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나쁜 사람' 진재수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묻지 못한 말
"미안했다고 말해 줬다면 어땠을까" 생각도
"박원오 보고서는 대통령에 대한 충정"
"노태강 차관 축하해주는 걸로 만족"
"정유라 덕분에 새로운 일 하게 돼"
"대통령이 어떻게 해서 '참 나쁜 사람'이라고 했는지 참 궁금했어요. 진심이 아니었다면 지금이라도 미안했다고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나쁜 사람'이라고 지목됐던 진재수(60) 전 문체부 과장은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 박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서로 공직에 있을 때에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두 사람은 모두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 증인과 피고인으로 만났다.
오전 10시 15분에 시작한 진 전 과장에 대한 증인신문은 오후 3시 30분에 끝났다. 긴 시간 동안 검찰과 변호인들의 질문에 답한 그는 자신도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법정에서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대통령하고 중앙부처 과장은 하늘과 땅이잖아요. 대통령이 볼 때 중앙부처 과장이 뭘 그렇게 나쁜 일을 했다고 '참 나쁜 사람'이라고 한 건지, 그게 난 궁금했어요."
진 전 과장은 재판이 끝난 뒤에 기자에게 그가 하지 못한 질문을 말했다.
"보고서가 문제됐을 때 검은 그림자가 나에게 다가올 것 같은, 뭔가 엄습할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죠."
그는 '나쁜 사람'으로 지목되자 조만간 공직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가 승마대회에서 준우승에 그친 후 청와대 지시로 승마협회 내부 갈등과 비리 등을 조사해 올린 문제의 보고서 때문이었다.
그는 보고서에 박원오 전 승마협회 전무에 대해 부정적으로 쓴 것에 대해 "공직자로서의 충정"이었다고 했다. 재판에서도 "왜 박 전 전무의 전과기록을 보고서에 기재했느냐"는 박 전 대통령 측 유영하 변호사의 질문에 "대통령에 대한 충정이었다"고 답했다. 그의 답변에 방청석에 앉은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실소를 터뜨렸다.
법정을 나와서도 그는 같은 얘기를 했다. "대통령에 대한 충정 아니겠습니까. (박 전 전무가) 이런 사람이라고 파악되고 있으니 이 사람 말만 믿고 일을 할 수는 없으니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쓴 겁니다."
대기발령 끝에 한국예술종합학교로 가게 되었을 때의 심경을 묻자 그는 "다행이었다"는 뜻밖의 답변을 했다.
"그때는 권력이 살아있는 시대 아닙니까.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고 세 딸 중 막내딸이 아직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이어서 가장으로서 긴장감이 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봐주는 걸 큰 다행으로 알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1984년 체육체신청에서 시작한 공직생활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마무리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무과장이 마지막 공직이었다. 조윤선 전 문화체육부 장관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노 전 국장과 진 전 과장은 본인들이 명예퇴직을 희망해 퇴직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지만 그는 "더 잘못될까봐"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아쉬움도 컸고 하지만 이왕 결단을 내린 거니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노 전 국장이 문체부 2차관으로 복귀할 무렵 그에게도 공직으로 돌아오라는 제안이 왔다고 한다. 그는 노 차관과 다른 선택을 했다. "제안은 감사했고 고민도 해봤는데 제 나이가 당장 내년이면 퇴직이더라고요." 대신 체육국 국장과 과장으로 가깝게 지내던 노 차관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축하 전화가 쏟아지는지, 전화도 못 받는 것 같아 문자를 남겼어요. 요즘도 그 분은 바쁘실테니 제가 전화하는 게 부담이 될까봐 자주 연락은 못해요." 그는 자신은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하고 있다며 시원하게 웃었다.
지난해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입학·학사비리 사건과 함께 불거진 체육특기자 특혜 논란에 대해서도 신경쓰고 있다고 했다. 한국대학스포츠총장협의회 차원에서 체육특기자들의 대학입시와 관련해 교육부에 의견을 내거나 협조 요청을 하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고 있다.
정유라씨 때문에 시작된 보고서가 문제되면서 결국 공직을 나오게 됐는데, 다시 정씨로 인해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참 아이러니하죠. 공직을 나와서도 정씨 '덕분에' 또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네요." 나쁜 사람은 하기 어려운, 원망을 삼킨 맺음말이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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