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자본이 파업 하는 날

서경호 2017. 8. 17.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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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커지고 '알아서 잘해야'하는 대기업 수난시대
J노믹스의 네 바퀴 성장전략은 더 둥글게 다듬어야
서경호논설위원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당시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 ‘자본 파업’을 연상하게 하는 발언으로 입길에 오른 적이 있다. 그는 “(노동 관련 법안이) 노동계 편향으로 가면 기업도 스트라이크(파업)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기업인의 파업은) 길거리에서 하는 게 아니라 조용하게 사업을 접고 외국으로 떠나는 것”이라며 “기업인의 ‘말 없는’ 파업 때문에 기업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있고, 그래서 실업자가 많은 것”이라는 말도 했다. 비정규직법 등 기업 부담을 늘리는 법안을 잇따라 발의하던 당시 정치권을 향해 재계의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그의 발언은 찬반 논란을 불렀다. ‘오죽하면 그랬겠느냐’는 동정론과 함께 기업이 국민을 팽개치고 외국으로 나가겠다는 것은 국민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행동이라는 노동계의 비판이 뒤섞였다.

그 후 11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최저임금에 법인세 인상까지 기업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난주 국내 5개 완성차 모임인 한국자동차산업협회는 ‘생산시설 해외 이전’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통상임금 판결이 불리하게 나올 경우 인건비 부담이 낮은 해외로 생산 거점을 옮기는 방안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섬유업체인 경방과 전방이 국내 공장 폐쇄나 공장 해외 이전을 추진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법과 제도를 통한 부담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협력회사와의 상생 협력,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자발적으로’ 실천해 달라는 압력도 쏟아진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재벌을 향해 ‘알아서 잘하라’는 신호를 계속 내보내고 있다. ‘알아서 하라’는 말이 원래 더 무서운 법이다.

자본의 파업은 빨간 머리띠를 두르거나 마이크 잡고 요란하게 구호를 외치는 식이 아니다. 자동차협회의 성명 발표나 국내 생산을 접겠다는 섬유회사 경영자의 눈물겨운 인터뷰는 그나마 솔직한 편에 속한다. 글로벌 경영을 하는 기업들은 인건비와 시장 근접성, 기업 규제 등을 고려해 국내외 최적의 장소에서 생산하고 판매한다. 경총 회장의 말처럼 ‘조용하고 티 나지 않게’ 국내외 생산 비중을 조절하면서 이익을 나누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삼성·현대차 등 글로벌 대기업의 해외 생산과 매출 비중이 커지는 추세를 보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런 조용한 파업이 더 무섭다. 그나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은 ‘자본에는 국적이 없지만 기업가에겐 국적이 있다’는 정서다. 국내 기업은 가능한 한 세금과 인건비 부담을 감내하며 협력회사와의 생태계 조성에 나설 것이다. 이 땅에서의 평판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에 진출했거나 진출하고 싶어 하는 외국 자본은 냉정하게 주판알을 튕길 것이다.

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은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시종일관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소득 주도 성장의 실험성이나 포퓰리즘적 요소를 지적하는 비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히려 지금 필요한 건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는 ‘용기(勇氣)’라고 했다. 살짝 걱정이 된다. 용기가 지나치면 만용인 것이고, 앞뒤를 재지 않는 용기는 무모한 것이다. 그의 말처럼,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엔 좌우나 보수·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J노믹스는 대기업이 아닌 국민성장론을 축으로 ▶소득 주도 성장 ▶일자리 중심 성장 ▶동반성장 ▶혁신성장이라는 ‘네 바퀴 성장 전략’을 내걸었다. 그중 하나로, 우리 경제의 공급 능력을 키울 혁신성장 전략이 다음달 발표될 모양이다. J노믹스가 잘 굴러가려면 네 바퀴가 모두 둥글고 크기도 같아야 한다. 혁신 전략도 소득 주도 성장만큼 비중 있게 다뤄야 한다. 나아가 네 바퀴에 돌출된 부분은 없는지, 아예 네모난 바퀴는 아닌지도 잘 살펴야 한다. 울퉁불퉁한 바퀴를 둥글게 다듬고 자본의 ‘소리 없는 파업’을 최소화하는 데는 관료의 경험과 전문성이 요긴할 것이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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