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고전학자의 브랜드 인문학] (9) '패스트패션' 해독한 럭셔리, 시간 위를 내달리다

김동훈 서양고전학자 2017. 8. 1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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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랄프로렌

영화 <컨택트>의 한 장면. 외계인의 문자를 익히면 인간은 사건을 순차적으로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어 경험하게 된다.

브랜드는 접속이다. 경계면을 활성화시킬 때 창조가 작동된다. 창조를 위해 랄프로렌은 가장 오래된 미래의 시간관으로 패스트패션에 접속한다.

랄프로렌의 창업자 랄프 리프시츠는 여덟 살에서 열네 살(1947~1953년)까지 약 6년간 뉴욕에 있는 정통 랍비 학교를 다녔다. 그의 어머니는 미국으로 건너온 동유럽 유대인으로 7대째 랍비를 키워낸 가문에 속했기 때문에 아들 중 하나가 랍비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그는 이 학교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일반 학교로 전학간다. 유대식 이름인 리프시츠도 영어로는 “입술(lips)로 똥을 누면(shit)”이라는 놀림감이 되었기 때문에 ‘로렌’으로 바꾸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옷차림에 평생을 걸기로 한 그는 열일곱 살에 의류 매장에서 교환 업무를 맡으면서 패션을 배웠고, 20대 중반에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폭이 넓은 넥타이를 만들면서 1967년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낯선 것의 출현

<콘택트>(원제 Arrival)라는 제목으로 상영된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는 낯선 우주 생명체가 등장한다. 인간은 그 위기의 순간에 두 부류로 나뉜다. 낯선 생명체를 대항해 공격하자는 공격파. 반면 위험하긴 하지만 어쨌든 의사소통을 시도하자는 접속파. 이 소설은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파헤쳐 나가 종국에는 소통에 성공한다는 줄거리다. 꼭 우주 생명체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신은 뭔가 낯선 것의 출현을 적지 않게 경험한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새로운 것들, 이를테면 4차 산업혁명의 긴장 같은 ‘미지와의 조우’를 겪는다. 당신은 그 낯선 출현에 공격적인가, 아니면 소통적인가?

패션업계의 낯선 출현 ‘패스트패션’이 등장할 때, 랄프 로렌은 접속을 시도했다. ‘패스트패션’은 생산부터 판매까지 직접 관리하면서 시장 흐름에 맞춰 신제품을 신속하게 선보이는 게 특징이다. 벌써 그 출현으로 기존 패션 브랜드들의 아성이 하나둘 무너지고 있을 때, 랄프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패스트패션’의 언어를 배운다.

■낯선 ‘패스트패션’과 접속하라

1967년 회사를 창업한 랄프 로렌은 거의 50년간 지켜왔던 리더 자리를 2015년 갑자기 스테판 라르손에게 넘겼다. 라르손은 갭(Gap)에서 가장 대중적인 캐주얼 브랜드 올드네이비의 글로벌 부문 대표로 일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미 스웨덴 제조·유통 일괄형 의류(SPA) 브랜드와 H&M의 경영진으로 15년간 일한 ‘패스트패션’ 전문가였다. ‘패스트패션’에 관심도 두지 않던 업계에서 랄프가 취한 해법은 그 전문가를 데려오는 것. 명품 브랜드가 아닌 ‘패스트패션’ 브랜드 출신을 경영자로 발탁한 것은 럭셔리 브랜드 업계에선 예상 밖의 일이었다.

랄프는 파란색 블레이저(편하게 입는 재킷 종류), 고급 넥타이, 플란넬(양털과 면을 섞어 만든 옷감) 셔츠라든가 고전적 멋이 깃든 패션을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줄곧 고수해 왔었다. 그런 그가 거의 반세기 동안 갖고 있던 고전적 시스템을 바꾸고 패스트패션에 접속을 시도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다. 마치 외계 생명체에게 접속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럭셔리 패션의 베테랑 디자이너인 랄프 로렌은 ‘패스트패션’의 언어를 스스로 해독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라르손을 스승으로 과감히 모신다. 그는 “만약 내가 그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면, 스테판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 솔직히 고백한다.

■접속을 위한 경계면을 찾아라

전혀 본 적 없는 낯선 이가 당신 앞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말을 걸어 보니 그의 말은 생경한 정도가 아니라 마치 “물을 뒤집어쓴 개가 몸을 흔들어 털가죽에서 물을 떨쳐내는 소리를 연상시킨다”.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지구인의 언어와 전혀 다른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문제 삼는다. 외계 생명체의 후두 조직은 분명 인간과 다르고, 발성 주파수대도 인간의 가청 주파수대를 넘어서는 것 같다. 도무지 음소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자, 이쯤 되면 필요한 것은 음성(말)이 아니라 문자(글)다.

이 소설에서 외계 생명체와의 접속은 글씨를 쓰는 것으로 시도된다. 문자를 서로 주고받기 위해 필요한 스크린은 석영으로 된 ‘유리판’(체경, looking glass)이었다. 이 ‘유리판’은 당신과 외계 생명체를 경계지워 낯설게 하지만 동시에 접속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유리판을 통해 낯선 두 개의 존재, 그러니까 인간과 외계 생명체가 접속하고 소통하며, 서로의 모습을 투명하게 볼 수도 있다. 거기에 글씨가 쓰이면서 의미의 변화를 추적하고, 일단 접속이 가능해지면서 유리판은 이제 더 이상 ‘경계’가 아닌 ‘소통’의 공간이 된다. 컴퓨터 용어로 치자면 ‘인터페이스(interface)’인 것. 접속이 이루어지는 유리판이 바로 인터페이스다.

■패스트패션의 인터페이스

그렇다면 ‘패스트패션’에서의 인터페이스는 무엇일까? 패스트패션이 되기 위해서는 디자이너, 공장, 창고, 매장이라는 공정이 빈틈없이 맞물려 빠르게 돌아가야 한다. 이 공정들 사이사이의 경계들이 인터페이스다. 이 경계들이 소통되고 서로를 투명하게 볼 수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면, 그게 바로 접속이다. 그 접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패션의 창조가 작동된다.

그런데 만일 이런 네 가지 공정을 무시하고 디자이너와 매장이 곧바로 연결된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랄프 로렌은 바로 이 점을 고민했다.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고 그것이 바로 판매되도록 하면 매출의 흐름은 빠르겠지만 인터페이스는 활성화될 수 없다. 인터페이스가 없는 속도 상승은 디자이너나 판매자의 일방적 생산으로 끝나고 만다. 고객의 참여가 떨어지면서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 고객의 취향과 시대정신을 반영한 패션이라 할지라도 인터페이스가 없다면 불완전한 창조일 것. 그도 그럴 것이 인터페이스가 없는 공정은 사이에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오류와 문제점을 영영 바로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랄프는 인터페이스를 브랜드에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경영자가 필요했다. 랄프의 이런 전략은 완벽한 디자인과 판매를 통해 즉각적인 매출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터페이스들의 혈관벽을 투명하게 만들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실수, 그동안 소통되지 않은 문제점 등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소통의 장을 확보한 것이다.

■경계면의 흔적

당신이 글자를 써서 낯선 생명체에게 보이자 그가 유리판에 쓴 글자는 그의 소리보다 더 기막혔다. 동심원을 그려 회전하는 선이 마치 ‘불이 갈라지는’ 형상 같다. 일렬로 나열되는 당신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록. 하지만 이 글씨를 알아야 낯선 존재와 접속할 수 있다. 그런데 <네 인생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언어학자 루이즈는 낯선 언어를 배우면서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녀는 외계 언어를 터득하고 나서부터 미래에 있을 자신의 딸과 대화하는 모습이 자주 떠오른다. 루이즈는 순차적 시간관에 익숙했던 사고가 바뀌어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의 딸에게 독백한다.

유아라는 단어는 ‘말할 줄 모르는’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 너는 세상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느끼지 않게 돼. 네가 지각하는 유일한 순간은 오로지 지금뿐이야. 너는 현재 시제 속에서만 살아. 여러 의미에서 실로 부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유아기란 라틴어 ‘infantia’로 ‘언어가 없는 시기’(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권)를 뜻한다. 유아들은 언어를 배우지 않았을 때는 오직 지금이라는 순간만을 알고 있다. 그 시기는 어떤 불만도 없기에 주인공이 가장 부러워하는 시기다. 외계 언어는 마치 유아기처럼 현재라는 순간만 있다. 하지만 인간은 언어를 배우게 되면서 순차적으로 시간을 구성한다. 그래서 과거를 아파하고 미래를 소망하지만 두려워한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 데 비해, 헵타포드(외계인)는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한다. 헵타포드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랄프 로렌의 시간관

랄프 로렌이 접속을 꿈꾸면서 사용한 언어에는 어떤 시간관이 있었을까? 그가 ‘패스트패션’의 전문가에게 회사를 맡기면서 남긴 공식 보도자료를 보자.

나의 업무는 항상 회사의 미래, 그러니까 앞으로 회사를 어떻게 이끌지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우리는 패션업계에서 거의 50년간 리더 역할을 했다. 이제 막 시작한 것이다.

랄프의 어법이 조금 특이하다. 그가 말한 ‘회사의 미래에 대한 생각’과 ‘과거 50년간의 역할’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그다음의 표현 ‘이제 막 시작했다’는 이상하다 못해 어색하기까지 하다. 50년간 리더 역할을 했다는 과거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제 막 시작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의 표현 ‘이제 막 시작한 것’에는 회사의 미래와 50년간의 과거가 동시에 녹아 들어가 있다. 그의 시간관에도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흔적이 보인다.

또한 그는 2014년 ‘위클리 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새로움(newness)이 언제나 항상 좋은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시류에 맞으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항상성 같은 것을 지녀야 한다. 10년, 20년 전에 샀던 것도 현재에 통용될 수 있는 것, 클래식하면서도 구식이 되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랄프는 “시대를 초월하는 항상성”을 명품에 심어 놓길 원했다. 이와 같은 남다른 랄프 로렌의 시간관이 럭셔리 브랜드에 상극이라 할 수 있는 ‘패스트패션’을 접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순차적 시간관을 넘어서

줄곧 랍비 가문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랍비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았던 랄프 로렌은 분명 우리와는 다른 시간관을 갖고 성장했다. 순차적 시간관과 다른 또 하나의 시간관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중세를 거쳐 근대 이후로는 키르케고르, 니체, 발터 벤야민, 베르그송, 융, 엘리아데, 들뢰즈, 보르헤스 등을 통해 나타난다. 그뿐만 아니라 각각의 종교에도 이런 시간관이 나타나는데, 특히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 문헌에 나타난다.

과거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미래만 바라보고 사는 것도 아닌 시간관. 그 시간관 속에서 당신이 지금 체험하고 있는 현재는 하나의 순간일 뿐. 그 속에서 랄프는 ‘항상성’을 보고 기업 경영에 그것을 접목시켰다.

거리는 산책자를 사라진 시간으로 이끈다. 그는 거리를 따라 어슬렁거린다. (…) 길은 산책자를 어머니에게 이끌지는 않지만, 그를 과거로 데려간다. 그 과거로 깊게 가면 갈수록 그 과거는 사적인 과거가 아니다(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또 다른 유대인이었던 발터 벤야민의 시간관에는 ‘아케이드’라는 인터페이스가 있다. 접속해야 한다. 만나야 한다. 하지만 만남의 장인 ‘인터페이스’가 구현돼야 가능하다. 접속하되 아예 한몸으로 합쳐진다면 그도 없고 나도 없어져 버릴 것. 따라서 세포벽을 두고 접속하는 원형질처럼 만남의 장을 두고 그 공간을 활성화시켰을 때 비로소 그곳은 나와 그가 모두 소통하는 작동 영역이 된다. 거기에 새로움의 창조가 있다. 당신은 낯선 것이 출현했을 때 공격하는가, 그의 소유가 되는가? 아니면 소통하는가?

브랜드는 접속이다. 경계면을 소통으로 활성화시킬 때 창조는 작동한다. 변화된 시간관으로 접속할 때 랄프로렌은 가장 오래된 미래가 된다.

영화 속 외계어를 배운 인간이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보았듯 “시대를 초월하는 항상성”을 명품에 심어놓길 갈망한 랄프로렌. 기존 브랜드들이 ‘패스트패션’의 출현으로 하나둘씩 무너져내릴 때 럭셔리 브랜드를 ‘패스트패션’ 전문가에게 맡기는 과감한 결단력. 고전 시스템을 버리고 ‘새로운 언어’와 접속한 랄프로렌은 마침내 변화된 시간관으로 ‘가장 오래된 미래’가 된다.

<김동훈 서양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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