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외주제작 PD의 죽음]두 PD의 부서진 카메라 앞에서.."방송사 불공정 걷어내겠다"

고희진 기자 2017. 8. 17.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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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행동 나선 독립 PD들

지난 16일 서울 방송회관에서 열린 ‘고 박환성·김광일 PD 추모와 방송사 불공정 행위 청산 결의대회’ 현장. 독립PD 100여명이 카메라로 사망한 두 PD의 부서진 카메라를 감쌌다. 한국독립PD협회 제공

“갈 데까지 가 봅시다. 뭐가 어찌 되는지….”

지난달 14일 EBS 다큐멘터리 <다큐프라임-야수와 방주> 제작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머물다 사망한 박환성, 김광일 PD. 박 PD는 교통사고가 나기 몇 시간 전 페이스북에 이 같은 글을 남겼다. 방송사와의 분쟁에서 끝까지 싸워보겠다는 다짐을 담은 이 말이 그가 세상에 던진 마지막 메시지가 됐다. 메시지는 묻히지 않고 세상에 퍼졌다. 그들이 떠난 지 한 달여, 동료 독립PD(외주제작사 PD)들은 방송사의 외주제작사에 대한 불공정 행위를 청산하기 위해 단체 행동에 나섰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방송회관에서 한국독립PD협회 ‘방송사 불공정 행위 청산과 제도 개혁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방불특위)’ 주최로 ‘고 박환성·김광일 PD 추모와 방송사 불공정 행위 청산 결의대회’가 열렸다. 현장에는 100명이 넘는 독립PD들이 모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카메라로 사망한 두 PD의 부서진 카메라를 감쌌다. 이날 행사엔 박 PD의 동생 박경준씨, 추혜선 정의당 의원, 김경진 국민의당 의원 등이 참석했다.

■ “누구나 박환성·김광일이 될 수 있다”

독립PD협회는 두 PD의 죽음 이후 조직적인 대응을 준비해왔다. 방불특위는 우선 그동안 음지에서만 얘기됐던 독립PD들의 제작실태를 조사했다. 23년째 독립PD로 활동 중인 ㄱ씨는 이날 결의대회에서 자신이 한국방송공사(KBS)에서 당했던 불공정거래 사례를 밝혔다. 그는 현재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을 제작 중으로 해당 방송사와 2건의 작품 계약을 마친 상태다. 작품 제작과 관련해 국고지원금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받아온 지원금은 KBS에 먼저 갔다. KBS는 송출료 명목으로 지원금에서 작품별로 각각 40%, 25%를 떼고 나머지 금액을 그에게 제작비로 보내줬다.

2015년 MBN 소속 PD의 독립PD 폭행사건에 대해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는 박환성 PD의 생전 모습. 최영기 방불특위 위원장 페이스북 캡쳐

ㄱ씨는 “내게 주어지는 제작비는 KBS가 일방적으로 책정한다”면서 “내가 따온 사업인데 KBS와 협상도 못하고 알아서 주는 대로 받는 구조”라며 “문제는 비율조차 정해진 것이 없어 KBS가 (송출료로) 25%를 가져갈 수도 있고, 30%, 40%를 떼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번엔 제작비가 많이 드니 돈을 좀 더 달라고 방송사에 구걸하는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ㄱ씨가 결의대회에 참여했다는 것을 방송사에서 알게 된다면 계약과 관련한 불이익이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앞선 두 PD의 죽음이 진실을 말하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제가 여기 나온 걸 KBS에서 알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가족들도 조용히 살라고 말하더군요. 사실 박환성 PD의 죽음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박 PD를 죽기 전에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EBS를 상대로 시위를 하면 도와주겠느냐는 말에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관행은 바꿔야 합니다.”

■ 법률 개정, 제도 개선이 최우선

앞선 박환성·김광일 PD의 죽음과 사례자로 나선 ㄱ씨의 상황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독립PD들이 실제로 겪고 있다. 결국 독립PD들은 법률 개정과 제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같은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라고 봤다.

방불특위는 지속적인 단체 행동에 나설 것임을 밝혔다. 우선 두 PD의 죽음과 관련해 EBS에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할 계획이다. 업계에 만연한 불공정행위를 뿌리 뽑기 위해 취합한 사례를 공정거래위원회에 넘기고 조사를 요구할 방침이다. 또한 앞으로 있을 국정감사에서 전 방송사를 대상으로 한 심층 감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다방면의 압박을 가할 계획이다.

언론 유관단체·시민사회와 함께 논의해서 방송 외주정책 제도 개선을 위한 대안을 발의하고, 새로운 외주정책 수립·국회의원 공동발의를 통한 특별법 제정 등을 단계별로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특위는 목표 달성을 위해 단계별로 짧게는 2개월, 길게는 8개월의 예상 시간을 뒀다. 짧은 시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모두가 공감한 까닭이다. 특위는 이어진 공동선언에서 “두 PD의 죽음은 사고사가 아닌 ‘사회적 타살’이다. 정상화가 없다면 또 다른 죽음이 이어질 것”이라며,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의 조속한 간담회도 요청했다.

각계의 관심이 높아지며 17일엔 한국방송학회 주최로 ‘방송생태계 독립제작환경 진단을 위한 토론회’도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최선영 이화여대 특임교수는 “외주제작 제도 개선에 선행돼야 할 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진단조차 논의가 잘되지 않고 있다”며 “계약 및 거래 관행·저작권 등 수익 배부·제작비 산정 및 지급·근로시간과 근로환경·‘갑을’의 인권 문제 등 5가지 분야로 나눠 문제점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PD협회는 오는 23일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과의 면담도 앞두고 있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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