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지금 바로잡지 못하면 버림받는다..5년 만의 파업 앞둔 MBC

글 남지원·사진 이준헌 기자 입력 2017. 8. 19. 12:00 수정 2017. 8. 19.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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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김재철·안광한·김장겸 사장의 9년 적폐 끝장낼 각오로 ‘마지막 싸움’

“지금 바로잡지 못하면 버림받는다. 국민들에게도 용서받을 길이 없다. ‘마지막 싸움’이다.” 5년 만에 다시 총파업 투표에 들어가는 MBC 직원들의 말은 비장했다. 더 이상 공영방송 말살을 지켜볼 수 없다며 지난달 시작된 제작중단은 PD들, 기자들, 아나운서들로 이어졌다. 일손을 내려놓은 이들이 18일까지 300명 가까이에 이른다. 언론노조 MBC본부는 24일부터 엿새간 총파업 찬반 여부를 묻는 조합원 투표를 할 예정이지만 사실상 시기를 조율하는 일만 남은 상황이다. 2012년 MBC는 ‘김재철 사장 퇴진’과 ‘보도 공정성 회복’을 요구하며 170일간 파업을 벌였다. <뉴스데스크>가 15분으로 축소 편성되고 <무한도전>이 전파를 타지 못하는 사이, 사측은 대체인력을 뽑아 빈자리를 메우면서 파업 집행부 등 6명을 해고했다. 부당한 징계·전보는 5년 동안 일상이 됐다. 뉴스의 신뢰도와 영향력은 땅에 떨어졌다. 이 파행은 정권에 줄을 댄 한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영방송’이 어떻게 정권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 언론의 공정성과 비판 기능이 얼마나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공영방송을 제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은 그 안에서 핍박을 받고 쫓겨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 의식과 여론의 건강한 통로를 다시 만드는 일이다. 다시 마이크와 카메라를 놓고 거리로 나서려는 이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왜 이제서야 나서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지난 5년 MBC 구성원들은 언론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 수없는 싸움을 벌였다. 보도국 신지영 기자는 세월호 유가족을 폄훼하는 부장의 글을 카톡으로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징계를 받았고, 23년 경력의 김범도 아나운서는 방송에서 밀려나 ‘저성과자 교육’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안에서 힘겹게 싸워왔다. <PD수첩>을 지키려 애쓰던 김현기 PD와 동료들은 결국 제작거부의 불을 댕겼다. 지난해 경영진의 실토가 담긴 녹취록이 공개됐듯이 2012년 “증거도 없이” 해직된 박성제 기자는 그 모습을 밖에서 지켜보며 앞으로 달라질 MBC의 미래를 꿈꿔왔다. “이번에 해내지 못하면 버림받겠지만 제대로 싸워서 시민에게 돌아간다면 MBC가 그간 저질렀던 일들을 용서받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MBC는 이미 흔들리고 있다. 노조 소속이 아닌 경력기자들마저 제작중단에 합류할지 고민하고 있다. 김장겸 사장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5년의 겨울이 끝나고, 방송을 정상화하겠다는 이들의 꿈은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이제 MBC의 언론노동자 1700여명은 ‘이명박근혜’ 9년 동안 김재철-안광한-김장겸 사장으로 이어진 체제와 적폐를 끝장낼 각오로 마지막 싸움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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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진 사유한 뉴스, 나도 ‘공범자’였다”

>>신지영 기자는 왜 마이크를 내려놓았나

MBC 보도국 기자들이 제작중단에 돌입한 지 6일째인 16일. 보도국 편집2센터 <뉴스투데이> 편집부 소속 신지영 기자(36·사진)는 동료들과 아침 팻말 시위를 마치고 사무실로 올라왔다. 어떤 아이템을 골라 어떤 기사를 쓸지 고민하던 자리에 앉아 앞으로의 일들을 가만히 생각한다. 기자로서의 고민과 생활인으로서의 고민이 뒤섞인다. 회사는 정상화될까. 총파업에 들어가면 당장 월급이 안 나올 텐데. 어떻게 해야 정상화될까. 냉장고에 파먹을 건 좀 남아있을까. 신 기자는 2015년 말부터 <뉴스투데이>의 이슈투데이 코너를 작성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 그는 말한다. 징계 후 ‘유배지’로 쫓겨난 다른 동료들과 달리, 적어도 보도국 소속으로 기사를 쓰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신 기자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정직 1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2014년 5월 초 민간 잠수사 이광욱씨가 숨진 사건을 두고 박상후 당시 전국부장은 “조급증에 걸린 우리 사회가 그를 떠민 것”이라며 “일부 실종자 가족들이 해양수산부 장관과 해양경찰청장 등을 불러 작업이 더디다며 압박했다”고 언급한 리포트 초고를 썼다. 신 기자는 자식이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아 죽어가는 것을 바라봐야 했던 부모들에게 안정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장의 방송을 막을 힘은 없었다. 신 기자는 이 글을 동기들과의 카카오톡 대화방에 공유했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징계를 당했다. 그는 나중에 회사를 상대로 징계무효 소송을 내 승소했다.

정직기간이 끝나고 돌아온 신 기자는 다행히 보도국 밖으로는 밀려나지 않았다. 사회1부와 문화부를 거쳐 현재 부서로 왔다. 직접 취재를 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기사를 쓸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언론노조원’과 마찬가지로 정치부나 사회부 법조팀 같은, 흔히 언론사의 핵심 부서라고 여겨지는 곳에는 배치되지 않았다. 차장대우 승진은 동기들보다 1년 늦었다. 업무 때문이 아닌 것을 알기에 모욕적이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순간은 많았다. 어떤 후배는 정기인사철도 아닌데 보도국 바깥으로 전보됐다. 이유는 누구도 몰랐다. 5년 전 파업 때 앞장선 선배들과 현장에서 양심을 지키려 애쓴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마이크를 빼앗기고 보도국에서 사라졌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MBC 소속이었다면 광주에 가지 못한 채 스케이트장 관리를 하고 있었을 거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고 촛불이 한창 타오를 때 신 기자가 리포트를 쓰는 ‘이슈투데이’는 한 번도 국정농단 사건을 제대로 다룬 적이 없었다. 아이템을 제출하면 시청률이 안 나올 것 같다거나, 주시청자층과 동떨어진 주제라는 대답이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돌아왔다. 그는 때때로 자신도 ‘공범자들’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 역시 경영진이 사유(私有)한 뉴스의 들러리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MBC 기자라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시간들이었다. <PD수첩> <시사매거진 2580> 제작진이 보도 공정성과 제작 자율성 침해 사례를 줄줄이 공개하며 제작을 중단했을 때 회사가 단 하루 만에 동료들을 대기발령하는 것을 보면서 자괴감은 분노로 바뀌었다.

급기야 ‘카메라기자 블랙리스트’가 공개됐을 때 신 기자는 ‘여기서도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노예임을, 호구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지난 10일 저녁 모인 보도국 기자 81명은 만장일치로 제작중단을 결의했다. “많이 맞은 사람은 누가 손만 들어도 움찔하는데 우리가 그동안 그런 상태였다.” 2012년 파업 이후 100명 넘는 구성원들이 징계를 받거나 부당전보를 당한 MBC에서, 지난 5년간 ‘제작중단’ 같은 적극적 저항은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5년 전과 지금은 마음가짐이 다르다. “사실 5년 전에는 막연히 파업을 해야 하나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제작중단을 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어렵다.” 다른 구성원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는지, 기자총회에서 찬반 토론은 오가지 않았다. 시기와 방법만 논의했을 뿐이다.

신 기자는 “MBC를 비롯한 많은 언론사들이 제 역할을 못하는 사이에 나라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현장에서 지켜봐왔다. 이래서는 안되고, 더 이상은 안된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시청자들에게 더 이상 죄를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아이가 살아갈 나라에 제대로 된 언론을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영방송을 망가뜨린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더 이상 공영방송이 정권 색채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다시 뉴스가 시청자의 신뢰를 얻을 때까지 노력하겠다.” 노조는 24일부터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총파업 여부를 묻는 투표를 시작한다. 가결되면 MBC 구성원 1700여명은 5년 만에 다시 거리로 나선다.

▶“파업 후 마이크 뺏기고 세트장에 발령”

>>김범도 아나운서가 본 MBC 아나운서 잔혹사

지금은 스튜디오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를 잡는 일보다 취재진의 카메라 앞에서 피켓을 드는 일이 더 많지만 한때는 MBC의 얼굴이었다. 1994년 입사해 MBC 대표적 장수 프로그램인 <TV특종 놀라운 세상>을 6년간 진행했고, 월드컵과 올림픽 MC·앵커도 여러 번 했다. 김범도 MBC 아나운서(51·사진)의 얼굴이 방송에서 사라진 지 5년이다.

MBC 구성원 상당수가 2012년 파업 후 상처를 입었다. 그중 가장 상처입은 조직 중 하나로 아나운서국을 꼽는다. 파업 당시 50명이 안됐던 아나운서국에서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퇴사하거나 전보당했다. 지난 17일 아나운서들은 또 환송회를 열었다. 지난해 10월 <뉴스투데이> 앵커에서 경질된 뒤 열 달 동안 ‘벽만 보고 지내다’ 퇴사한 김소영 아나운서를 보내는 자리였다.

한 아나운서는 프로그램 섭외에서 묵살된 횟수를 50번까지 세고 그만뒀다고 했다. 또 다른 아나운서는 아나운서연합회 행사에 참여하는 것조차 제지당했다. 박혜진, 오상진, 문지애 등 MBC의 ‘스타’ ‘간판’이라 불리던 아나운서 12명이 비슷한 과정을 거치다 떠밀리듯 회사를 나갔다. 심의실과 주조정실, 사회공헌실처럼 아나운서가 필요 없는 부서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10명이나 된다. 김범도 아나운서는 아나운서국 바깥으로 쫓겨난 선후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성공시대>로 방송대상까지 받은 변창립, <우리말 나들이>를 만든 주역 강재형, MBC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선숙, 탁월한 뉴스 전달력을 갖춘 최율미, 아나운서대상 장기범상까지 받았던 김상호, 아나운서연합회장을 하다 쫓겨난 신동진, 신뢰감을 주는 앵커 박경추, 지적이고 다양한 방송을 했던 차미연, 두말할 것 없는 스타 아나운서 손정은, <신입사원>을 통해 시청자가 뽑은 오승훈. 이 기라성 같은 선후배들이 모두 아나운서국 바깥에 있다.”

반면 회사 편에 선 이들은 승승장구했다. 2012년 파업에서 빠져나간 뒤 기자로 전직한 배현진 앵커는 <뉴스데스크>의 최장수 앵커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신동호 아나운서국장은 김재철 사장 시절인 2013년부터 지금까지 재직 중이다.

김범도 아나운서는 7월3일 ‘전보발령은 무효’라는 법원 판결문을 받아들고서야 아나운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MBC 내 ‘최다 부서이동 최다 저성과자’ 기록을 가졌다. 2012년 파업이 끝나고 마이크를 빼앗겼고, 경인지사 인천총국을 거쳐 ‘신천교육대’라 불리던 신천 MBC아카데미에서 ‘브런치 만들기’ 같은 교육을 받았다. 그 뒤에는 용인의 드라마세트장으로 발령났다. 2013년 4월 가처분소송에서 이겨 잠시 아나운서국으로 복귀한 적도 있었다. 심야시간대 라디오 프로그램이 주어졌다. 당시 담당 PD가 자율성을 보장한 덕분에 그는 조심스레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역주행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2015년 아나운서협회장을 맡아 피켓시위 등에 참여한 뒤 또 다시 신사업개발센터로 전보됐다.

MBC는 파업에 참여한 이들을 업무와 무관한 부서로 보내 일을 주지 않고, 일을 하지 않았다며 인사고과 최하점인 R등급을 주는 일을 반복해왔다. 김 아나운서는 R등급을 4번 받았고, 저성과자로 분류돼 한국생산성본부 등에서 교육을 받았다. 언론인으로서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고 그는 말했다.

그사이 MBC는 계약직 아나운서 11명을 뽑아 아나운서국에 배치했다. 매시 정각의 라디오뉴스는 심지어 아나운서가 아닌 사람들이 읽는다. 아나운서들은 뉴스를 진행한 뒤 자기 이름을 대는 ‘네임사인’을 하지만 이들의 뉴스에는 네임사인이 없다.

“재계약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도록 계약직 아나운서를 뽑아 ‘말 잘 듣는 방송인’ 역할만 시키는 것, 라디오뉴스에 네임사인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쓰는 일 모두가 언론인으로서 우리의 역할을 말살하려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뉴스를 누가 읽는지도 모르게 방송하는 MBC는 언론사임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치성향이 다른 원로 선배들도 이 일에는 분노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MBC 아나운서 27명은 18일 아침부터 업무를 전면 중단했다. 김 아나운서는 “특히 앵커를 맡고 있던 동료들이 편향된 뉴스를 읽어야 하는 상황을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지난 파업 때 아나운서국에서 가장 먼저 이탈자가 나왔지만 이번에는 이탈자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도 했다. 지난 5년간 아나운서국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 다시 방송을 할 수 있게 되면 라디오뉴스를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할 것 같다고 했다. 김 아나운서는 “지난 5년은 언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방송인으로서는 보여준 것이 없지만 언론인으로서는 가장 화려한 시기가 아니었을까”라고 말했다.

▶“이번엔 제대로 싸워 과오 용서받을 것”

>>해직기자 박성제가 꿈꾸는 MBC의 미래

“이번에 제대로 뭔가 해내지 못하면 버림받겠지만, 이번에 제대로 싸워서 시민을 위한 감시견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MBC가 그간 저질렀던 일들을 용서받을 수 있다.” 17일 마주 앉은 MBC 해직기자 박성제씨(50·사진)는 “MBC 구성원들이 이번에야말로 주저하지 말고 과감하게 모든 걸 던져서 싸워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나는 잃을 것이 없는 상황이지만 내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고민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방송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만큼 바닥으로 떨어졌다. 적당히 타협한다면 정말로 버림받을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MBC 노조위원장을 지낸 박성제 기자는 2012년 6월20일 최승호 PD와 함께 해고됐다. 박성호 기자 등 파업 집행부 4명에 대한 해고도 불법이지만, 당시 노조 집행부도 아니었고 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도 아닌 박성제 기자와 최 PD를 해고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무리수라는 지적이 그때도 나왔다. 지난해 공개된 이른바 ‘백종문 녹취록’에는 백종문 현 MBC 부사장이 “최승호와 박성제는 증거 없이 해고했다”는 말을 한 사실이 담겨 있다. 박 기자는 다른 해직자 5명과 함께 회사를 상대로 징계무효 소송을 내 2심까지 승소했다.

부당해고 한 달 뒤인 2012년 7월18일 노조는 파업을 접었다. 대선을 몇 달 앞두고 박근혜 후보를 비롯해 모든 대선주자와 여야, 방송통신위원회까지 MBC 정상화를 다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업무에 복귀해 보니 오히려 어느 때보다 가혹한 탄압이 돌아왔다. 그는 “우리 힘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허황된 약속을 믿은 채 정치권만 바라본 것이 패인이었다”고 말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정치권에 맡겨둘 생각 말고, 제대로 된 사장을 뽑는 일까지 MBC 구성원들의 힘으로 쟁취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기자를 비롯한 해직자들은 대법원 판결을 통해서 복직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이참에 ‘공정방송을 위한 공영방송 언론인들의 쟁의행위는 정당하다’는 판례를 대법원에서 확정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아직도 ‘MBC 좌편향을 견제하려고 종합편성채널을 만들었다’느니 ‘이제야 MBC가 정상화됐다’느니 하는 소리를 한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MBC 사태가 다시 반복되지 말란 법이 없다. 판례를 만들어놔야 후배들이 비슷한 일을 당했을 때 해고 위험 없이 싸울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해직기자로 산 지난 5년.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이용마 전 노조 홍보국장은 암에 걸렸다. 스트레스가 영향을 줬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박 기자가 해고된 자신보다 더 안쓰러워하는 건 회사에 남아 온몸으로 고난을 겪고 있는 후배들이다. “술 한잔 하자며 연락해온 후배들로부터 또 누가 쫓겨났다, 누가 부장과 싸우다 인사고과 최하등급을 받고 밀려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새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있더라”고 했다. 공영방송 문제를 다룬 영화 <공범자들>을 보며 울먹이는 후배도 있었다.

그는 해직 후 스피커 제작업체를 만들었다. 그사이에도 시간을 쪼개 책과 칼럼을 쓰고 소셜미디어를 들여다보며 ‘기자 감각’을 유지하려 애쓴다. 기사를 쓰지 못하는 ‘언론의 경계인’으로서 바라본 미디어의 현실은 해직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세월호 참사를 거치며 시민들은 ‘기레기’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언론이 권력을 부지런히 감시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뉴스 수용자들은 이제 스스로 콘텐츠의 가치를 평가한다. 박 기자는 최근 출간한 책 <권력과 언론>에 “해직기자로 보낸 지난 5년은 우리 언론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고 썼다. 그는 “언론이, 특히 공영방송이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청와대나 정치권, 재벌, 광고주 등 어떤 권력과도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개혁을 하지 않아도 검찰은 살아남고, 재벌개혁을 안 하면 재벌은 더 잘살겠지만 언론개혁을 안 하면 언론은 생존할 수가 없다. 공영방송은 더 그렇다”고 그는 말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MBC의 신뢰는 회복될 수 있을까. 박 기자는 낙관적이다. “손석희 JTBC 사장, 정찬형 tbs 사장, 최승호 PD 같은 언론인을 길러낸 것이 MBC였다. 짓눌리고 쫓겨난 이들이 업무에 복귀한다면 뉴스의 신뢰도와 영향력도 곧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침뉴스팀장으로 일하다 해직된 그는 “기사가 가장 많은 부서의 데스크를 맡아, 후배들과 함께 가장 기초적인 기사부터 업그레이드하고 싶다”면서 “그동안 기사에 너무 굶주렸다”며 웃었다.

박 기자는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더 버텨 MBC를 재건할 생각을 하자”고 동료들에게 당부했다. “지금 싸우는 것은 결국 뉴스를 잘 만들겠다고 하는 일 아니겠나. 파업하면서 어떤 뉴스를 만들어야 하는지 토론했으면 한다. 그동안 회사를 떠나지 않고 버텨준 후배들이 고맙다.”

▶“시민에 죄송스러워 얼굴 못 들고 다녀”

>>제작 거부 불붙인 PD수첩 김현기 PD

MBC 시사제작국 김현기 PD(43·사진)는 <PD수첩>으로 ‘입봉’했다. 2005년 한학수 PD가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을 취재할 때 막내 PD로 합류했다. 당시 MBC에는 제작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풍토가 있었다. 어떤 사안을 취재하겠다고 보고했을 때 불합리한 이유로 허가가 나지 않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부장과 국장이 방향을 조언하며 외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광우병 위험성 문제 같은 보도가 그 시기에 나왔다. <PD수첩>이 ‘PD저널리즘’과 탐사보도의 대명사일 때였다.

10년 뒤인 2015년 이 프로그램에 다시 돌아와 보니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천지가 개벽한 수준이었다.” 간부들의 사전 허락 없이는 취재도 방송도 할 수 없었다. 진주의료원 폐업을 다루겠다고 했더니 “지방의 병원 하나 문 닫는 일에 누가 관심이 있겠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을 때는 “<100분 토론>에서 점검할 테니 굳이 <PD수첩>에서 다룰 필요 없다”는 답을 들었다. 당시 <100분 토론>의 제목은 ‘복면시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였다.

김현기 PD는 2016년 1월 전 직원의 20%를 희망퇴직으로 감축하려는 두산인프라코어를 취재했다. 희망퇴직 대상자와 대기발령 대상자 10여명을 단독으로 섭외한 뒤 기획안을 들고 국장실에 들어갔다. 어김없이 제작이 불허됐다. “기업이 경영이 어려우면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게 아이템이 되느냐”는 이유였다. “노동자들에게 미안하다고 연락했다. ‘<PD수첩>이 취재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측에서 젊은 노동자들을 희망퇴직 대상에서 제외하려고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취재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반향이 있었는데, 방송이 나가서 현장의 문제점을 제대로 고발했다면 훨씬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가 하고 싶었던 아이템은 이런 방식으로 불허됐다. 사건·사고가 아니면 제작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달라진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10년 전 회당 4000만원 언저리였던 제작비는 2000만원대 중반으로 내려앉았다. “PD 2명이 한 팀을 이뤄 열흘 동안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면 무조건 초과할 수밖에 없는 액수”였다. 제작비가 초과되면 PD들의 인사고과를 깎았다.

<PD수첩> 구성원들은 노조 조합원이 절반, 비조합원이 절반이다. 본부장은 ‘중립성’을 위해 일부러 그렇게 숫자를 맞췄다고 했다. 아이템 제작이 불허될 때마다 울컥했지만 ‘ 내가 문제를 일으키면 그것을 빌미로 <PD수첩>을 완전히 엎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독였다. 그럼에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순간이 많았다. 세월호 2주기 때였다. 동료 PD와 “1주기 때도 안했는데 2주기에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대화를 나누다 회사 밖으로 나갔다. 유가족이 세월호 문제를 방송해달라는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PD수첩> 팀은 지난달 21일부터 제작중단에 돌입했다. 10년 전과 완전히 달라진 프로그램에서 숱한 순간을 참았지만,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과 관련된 아이템을 가지고 조창호 시사제작국장이 ‘너희 수장 한상균을 구명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하는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는 일이 이렇게 커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우리가 시작한 싸움에는 출구전략이 없었다.” 김 PD는 “비제작부서에 전보됐다 돌아온 이영백 PD 등이 자기검열에 매몰돼 있지 않았던 것도 저항할 수 있게 해준 요인이었다”며 공을 돌렸다. <PD수첩> 팀이 당긴 불씨는 이제 곧 총파업으로 폭발할 시간을 앞두고 있다. ‘우리만 겪은 일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풍선마다 가스가 들어차 있다가 <PD수첩> 풍선이 먼저 터진 것뿐이다. 우리 때문에 다른 풍선들까지 터진 것이 아니다.”

김 PD는 제작중단 이후 대기발령 2개월을 받았다. 통상 중징계 전에 내려지는 조치다. 기자회견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언론 인터뷰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2012년부터 이어진 징계와 전보 속에서 아직 차례가 오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자신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이제야 차례가 온 것뿐이다. 그간의 부채의식이 조금 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다른 동료나 후배가 아니라 자신이라서 다행이라고도 말했다.

여전히 사무실로 출근해야 하는 프리랜서 작가들, 촬영만 마친 채 제작중단에 나서느라 결방된 아이템이 마음에 걸린다.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신장 이상이 생긴 아이를 취재했다. 아이 부모님이 <PD수첩>을 믿고 집안과 아이 모습까지 모두 촬영하도록 허락해줬는데 방송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상황이 해결되면 어떻게 해서든 그 방송부터 내보낼 생각이다. 아이 어머니에게도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드렸으니 반드시 돌아가 약속을 지키겠다”고 김 PD는 힘주어 말했다.

<글 남지원·사진 이준헌 기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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