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당한 루터 집엔, 금화 넣으면 천국 간다는 면죄부함
종교개혁 촉발한 도화선으로
루터가 15년 머문 수도원 한켠엔
죄 강박증의 흔적, 고해소 계단
━ 종교개혁 500년-현장을 가다<중> 독일 아이슬레벤
당시 테첼이라는 가톨릭 수도사는 “금화가 면죄부 헌금함에 떨어지며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설파했다. 그가 도시를 돌아다니며 이런 설교를 할 때마다 면죄부 판매는 성황을 이루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나는 면죄부 함 앞에 섰다. 눈을 감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기에 돈을 넣었을까. 그리고 기도했을까. 구원받게 해달라고. 천국행 티켓을 얻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까.’ 궁금했다. 중세 암흑기의 굴절되고 왜곡된 종교적 풍경이 과연 ‘2017년 한국 교회’와는 무관한 것일까. 행여 면죄부 함이 헌금함으로 이름만 바꾼 것은 아닐까. 지금도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못 본 척하며 ‘천국행 티켓’만 좇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오늘날의 면죄부’만 찾고 있는 건 아닐까.
뿐만 아니었다. 위클리프는 “누구나 성경을 탐구할 권리가 있다”며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들을 모아 라틴어 성경을 모두 영어로 번역했다. 결국 ‘이단’으로 몰린 위클리프는 대학에서 쫓겨났다. 위클리프는 이단 선고를 받고서 연설을 하다가 쓰러져 죽었다. 그가 죽자 콘스탄스 공의회는 무덤에서 그의 시신을 다시 파내 화형에 처했고, 재를 강물에다 뿌렸다. 당시에는 유골이 부서지면 다시 부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독일의 아이슬레벤으로 갔다. 루터가 태어나고 죽은 곳이다. 예전에는 동독 땅이었다. 아이슬레벤 시 청사 앞에는 루터의 동상이 서 있었다. 통독 직전에는 그곳에 동독인들이 모여서 시위를 했다고 한다. 루터의 아버지는 광산업자였다.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루터는 폭풍우 속에서 벼락을 만났다. 사방이 칠흑같이 캄캄했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던 루터는 그때 “살아난다면 수도자가 되겠다”며 성 안나(광부들의 수호 성인)에게 약속했다. 목숨을 건진 루터는 아버지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수도자가 됐다.
루터의 벼락체험. 나는 그게 ‘두려움’이라고 본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갖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불안이다. 벼락을 통해 그걸 체험한 루터는 결국 자기 삶의 방향을 틀었다. 루터는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으로 가 머리를 깎고 수도자가 됐다. 그는 수도원에서 무려 15년을 보냈다. 루터가 살았던 수도원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루터, 벼락 만나 떨다 수도자 되기로
오죽하면 담당 사제가 “제발 나가서 제대로 된 죄를 짓고 다시 오라”고 했을까. 그만큼 루터는 죄에 대한 강박증이 심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고해소(告解所) 바로 앞에는 아예 ‘루터의 계단’이 있었다. 고해성사를 마친 루터가 이 계단을 다 오르기 전에 다시 뛰어가 고해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루터는 왜 그랬을까. 당시 교회가 내세우는 신은 ‘심판의 하느님(하나님)’이었다. 교회는 끊임없이 ‘죄’를 강조했다. 죄를 강조할수록 사람들은 두려움에 떤다. 그래서 구원에 매달린다. 사람들이 구원에 매달릴수록 면죄부가 많이 팔린다. 결국 교회의 힘과 영향력이 커진다.
요즘 사람들은 루터의 ‘오직 믿음’을 너무 만만하게 본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고, 십일조를 하고, 다른 종교에 눈을 돌리지 않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오직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교회만 나가면 ‘오직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도대체 ‘오직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건 ‘눈’을 빼는 일이다. 나의 눈, 에고의 눈을 빼는 일이다. 예수는 그걸 ‘자기 십자가’라고 불렀다. 그렇게 ‘눈’을 빼며 나(예수)를 따르라고 했다. 그게 ‘전적인 항복(Total surrender)’이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보여준 것도 ‘전적인 항복’이었다. 왜 그럴까. 그럴 때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의(義)’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체다카(Tzedakah)’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다. 그럼 ‘하나님의 의(義)’는 무엇일까. 신의 속성,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함이다. 그러니 ‘에고의 눈’을 갖고서 그 속성에 부합하긴 어렵다. ‘에고의 눈’이 빠질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 속성으로 녹아든다. 그게 ‘체다카’다. 이게 바로 루터의 ‘오직 믿음’에 담긴 깊디 깊은 영성이다.
해가 떨어졌다. 종교개혁 순례의 여정은 이제 ‘루터의 혁명적 삶’을 향하고 있었다.
아이슬레벤(독일)=글·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