어 '위안부'가 됐다는 사례도 있다. 
 
▲트럭섬의 위안소 터

총알받이로도 썼나...사살당한 일본군복 입은 조선인 위안부

나는 괌과 사이판, 멀리 팔라우(괌의 남서쪽)와 트럭(괌의 남동쪽)섬, 그리고 일본의 오키나와 섬에서 그 비극의 현장을 촬영하고 당시를 살았던 원주민들을 만났다. 중국 전선에서는 그래도 거리의 근접성 때문에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남양군도라는 머나먼 태평양 위에 떠있는 섬들에서는 조국이 어느 방향인지 알 수도 없었고 점점 치열해지는 전투 속에서 살아남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의 광기와 살기는 극도에 달하여 '위안부' 여성들을 징용 한인들과 함께 총알받이로 앞장세웠다는 증언도 있다. 

나주에 사는 어느 징용자는 팔라우섬에서 '위안부'여성으로 끌려온 고향 처녀를 만났다. 숙소가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둘은 이따금씩 스칠 때마다 오빠동생 하며 짧은 위로를 나누었는데 얼마 후 그녀는 성병으로 죽었다고 증언하며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광양의 서 노인은 사이판 앞바다에서 저쪽 수송선에 다수의 여성들이 타고(2000~3000명이라 했으나 분명치 않다.) 매일 아침 갑판에 나와 체조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 날 그 수송선이 기뢰에 맞아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했다. 그 여자들은 어찌 되었느냐고 묻자 주저 않고 "다 죽었겠지 뭐!"하고 대답했다.

팔라우 펠렐류섬에서는 광란의 일본군이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하다 연합군 저격병에 사살되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일본군복을 입은 조선인 위안부였다.

어찌 그 참상들을 필설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알아내지 못한 비극은 또한 얼마나 더 많을 것인가. 이름 석자 남기지도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버린 조선여성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10만 명이라고도 하고 30만 명이라고도 한다. 데려가고 끌어가고 납치하고 동원해 갔으면서도 동원해간 그 사람들이 그 사실을 부인하는 한 정확한 숫자를 알 길이 없다. 
 
트럭(마이크로네시아 연방. 옛 이름 추크)섬은 일본군의 태평양공격의 거점이었다. 이곳에서 인근의 일본군 주둔지에 전략물자를 분배하고 병력도 배치했다. 물론 '위안부'도 여기에 집결했다가 섬으로 분산되었다. 원주민 기미오는 당시 예인선에서 일했다.

"한국 위안부여성들이 내리는 것을 몇 십 번이나 봤어요. 한번에 20여 명씩 내렸죠."

당시 트럭의 수도였던 두블란섬은 5만명의 일본해군이 주둔하던 곳이다. 그곳에 해군사령부 터가 남아있었다. 사령부 담장 바로 밑에 위안소터가 있었다. 원주민 나카무라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일본여성이나 오키나와 여성은 없었고 조선 여성만 50명 정도 있었어요. 어느 날 밤 8시경에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고 갔습니다. 그 여성들 다 죽었죠."

▲트럭섬을 향하여

팔라우 원주민의 아리랑 "매맞고 괴로울때마다 여인들이 부른 노래"

그 위안소터 옆에 우리 눈에 익은 우물이 있었다. 둥그런 콘크리트로 통둘레를 치고 그 옆에 서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던 우물이었다. 물은 마르고 터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언제 만든 거냐고 물으니 위안소 여자들이 쓰던 거라고 나카무라는 대답했다. 그 우물 주변에 넓고 힘없는 잎들이 눈에 띄었다. 그 끝에 수줍고 옹색하게 박꽃 몇 송이가 피어 있었다. 우리 고향 담장위에 피었던 그 박꽃이었다. 이 섬 다른 곳에도 이 꽃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딱 여기에만 있는 꽃이라고 대답하며 자신도 들은 이야기지만 위안부 여성이 가져와 심은 거라고 말했다. 

목이 메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조선땅 어디에 살던, 어떤 이름을 가진, 뉘 집 따님이 이 씨앗을 가져왔더란 말인가. 전쟁터인 줄 모르고 식당일 할 거라는 기대 속에 순진하게도 박을 심고 키워 쓰겠다며 고향의 박꽃씨를 가져다 심었더란 말인가. 

원주민 마리꼬 노파는 팔라우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더듬거리며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폭격으로 죽은 그 여인들한테서 배운 노래라면서. 그 여인들이 언제 그 노래를 했었느냐고 물으니 매 맞고 괴롭고 고향생각 날 때마다 불렀다고 대답했다. 그 여인들은 얼마나 자주 매 맞고 얼마나 자주 괴로워 얼마나 자주 아리랑을 불렀으면 이 머언 땅의 원주민이 50년 전에 들었던 남의 나라 민요를 아직까지 기억한단 말인가. 내가 다닌 남양군도의 이 섬, 저 섬마다 늙은 원주민들은 아리랑을 부를 줄 알았다. 그들도 그 노래를 위안부 징용자들에게서 들었던 노래라고 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위안소 터, 위안소 터 옆의 우물, 우물가의 박꽃들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그곳은 1945년 개전 후 처음으로 일본 영토 내에서 벌어진 최초이자 최후의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오키나와 본섬 최남단 다마쿠스크 마을에는 길이 200미터의 천연동굴이 있다. 도무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컴컴한 동굴이라 휴대용 발전기를 돌리며 들어가야 했다. 좁은 입구를 지나자 넓은 공간이 있었다. 일본군 이타이연대 최후의 요새였다. 오키나와에 상륙한 연합군에 쫓겨 패퇴를 거듭하면서 이타이연대는 이 동굴로 숨어 들었다. 1000명 가까운 병사와 2000명의 주민들과 같이. 길이 200미터의 동굴에 3000명이 숨어들어 최후의 항전과 피난을 했던 장소다. 동굴 속까지 동행했던 오키나와 국제대학 이시하라 마사이에 교수는 증언했다.

"그 3천명이 이 비좁고 컴컴한 동굴 속에서 넉 달 동안이나 버텼답니다. 식량이 없어 죽을 지경이었겠죠. 병사나 주민이 죽으면 동굴 속 저쪽 낭떠러지 같은 곳으로 한사람씩 던졌답니다."

그곳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던 지옥이었다. 축축하고 컴컴하고 음습한 동굴 속에서 3000명이 함께 숨 쉬고 땀 흘리고 대소변을 같이 했다면 그 공기는 어떠했을까? 저쪽 끝에 달팽이껍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반대편은 동굴의 유일한 입구였다. 마사이에 교수가 펼쳐준 탐사지도에는 입구에 '조선인위안부'라고 적혀 있었다. 연합군이 쳐들어오거나 동굴 입구를 향해 총탄을 쏘아대면 맨 처음 죽는 사람은 '조선인위안부'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여성으로 총알을 막겠다는 계획이었다. 연합군은 동굴 밖에서 4개월을 기다리다가 총을 쏘는 대신 흙으로 입구를 막아버려 동굴 속의 3000명 모두를 질식시켰다고 한다. 

종전 후 어느 날 오키나와 홍등가에서 어느 벌거벗은 여인 하나가 큰 길을 갈팡질팡 뛰어다니며'나는 조선인이다! 나는 조선인이다!'라고 외쳐댔다 한다. 임질, 매독균이 머릿속까지 침투해서 완전히 미쳐버린 조선인 '위안부' 여성이었다. (계속) 


이동석 P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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