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는 성공, 경제적으로는 적자였다"

이상기 입력 2017. 8. 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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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누드의 개척자 소원 문은희 화백의 그림 인생 ⑪] 일본체류 5개월

[오마이뉴스이상기 기자]

돈도 없는데 더 있으라고 하네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 전시회 모습과 전시되지 못한 도자기
ⓒ 이상기
6월 30일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 전시가 끝나고 문은희는 귀국하려고 했다. 전시작품 100점과 전시하지 못한 도자기를 운반하는 게 큰 문제였다. 다행히 미술관 측에서 작품을 보내주기로 했다. 그런데 무겁고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시 가지고 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려 한 트럭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도자기를 미술관에 놓고 오기로 한다.

문은희 화백은 그 도자기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도 궁금해 한다. 도자기를 되돌려 받으려고 했으면 아들이 일본에 유학할 때 그 행방을 찾아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도쿄 록본기에 있는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어 도자기를 찾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문은희 화백은 이 도자기 중에 명품이 많다면서 아쉬워한다.

 <문은희 수묵화집 누드백태>
ⓒ 문은희
문은희가 귀국을 미루고 5개월 동안 일본에 머무르게 한 것은 일본 출판계와 언론계였다. 수묵 누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와사키 미술사가 문은희와 수묵화집을 출간하기로 계약을 맺고 비자를 연장해 준다. 그들은 계약을 맺으며 30만 엔을 인세로 지불한다. 그 결과물이 10월 20일 발간된 『문은희 수묵화집 누드백태』다. 이와사키 미술사는 10월 26일 출판기념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신문과 방송사에서는 문은희에게 수시로 연락해 인터뷰를 했다. 주간 잡지 <테미스(Themis)>에서 7월 5일자에 2면에 걸쳐 문은희의 누드 군상을 실었다. 제목은 "수묵화의 에로티시즘(エロティシズム). 문은희 관능의 자태"다. 동양의 붓으로 서양의 모티브인 나부를 대담하고 관능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에서의 전시도 큰 호평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와꼬백화점 미술관장과의 대화
ⓒ 문은희
문은희는 5개월 동안 일본에 머무르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예술적으로는 성공을 거뒀지만 경제적으로는 적자였다. 그것은 화집 인세와 전시회를 하면서 팔린 작품의 판매대금으로 4개월을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예술적 성공과 경제적 실패, 그런 가운데서도 네 번이나 만난 와꼬백화점 미술관장이 수묵 누드를 프랑스에서 평가받도록 권하기도 했다. 돈도 없는데 어떻게 프랑스에 가나 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1992년에 프랑스 전시가 이루어진다.    

아사히-TV에 출연하다

 아사히-TV 프로그램 "현대 아트" 출연
ⓒ 문은희
문은희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이루어진 중요한 일이 아사히-TV 출연이다. 아사히-TV는 1957년 교육방송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문화와 예술 프로그램의 수준이 높았다. 문은희는 처음에는 TV 출연제의를 거절했다. 이와사키 미술사 화집 편집도 거의 끝나 귀국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문은희의 일본 전시회를 주관한 우사미 쇼고와 와시오 도시히코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아트 프로인데, 출연을 하지 않느냐? 그것도 당신 하나 초대했는데."라면서 출연을 재촉한다.

TV 프로그램 타이틀은 "현대 아트"고, 녹화는 10월 11일 밤에 이루어졌다. 스튜디오 전면에 34m짜리 누드 군상이 펼쳐져 있고, 후면에 누드 병풍이 걸려 있었다. 출연자는 문은희, 사회자 야부키(矢吹). 미술평론가 와시오 도시히코 세 사람이었다. 야부키가 질문하고, 문은희가 대답하며, 와시오가 평하는 방식이었다. 방송은 10월 12일 송출되었다. 방송은 전일 이루어진 녹화를 편집한 내용이었다.

 아사히-TV 방송 준비
ⓒ 문은희
방송은 크게 7가지 질문과 답변 그리고 논평으로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때 배운 일본어가 있어, 질문과 답변에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첫 번째 질문은 누드 군상에 나오는 사람 하나 그리는데, 얼마 정도 걸리나 하는 것이었다. 대답은 1-2분 걸린다. 그렇게 2시간 그린 인물이 130여 명 정도다. 두 번째 질문은 누드의 포즈와 표정을 보니 괴로움이 많이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뭔가? 대답은 나의 내면을 표현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세 번째 질문은 수묵화를 이렇게 오랫동안 그리고 있는데, 그 매력은 무엇인가? 연필로는 몸의 선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없다. 수묵을 통해서만 몸의 선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다. 피부의 느낌까지도 표현할 수 있다. 네 번째 질문은 화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예술에 관심이 있었고, 고등학생 때 유명 화가를 찾아 스케치를 배우게 되었다.

 아사히-TV 방송 콘티
ⓒ 이상기
다섯 번째 질문은 한국과 일본 전시에서 관람객의 반응은 어떻게 다른가? 한국에서의 반응보다는 일본에서의 반응이 훨씬 좋았다. 그것은 일본 쪽에서 수묵 누드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더 좋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도 수묵 누드가 다시 평가받았으면 좋겠다.

여섯 번째 질문은 아티스트로서 이제 수묵 누드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조언해 주겠는가? 수묵 누드에는 너무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평생 누드를 그려도 팔린다는 보장이 없다. 먹고 사는 게 불가능하다. 각오를 하지 않을 거면 시작도 하지 마라.

일곱 번째 질문은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분야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문은희는 지체 없이 누드 콜라주라고 답한다. 누드 콜라주는 그 동안 수묵 누드 작업을 하며 버린 그림을 찢어 붙여 새로운 장르의 누드화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누드 콜라주는 수묵 누드와 달리 시간을 갖고 생각을 하면서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중간에 쉴 수도 있고, 수정도 가능하다. 그 때문에 집중력과 체력이 조금은 떨어져도 만들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문은희는 1990년대 들어 누드 콜라주라는 또 다른 방향을 지향한다. 지금도 시간이 날 때면 누드 콜라주 작업을 한다. 90년대 들어 시작한 또 하나의 장르는 지공예(紙工藝)다. 누드를 그리며 버린 화선지를 물에 풀어 덩어리를 만든 다음 그것을 뭉쳐 입체 조각을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입체조각이 가능한 것은 그녀가 스케치를 통해 대상을 형상화하는 능력을 연마했고, 누드를 통해 인체를 연구했기 때문이다. 지공예는 충주로 아틀리에를 옮긴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1989년 이와사키 미술사에서 화집이 나오다

 <문은희 수묵화집 누드백태> 6-7면에 실린 누드 군상
ⓒ 문은희
이와사키 미술사에서 나온 화집은 수묵 누드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그래서 책 제목도 『문은희 수묵화집 누드백태』다. 10월 20일 초판 인쇄로 2,000부가 발간되었다. 전체 쪽수는 78쪽이고, 가격은 1,800엔(세 제외)이었다. 문은희 화백은 나중에 『누드백태』책을 구입하려고 했으나 매진되어 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현재 문화백도 『누드백태』증정본 1부만 가지고 있다.
이 책은 1면에 누드 병풍 앞에 한복을 입고 앉은 문은희가 나온다. 그리고 2-3면과 4-5면에 누드 병풍 두 점이 실려 있다. 6-11면에는 1987년에 작업해 1989년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에서 전시한 누드 군상 4점이 실려 있다. 12면에서 64면까지는 가로 68㎝ 길이 34m의 누드 프리즈가 실려 있다. 그러므로 34m 짜리 누드군상을 53쪽에 걸쳐 실었고, 이들을 펴면 한 장으로 연결되게 인쇄했다.
 34m 누드 군상 1
ⓒ 문은희
 34m 누드 군상 2
ⓒ 문은희
중간중간에 누드화에 대한 자평(自?自註)을 일본어로 실었다. 중요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양질의 화선지 위에 그렸다. 여자 모델 3명 남자 모델 1명을 움직이게 하고 1분에 1명 정도씩 그렸다. 유려한 선묘로 인간의 고뇌를 표현했다. 여성의 부드러운 몸매와 남성의 근육질을 대비시켰다. 그러면서도 남녀를 함께 표현해 조형적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붓을 대담하게 움직여 인물의 움직임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누드를 볼 때마다 인간도 알몸이 되면 영적인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 모델이 옷을 입으면 어찌된 일인지 초라한 모습으로 변한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몸에 옷을 걸치는 순간부터 현대인의 몸에 잡념이 생겨나는 건 아닐까?" 

다음 65쪽부터는 '문은희의 수묵 누드'라는 제목으로 와시오 도시히코의 평론이 이어진다. 71쪽까지 다섯 부분으로 나눠 논평하고 있다. 이 글에는 1931년 태어날 때부터 1989년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 전시에 이르기까지 문은희의 삶과 미술 역정이 아주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1959년 졸업작품 당인리부터 1985년 노도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1쪽에 한 점씩 싣고 있다. 그리고 72-73쪽에 그녀의 대표작 6점을 또 다시 싣고 있다.

74쪽에는 문은희 연표가 실렸다. 75쪽부터 78쪽까지는 작업과 전시 관련 사진이 실렸다. 문은희의 스승으로 남관과 운보 김기창 화백 사진이 들어가 있다. 전시회 사진으로는 개인전과 신수회전 사진이 보인다. 다섯 식구가 함께 한 가족사진도 있다. 도자기 작업 사진, 누드 작업 사진도 보인다. 누드 작업 사진은 세장이나 된다. 마지막으로 스트라이프하우스 전시 사진이 있다.   

그리고 1년간 수묵누드 이야기는 계속되다

 <문은희 수묵화집 누드백태>에 서평
ⓒ 이상기
1989년 말에 일본의 신문과 잡지에서는 문은희의 수묵화전과 수묵화집 출간을 알리는 기사들이 많이 났다. 12월 11/21자 <신미술신문> "1989년 회고"란에 문은희의 누드화가 소개되었다. 12월 15일자 <일본여성신문> "'89 아트 회고"에도 문은희의 4폭 병풍 누드가 소개되었다. 그리고 <월간 미술> 1990년 1월호 "아트 북스"란에 『문은희 수묵화집 누드백태』서평이 실렸다. <아트 마가진> 1990년 1월호 신간 소개에도 서평이 실렸다.

문은희의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 수묵 누드 전시회를 자세히 다뤘던 <삼채>는 1990년 3월호 "북 리뷰"에서 문은희의 『수묵화집 누드 백태』를 아주 정확히 소개하고 있다.

"수묵화하면 산수, 화조를 연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누드를 연상하는 사람은 없다. 유교적 관념에 지배당해온 동양에서 누드는 터부시되었고, 그 때문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누드는 수묵화의 주요 모티브가 되지 못했다. 본서는 한국의 여류화가 문은희의 본격적인 누드 크로키집이다. 말하자면 수묵화 누드의 파이오니어가 되는 것이다. 문은희의 작품에는 다이나믹한 역동성과 품격 있는 기품이 느껴지며, 종래의 수묵화에는 없던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 전체 길이 34m의 나부군상은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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