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당한 루터 집엔, 금화 넣으면 천국 간다는 면죄부함

백성호 입력 2017. 8. 18. 01:01 수정 2017. 8. 18.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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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교회가 팔던 천국행 티켓
종교개혁 촉발한 도화선으로
루터가 15년 머문 수도원 한켠엔
죄 강박증의 흔적, 고해소 계단

━ 종교개혁 500년-현장을 가다<중> 독일 아이슬레벤

아이슬레벤 시청사 앞 광장에 세워져있는 마르틴 루터의동상.
독일에는 ‘루터의 도시’가 둘 있다. 그가 나고 죽은 아이슬레벤과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비텐베르크다. 비텐베르크에는 파문당한 루터가 아내와 함께 살았던 루터 하우스가 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두꺼운 나무로 짠 아주 오래된 함(函)이 하나 있었다. 단단한 철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위쪽에는 동전을 넣는 구멍도 있었다. 종교개혁을 촉발한 도화선, 면죄부 함이었다.

당시 테첼이라는 가톨릭 수도사는 “금화가 면죄부 헌금함에 떨어지며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설파했다. 그가 도시를 돌아다니며 이런 설교를 할 때마다 면죄부 판매는 성황을 이루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중세 때는 달랐다. 사람들은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때는 인쇄술도 없었다. 책은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손으로 일일이 필사를 해야 했다. 책 한 권 필사하려면 족히 두 달은 걸렸다. 게다가 성경은 라틴어 성경뿐이었다. 성직자나 학자들만 읽을 수 있었다. 수도원의 수사들이 주로 하는 일이 라틴어 성경을 필사하는 일이었다.
가톨릭에서파문 당한 루터가 아내와 함께 살았던 비텐베르크의 루터하우스.
필사본 성경의 가격도 엄청났다. 농장을 하나 팔아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두꺼운 종이에 필사한 책이라 부피도 굉장했다. 성경 66권을 보관하려면 커다란 서가가 필요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성경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수도원도 드물었다. 라틴어도 모르고 돈도 없는 서민들은 성경을 읽을 수도, 가질 수도 없었다. 테첼 같은 수도사가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가게 된다”고 황당한 주장을 해도 당연히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여겼다. 성경의 메시지는 오직 성직자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면죄부 함 앞에 섰다. 눈을 감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기에 돈을 넣었을까. 그리고 기도했을까. 구원받게 해달라고. 천국행 티켓을 얻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까.’ 궁금했다. 중세 암흑기의 굴절되고 왜곡된 종교적 풍경이 과연 ‘2017년 한국 교회’와는 무관한 것일까. 행여 면죄부 함이 헌금함으로 이름만 바꾼 것은 아닐까. 지금도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못 본 척하며 ‘천국행 티켓’만 좇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오늘날의 면죄부’만 찾고 있는 건 아닐까.

14세기 타락한 교회 질타했던 존 위클리프
마르틴 루터가 출가했던 에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종교개혁사에서 마르틴 루터(1483~ 1546) 이전에 체코의 얀 후스(1369~1415)가 있었고, 후스 이전에 영국의 존 위클리프(1320~1384)가 있었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철학부 교수였다. 당시 유럽은 아수라장이었다. 흑사병으로 1348~50년에만 무려 2500만~3500만 명이 사망했다. 유럽 인구의 30%가 죽어갔다. 그런데도 교회는 타락한 채 권력욕과 면죄부 판매에만 열을 올렸다. 위클리프는 “그리스도는 가난하게 살았다. 이 땅의 권세를 거절했다. 그런데 교황은 그걸 갖지 못해 안달이다.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교회의 머리다.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화신이다. 자신을 하나님 위에 올리려는 죄인이다”고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뿐만 아니었다. 위클리프는 “누구나 성경을 탐구할 권리가 있다”며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들을 모아 라틴어 성경을 모두 영어로 번역했다. 결국 ‘이단’으로 몰린 위클리프는 대학에서 쫓겨났다. 위클리프는 이단 선고를 받고서 연설을 하다가 쓰러져 죽었다. 그가 죽자 콘스탄스 공의회는 무덤에서 그의 시신을 다시 파내 화형에 처했고, 재를 강물에다 뿌렸다. 당시에는 유골이 부서지면 다시 부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보름스의 광장에 세워진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의 동상.
루터하우스 안에는 당시에 썼던 벽난로와 나무 테이블 등이 놓여 있었다. 루터는 저 옆에서 불을 쬐며 위클리프와 후스의 정신을 고민했으리라. 종교개혁의 여명기. 어둠은 짙고, 또 길었다. 새벽을 미리 알고 울던 선각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많은 위클리프파와 후스파가 루터 이전에 처형을 당했다.

나는 독일의 아이슬레벤으로 갔다. 루터가 태어나고 죽은 곳이다. 예전에는 동독 땅이었다. 아이슬레벤 시 청사 앞에는 루터의 동상이 서 있었다. 통독 직전에는 그곳에 동독인들이 모여서 시위를 했다고 한다. 루터의 아버지는 광산업자였다.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루터는 폭풍우 속에서 벼락을 만났다. 사방이 칠흑같이 캄캄했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던 루터는 그때 “살아난다면 수도자가 되겠다”며 성 안나(광부들의 수호 성인)에게 약속했다. 목숨을 건진 루터는 아버지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수도자가 됐다.

루터의 벼락체험. 나는 그게 ‘두려움’이라고 본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갖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불안이다. 벼락을 통해 그걸 체험한 루터는 결국 자기 삶의 방향을 틀었다. 루터는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으로 가 머리를 깎고 수도자가 됐다. 그는 수도원에서 무려 15년을 보냈다. 루터가 살았던 수도원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루터, 벼락 만나 떨다 수도자 되기로

루터 당시에 그려진 면죄부 판매 모습을 담은 삽화. 면죄부를 팔고 있는 수도사의 머리 위로 성령을상징하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루터는 꽤 고지식한 편이었다. 원칙을 엄수하는 스타일이었다. 수도원의 겨울은 춥다. 불을 때지 않는다. 온기가 있는 공간은 부엌이 유일하다. 루터는 고행을 자처했다. 한겨울에 담요만 덮어쓴 채 3일씩 금식하기도 했다.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1분도 채 안돼 뛰어가 고해성사를 다시 하곤 했다. 그걸 수차례나 되풀이했다.

오죽하면 담당 사제가 “제발 나가서 제대로 된 죄를 짓고 다시 오라”고 했을까. 그만큼 루터는 죄에 대한 강박증이 심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고해소(告解所) 바로 앞에는 아예 ‘루터의 계단’이 있었다. 고해성사를 마친 루터가 이 계단을 다 오르기 전에 다시 뛰어가 고해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루터는 왜 그랬을까. 당시 교회가 내세우는 신은 ‘심판의 하느님(하나님)’이었다. 교회는 끊임없이 ‘죄’를 강조했다. 죄를 강조할수록 사람들은 두려움에 떤다. 그래서 구원에 매달린다. 사람들이 구원에 매달릴수록 면죄부가 많이 팔린다. 결국 교회의 힘과 영향력이 커진다.

어찌 보면 500년 전과 지금은 닮았다. 요즘도 적지 않은 목회자가 ‘죄를 강조하는 마케팅’에 몰두한다. ‘죄 짓는 인간과 심판의 하나님’이란 대립적 구도를 유달리 강조하며, 신자들 내면의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에 불을 붙이고 부채질한다. 그러니 “면죄부를 사면 구원을 받는다”는 중세 때 주장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요즘 주장은 어떤 면에서 상통한다. 만약 거기에 ‘자기 십자가’가 빠져 있다면 말이다.
루터하우스에전시돼 있는 면죄부 함. 위에는 면죄부를 산 뒤에헌금으로 금화를 집어넣던 구멍이 나 있다.
루터는 절망했다. 그는 ‘심판의 하나님’을 미워했다. 심지어 “원죄로 인해 영원히 저주받은 죄인들에게 십계명의 율법으로 다시 억압하는 하나님을 나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고백까지 했다. 훗날 루터는 로마서를 읽다가 깨달았다. 인간이 쌓아가는 의(義)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義)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짐을 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걸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라고 표현했다. 이게 루터 신학의 핵심이다.

요즘 사람들은 루터의 ‘오직 믿음’을 너무 만만하게 본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고, 십일조를 하고, 다른 종교에 눈을 돌리지 않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오직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교회만 나가면 ‘오직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도대체 ‘오직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건 ‘눈’을 빼는 일이다. 나의 눈, 에고의 눈을 빼는 일이다. 예수는 그걸 ‘자기 십자가’라고 불렀다. 그렇게 ‘눈’을 빼며 나(예수)를 따르라고 했다. 그게 ‘전적인 항복(Total surrender)’이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보여준 것도 ‘전적인 항복’이었다. 왜 그럴까. 그럴 때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의(義)’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체다카(Tzedakah)’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다. 그럼 ‘하나님의 의(義)’는 무엇일까. 신의 속성,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함이다. 그러니 ‘에고의 눈’을 갖고서 그 속성에 부합하긴 어렵다. ‘에고의 눈’이 빠질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 속성으로 녹아든다. 그게 ‘체다카’다. 이게 바로 루터의 ‘오직 믿음’에 담긴 깊디 깊은 영성이다.

해가 떨어졌다. 종교개혁 순례의 여정은 이제 ‘루터의 혁명적 삶’을 향하고 있었다.

아이슬레벤(독일)=글·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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