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덕종어보' 도난 미스터리..서러운 '망국의 恨'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입력 2017. 8. 19.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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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다시 찾은 조선 왕실의 어보' 특별전에서 재제작된 모조품으로 확인된 '덕종어보'가 전시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1924년 일제 강점기 조선, '덕종어보' 등 왕실 어보 5과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어보를 보관하던 종묘에 침입해 털어간 것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18일 "단순 도난 사건이었다. 왕조가 망했는데 (종묘에 있던 어보를) 누가 지켰겠나"라며 "총독부 관할 아래 순종이 왕으로 있었지만, 실제 권력이 없었으니 (어보 관리가) 몹시 허술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보 5과를 잃어버린 뒤, 조선 왕실 관련 사무를 담당하던 기관 '이왕직'에서는 해당 어보들을 다시 제작했다. "친일파인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당시 이왕직에서 예식과장으로 재직)의 지시로 조선미술제작소라는, 총독부에서 관리하고 일본인 사장이 있던 곳에서 제작했다"는 것이 혜민 대표의 설명이다.

그로부터 90년의 시간이 흐른 2014년 12월, 문화재청은 미국 시애틀 박물관으로부터 1471년 제작된 진품 덕종어보를 환수 받았다고 발표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태조사를 벌여 덕종어보가 진품인 것을 확인했다"고 강조하는 등 온갖 치적 쌓기식 홍보가 이뤄졌다.

그런데 지난해 말, 이 어보가 1924년 만들어진 모조품인 것으로 드러났다. 환수 받을 때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것과 달리, 문화재청은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19일 개막한 '조선왕실 어보 특별전'에 은근슬쩍 '재제작품'이라고만 명시하고 선보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문화재제자리찾기 측은 즉각 반발했다. 혜문 대표는 "부처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모두의 승리를 자기 이익으로 변질시키는 문화재청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덕정어보가 1471년 만들어진 진품이라고 국민들을 속여 온 데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라고 질타했다.

이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자 문화재청은 "어보를 재제작하여 정식으로 종묘에 위안제를 지내고 봉안하였으므로 '모조품'이 아닌 왕실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어보"라며, 1924년에 제작된 덕종어보가 '짝퉁'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러한 문화재청의 해명을 두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혜문 대표는 "말도 안 된다. 나라와 백성을 잃은 1924년 당시 국왕도 인정할 수 없는데, 그 망한 나라의 왕이 지시해서 만든 어보에 진짜와 가짜가 어디 있나"라며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라고 못박았다.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심용환 소장 역시 "1924년이면 일제 강점기로 조선 왕조가 끝났을 때인데, 왕실에서 어보를 쓸 일이 뭐가 있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형식적인 행사의 도장을 찍을 일이 있었을 테지만, 기껏해 봤자 일제가 허락하는 어용 행사에서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어보였을 것"이라며 "이렇듯 1924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어보가 어떠한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는지 회의적"이라고 지적했다.

◇ "문화재 관리 능력, 한 나라의 국격 따지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

(사진=자료사진)
다수의 조선 왕실 어보가 사라진 1924년은 1, 2차 세계대전 사이 제국주의 열강들이 번영기를 누리던 때다.

심용환 소장은 "1924년이면 순종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으로 일제 식민지배 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든 때"라며 "당시 조선 왕실은 일본 황족에 편입돼 존재했지만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전했다.

이어 "무엇보다 일본의 식민지배체제가 완숙한 문화통치기간이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제국주의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던 기간이었다"며 "일본 내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해서 인권 등 민주주의가 발전해 갔지만, 조선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던 시절"이라고 지적했다.

당대 일제의 조선 문화재 약탈은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이뤄졌다. 한마디로 "무분별했다"는 것이 심 소장의 설명이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고향 도서관에는 퇴계 이황이 직접 쓴 선집이 있다. 그가 조선의 유명한 정자 전체를 뜯어다가 자기 일본 집 근처에 박아뒀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조선총독부의 수장은 물론이고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경복궁이 그 약탈의 중간기지처럼 쓰였는데, 경복궁 복원 전 원각사지석탑 등이 있던 것도 일본인들이 옮겨뒀다가 못 가져간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조선 문화재 수집 욕구는 굉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문화재 소장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선문화재가 들어오는 대표적인 창구는 일본"이라며 "일본 시장은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 높은 조선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심 소장은 "한 나라의 국격을 따지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문화재 관리 능력"이라며 말을 이었다.

"외국에 나가 있는 문화재를 환수하고 그것을 제대로 유지·보존하는 일은 너무도 기본적인 것이다. 우리가 탈레반 등을 용납하기 힘든 이유 가운데 하나도, 자기들의 경도된 이념을 명목으로 너무나 쉽게 소중한 문화재를 폭파하기 때문이지 않나. 예전에 우리나라가 영국 프랑스 등에게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할 때, 그들이 거부했던 논리가 '너희는 관리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문화재를 어떻게 유지·보존하느냐의 문제는 선진국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여겨진다."

그는 "앞서 문화재청의 조선왕조실록과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지정서 원본 분실까지 생각하면 문화재 관리 능력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문화재는 보존의 차원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누리고 느낄 때 현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일본 등 열강이 빼앗아간 문화재를 환수하는 일은 시작일 뿐이다. 시민들이 문화재를 누리고 나누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유리관 속에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을 넘어서, 문화재가 우리에게 미학적·문학적 상상력을 주는 창구로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하는 것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조선 왕실 어보의 경우 모두 360여 과로, 이 가운데 40여 과가 분실됐다"며 "지난 2009년 미국국가기록보존소에서 확인한 결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다수를 박탈해 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근거로 (문화재제자리찾기 등 시민단체의 노력이 더해져) 어보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고려대에서는 태종 이방원의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어보를 갖고 있다"며 "그것 역시 장물인 만큼 압수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부의 이중적인 잣대를 단적으로 확인하게끔 만든다"고 비판했다.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jinuk@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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