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안알리고, 대피 안시키고.. 휴지된 지하철 매뉴얼

장형태 기자 2017. 8. 17.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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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열고 종점까지 13분 달린 서울 8호선, 안내방송은 없었다]
수리직원 타자 바로 출발시켜.. 달리는 중에 고치려고 하기도
"비가 와 바닥 미끄러웠는데 넘어졌으면 큰 사고 났을 것"
서울교통公 "승객에게 사과"

지난 15일 오후 1시 13분 지하철 8호선 복정역에 8111호 열차가 도착했다. 그런데 첫 번째 전동차의 넷째 문이 닫히지 않았다. 기관사는 계기판으로 이를 확인한 뒤 오후 1시 14분 서울 용답동에 있는 종합관제실에 고장 사실을 신고했다. 여기까지는 안전 매뉴얼을 지켰다.

복정역 지하 1층 역무실에 상주하는 기동수리반 직원 두 명 중 한 명이 오후 1시 15분쯤 관제실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드라이버 등 간단한 공구만 챙겨 오후 1시 17분쯤 지하 2층 승강장에 멈춰 있던 열차에 올랐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직원이 탑승한 직후 기관사가 열차를 출발시킨 것이다. 서울교통공사 지하철 운영 규칙에 따르면 열차가 고장 났을 경우 기관사가 종합관제실에 통보한 뒤 승객에게 '열차에 고장이 발생했으니 모두 내려서 다음 열차를 이용하라'고 안내 방송을 해야 한다. 이후 기관사는 승객이 모두 내린 것을 확인한 다음 열차를 차량 기지로 몰고 가야 한다. 하지만 올해로 21년 차인 열차 기관사는 안내 방송도, 열차 회송(回送)도 하지 않았다.

8111호 열차는 문이 열린 상태에서 평균 시속 33㎞로 복정역에서 종점인 모란역까지 6개 역을 13분 동안 달렸다. 열차 출발 당시 문이 고장 난 첫째 칸엔 승객 10여 명이 타고 있었다. 허장범(21)씨는 "비가 와서 바닥이 미끄러웠는데, 문 근처 사람이 넘어지기라도 했으면 큰 사고가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직원은 열차가 달리는 도중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장 난 문 옆에 있는 수동 개폐(開閉) 레버를 돌리거나, 문 위쪽에 설치된 모터와 벨트 부분을 만졌지만 고장을 고치지는 못했다. 덜컹거리는 열차에서 수리를 시도하던 그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자칫하면 작년 5월 구의역에서 외주업체 직원이 고장 난 스크린도어를 고치려고 승강장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달려오는 열차에 치여 숨진 것과 비슷한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복정역에서 세 정거장을 지난 단대오거리역에서 역무원 한 명이 더 전동차에 올랐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승객들은 아무런 안내를 받지 못했다. 열차는 오후 1시 31분 종점인 모란역에 도착했고, 승객이 모두 하차한 다음 차량 기지로 돌아갔다.

서울교통공사 측은 기관사가 출입문을 열고 달린 것에 대해 "명백한 안전 매뉴얼 위반이었다. 해당 열차에 타고 있었던 승객에게 사과드린다"고 했다. 공사는 8111호 기관사를 16일 업무에서 배제했으며, 사고 경위를 파악한 후 징계 등 필요한 조치를 할 계획이다. 서울시도 조사 결과를 보고 감사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번처럼 열차가 문이 열린 상태에서 10분 이상 운행한 경우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2011년 지하철 1호선 인천행 열차가 출입문 한 개를 연 채로 종로3가부터 종각역까지 한 정거장을 달린 적이 있었다. 승객 중 누군가가 객차 문을 수동으로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땐 종각역에서 역무원이 타 출입문을 점검해 곧바로 정상 운행이 됐다.

지하철 2~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와 5~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도시철도공사는 1994년부터 분리 운영되다 지난 5월 23년 만에 통합돼 서울교통공사로 새롭게 출범했다. 공사는 '지하철 운행이 지연되더라도 안전을 최우선순위에 두겠다'고 선언했다. 안전관리본부를 신설하는 등 393명을 안전 관련 업무에 투입했고,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인력 175명도 새로 충원했다.

하지만 통합 이후에도 '지하철 안전 지수'는 제자리걸음이다. 지난 12일엔 지하철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정차하려던 전동차의 문 주변에서 불꽃과 굉음이 일더니 갑자기 멈춰서는 사고가 있었다. '열차 운행이 중단됐으니 내려 달라'는 방송은 있었으나 이미 승객 200여 명이 직접 비상 개폐 장치를 돌려 열차를 빠져나온 뒤에야 문이 열렸다. 사고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서울메트로 출신인 한 퇴직 기관사는 "기관사는 관제실 지시에 절대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다. 이번엔 관제실에서 지시를 하지 않았거나 기관사가 당황해서 관제실의 지시를 놓쳤을 가능성이 크다"며 "위급 상황일수록 자체 판단보다는 매뉴얼에 따른 대응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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