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추억 4편] 영원한 4할 타자 백인천

조회수 2017. 8. 16.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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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떻게 선수가 감독까지 해?"


2013년, 뇌 과학자인 카이스트 대 정재승 교수가 SNS 상으로 유저들에게 하나의 프로젝트를 제안합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백인천 프로젝트’ 주제는 “왜 백인천 이후 한국 야구에선 4할 타자가 사라졌는가” 였습니다.

4할 1푼 2리, 한국 야구 4할 타자의 상징, 백인천. 영원히 닿을 듯 닿을 듯하면서도 닿을 수 없는 목표선으로만 남아있을 기록 4할. 그 신화적인 기록이 작성된 것은 1982년이었고, 그때 백인천 선수는 나이 마흔의 ‘감독 겸 선수’였습니다.

야구의 추억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이번에는 영원한 4할 타자, 백인천 선수를 만나 보겠습니다.

 “도대체 프로야구란 게 뭐야” 1982년 벽두 초부터 아이들은 궁금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고교야구가 대세였던 시절. 야구란 무엇인지 알겠는데, 새삼 새로이 개막된다고 유난을 떠는 ‘프로’ 야구란 과연 무엇일까? 동네 아이들은 밤늦도록 얼굴을 맞대고 토론을 하였지요. 토론에서는 이런 상상까지 무용담처럼 펼쳐졌습니다.

프로야구란, 등장하는 타자들의 절반 이상이 유격수 땅볼만 치고 물러나는 고교야구와는 달리 만화 속에만 등장하던 온갖 신기한 마구들과 전설의 특수타법들이 충돌하며 때로는 가루가 되어버린 공이 관중석 위로 흩날리고, 때로는 공이 일으킨 불길이 그라운드를 춤추게 만들 것이란 엉뚱한 상상, 말입니다.

그렇게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프로야구’가 실체가 드러난 1982년의 프로야구 개막 경기. 당시 MBC 청룡의 홈구장에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인물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느 때는 타석에 서서 방망이를 휘두르다가도 또 어느 상황에서는 덕아웃에 들어와 주자와 다음 타자에게 작전을 지시하느라 바빴던 앞머리 훤히 벗겨진 아저씨. 이처럼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은 참 당혹스런 그림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외모에 안방과 부엌을 오가며 곁눈으로 경기를 보던 어머니들이, 마침 그 날 시구를 했던 전두환과 혼동하여 “저 양반은 시구나 했으면 얼른 청와대로 갈 것이지 뭘 경기까지 끼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느냐” 라고 의아해했던 가정들의 사연도 꽤 많이 들려올 정도입니다. TV에서는 일본에서 타격왕까지 지낸 ‘타격의 달인’이라 설명하지만, 우리들 눈에 백인천의 타격자세는 그리 멋있는 편이 못되었습니다. 어떤 공이든 걸리기만 해보라는 듯 으르렁거리며 날카롭게 날을 세웠던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자면, 배트와 평행에 가까울 정도로 좁게 모아 쥔 두 팔은 어울리지 않게 다소곳했고, 스윙은 두 번 연속해서 휘두르더라도 못할 것 없을 만큼 잔잔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백인천이란 타자가 매우 섬세하고 꼼꼼하였기에 그런 폼으로 타격을 연마했다는 사실을요.  이런 장면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경기 시작 전, 감독 백인천은 ‘주심’을 이끌고 경기장 이 구석 저 구석을 돌며 무언가 확인하고 합의하곤 했습니다.

그는 연신 타구가 그 철망을 뚫고 넘어가거나, 혹은 철망에 끼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같은 질문을 던졌고 이에 심판은 짜증스러운 듯 답하곤 했습니다. 아직 프로야구가 확립되기 전, 심판조차 프로라 부르기에 조금은 민망하던 시절, 백인천은 어떻게든 상황과 규정을 확인받아야한다는 철저함으로 무장한 감독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백인천은 유명한 만능 스포츠맨이었습니다. 경동고 시절 야구선수로 뛰는 와중에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로도 활동했고, 1961년 500m 고등부 대회를 싹쓸이한 경력이 있을 정도였지요. 그럼에도 야구 재능은 더 뛰어났다고 합니다. 당시 그가 뛰던 1960년 한해 경동고의 성적은 무려 32승 2무로 그야말로 초고교급 야구 팀이었는데, 그는 이 팀의 가장 중요한 핵심 선수였습니다.

경동고 졸업 후 농협 야구단에서 활약했던 백인천에게 일본 프로야구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옵니다. 당시는 반일감정이 극심하던 시절이었지만, 야구신동에게는 예외적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젊고 훌륭한 선수가 해외로 나가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났고, 한 신문 여론조사에서는 80%의 국민이 그의 일본 진출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그럼에도 1962년 2월, 아직 국교도 회복되지 않았던 적국 일본으로 날아갔던 그는 요즘 같은 ‘야구 외교관’이 아닌 ‘야구라는 업종에 취업한 이주노동자’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인들은 그를 몇 해 전까지의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로 멸시했고, 아직 자본주의를 핏줄 속으로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던 일부 한국인들은 ‘돈에 팔려 적국에 엎드린 매국노’ 보듯 바라보기도 했으니까요.

오로지 야구를 하기 위해, 그리고 기울어가는 집안에 생활비를 송금하기 위해,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백인천은 그런 척박함 속에서 치고 달렸습니다. 2년간의 2군 생활을 마치고 1군 주전으로 올라선 1964년부터 그는 18년 동안 세 차례 3할을 치며 통산 .278의 타율에 209개의 홈런과 212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한 번의 타격왕과 두 번의 최다 2루타, 다시 한 번의 최다 3루타 기록을 만들어 냈습니다.

재일교포 장훈을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그로부터 그어진 한 획을 이어받아 다시 40년 후에 나타날 이승엽이라는 후배에게로 전할 하나의 점을 일본 야구사에 확실히 찍어놓은 것이지요.

그런 백인천에게 왜 이방인으로서의 힘든 사연이 없었겠습니까. 한국인 선수인지라 일본인 투수에게 종종 빈볼성 공을 맞기도 하고 심판 판정에 있어 불리한 점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승부 앞에선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선수였습니다. 자신에게 빈볼을 던진 투수는 세이프티 번트를 시도하면서 1루에 커버 플레이를 들어오는 그 투수의 발을 스파이크 날로 밟아버릴 정도로 보복을 한 적도 있으니까요.

대표적인 사건은 1970년 5월 23일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시합 때였습니다. 주심이었던 전직 권투선수 출신 심판이 존에서 한참 벗어난 투구를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며 삼진을 선고하자 이에 발끈하여 그가 심판의 얼굴을 주먹으로 폭행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백인천은 심판에게 폭행죄로 고소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포수 출신에 한국 시절 고교생으로서는 사상 첫 홈런을 기록한 거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빠른 발과 예민한 주루 센스를 가진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1982년, 나이 마흔에 참가한 한국 프로야구 원년 리그에서 그가 만들어낸 기록 중에서 4할 대의 타율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11개나 되는 도루였습니다.

시즌 80경기가 치러지던 시절, 몰수게임으로 인한 5게임 출장 정지 등의 우여곡절로 간신히 72경기에 출장해 기록한 마흔 살 선수의 두 자릿수 도루. “채 자리 잡지 못한 무대에서나 호령하며 희극적인 기록을 만들어낸 일본야구의 퇴물” 혹은 “무작정 자기 스타일대로 윽박지르고 우겨 넣었던 고집불통” 사실 당시의 우리들은 백인천 선수에 대해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무뚝뚝한 말투와 투박한 외모 덕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입관과 달리 그는 무려 20년간이나 거친 무대에서 깎이고 다듬어진 차돌멩이 같은 사람이었고, 그 시절 우리의 눈썰미로 채 감상할 수 없었던 우아함과 세련미를 가진 기술자였지요.

그는 팔 근육에서 쓸데없는 힘을 빼고 유연한 대응력과 더 큰 회전력을 얻기 위해 배트를 쥔 팔꿈치를 안으로 모았고, 끝까지 공에서 떼지 않은 눈은 배트를 휘두른 뒤에도 몸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상대 배터리가 방심하는 순간이면 언제라도 2루를 훔칠 수 있는 감각이 살아있었고, 그런 감각과 체력을 유지할 만큼의 훈련량과 자세가 배어있었습니다. 당시의 심판들 역시 일 년 내내 그것으로만 밥을 벌 수 없었던 시절, ‘규칙’ 역시 정착되지 않았음을 알고 경기 시작 전마다 미심쩍은 것들을 확인하고 다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역시 백인천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을 것입니다.

경기 시작 전 주심과 함께 경기장을 순례하던 그의 모습은, 어찌 보면 한국 프로야구가 설계되던 시절의 아주 중요한 한 장면일지도 모릅니다. 첫 경기에서 겸손하게 5번으로 출발했던 첫 해, 그는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적으로 파란을 일으켰고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기록한 .412의 타율과 .502의 출루율 .740의 장타율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록을 냈으며, 55개의 득점, 23개의 2루타 역시 그 시즌 최다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19개의 홈런과 64개의 타점으로 2위에 올랐고, 상대 배터리를 시각적으로 교란하며 11개의 도루를 성공시켰습니다. 그는 압도적인 선수였고, 놀라운 선수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시절, 그저 한 몸을 불태운 박철순과 이선희의 방식으로 우리를 감동시킨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차가운 엘리트였고 괴팍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기억의 한 켠으로 몰려난 채 폄하되고 망각되어 버린 비운의 영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시대의 설계자와 개척자는, 당대가 아닌 후대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법입니다 그 시절, 그 누구도 ‘프로’라는 것을 알지 못하던 한국 야구에서 그는 유일한 ‘프로’였습니다. 기술과 훈련과 냉정한 자기관리 정당함과 당당함으로 승부하는 스포츠 그에게서 우리는 비로소 ‘프로’ 야구란 걸 알게 됐으니까요.

혹시 우리가 너무 뒤늦게 그를 떠올리는 건, 아닐까요? 당당하던 시절을 한참 지나 병상에 누워서야 한 조각 사랑을 받고 사라졌던 수많은 이 땅의 아버지들처럼, 이제 길고 길었던 영욕의 세월마저 모두 흘려보낸 지금에야 떠올려지고 고개 끄덕여지는 이름. 그래서 우리 프로야구가 정말 한참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름. 백인천.

야구의 추억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이번 편의 주인공은, 영원한 4할 타자 백인천이었습니다.


원작 | 김은식 <야구의 추억>

다음주 수요일에는 '불사조' 박철순 선수가 주인공 입니다.
야구의 추억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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