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를 가르치는 것은 역사가 할 일이 아니다

이문영 2017. 8. 1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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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맥밀런의 <역사 사용설명서 - 인간은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고 악용하는가> 표지. 본문에 나온 맥밀런의 말은 이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물밑 한국사-60] 유사역사학에 빠져드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열등감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한국사가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사가 주변 국가에 깡패 노릇을 해본 적이 없고 침략만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침략으로 자랑스러운 고구려가 멸망했고, 일본의 침략으로 한심한 조선도 멸망했다. 자랑스러운 고구려라고 해도 교과서로 보면 그저 만주 구석에서 뚝딱거렸을 뿐 여진족이나 몽골족처럼 중국 땅을 다 먹어치우고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원나라나 청나라 같은 멋진 일을 해내지 못한 것이 창피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자랑스러운 역사를 은폐해왔기 때문이라면? 사실은 한민족이 전 세계를 호령하고 세계 4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더 훌륭한 문명을 보유했던 멋진 민족이었다면? 상식적인 질문이 던져진다. 그런 멋진 역사를 왜 역사학자들은 말하지 않는가? 상식적인 대답은 물론 그런 일이 없었으며, 있을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사역사가들은 더 멋진 음모론을 준비해놓았다. 역사학자들이 그 사실을 은폐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다음에 식민사학이라는 프레임을 짜서 한민족은 열등하다는 공식을 세워놓았는데, 그 후 역사학자들은 모두 이 공식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왜?

따라가지 않으면 교수 자리를 못 가지고, 교수 자리를 못 가지면 권력도 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역사학과 출신은 너무나 많다. 모두 교수가 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모두 자기가 배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은 이런 말을 믿는다. 왜?

그 말을 믿어야만 자랑스러운 고대사가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 두 장벽은 넘어설 수 없는 벽과 같다. 판타지를 믿으려면 현실세계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사람 셋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그게 사실이 된다는 이야기다. 나타나지도 않은 호랑이가 있다고 믿게 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유사역사가들은 대중에게 역사학계는 식민사학을 따르고 있다고 속삭여왔다. 그 결과 대중은 역사학계를 불신하는 심리를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임나일본부를 비판해온 학자가 '일본서기'를 인용했으니 친일사학을 한다고 말하는 선동에는 박수를 치지만, 정작 호남이 왜의 본거지였다는 주장도 자기들이 믿는 사람이 하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버드대의 한국사 연구교수가 사기를 쳤다는 말은 잘도 믿으면서 그에게 케임브리지에서 한국사 편찬을 맡긴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보지 않는다. 역사학계는 다 친일파라는 선동에는 홀딱 넘어가지만, 정작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의 역사가들 이야기에는 귀를 막고 '안 들려' '안 보여'로 일관한다. 사료 비판의 기초도 없어서 본문과 주석을 구분할 줄 모르고 후대에 단 주석도 본문과 같은 가치가 있다는 엉터리 이야기도 흔히 한다. 그러면 이병도가 단 '삼국사기'의 주석도 '삼국사기'랑 같이 취급해야 하는가?

유사역사학에 빠진 사람들은 역사학이 민족에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랑할 것이 없다면 그런 역사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러 있다. 무엇이 자랑거리인지에 대한 생각도 지극히 천박하다. 넓은 영토,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 박정희 대통령 통치 기간에 주입된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의 각인이 너무나 깊은 탓이다. 자신들이 특수한 민족이라고 자랑한 집단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는 점을 상기하자. 마거릿 맥밀런 옥스퍼드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옥스포드 대학의 마거릿 맥밀런 역사학 교수/출처=위키피디아 퍼블릭 도메인
"나는 민족주의 집단들이 불만이나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역사를 사용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과거의 한쪽밖에 보여주지 않는 왜곡된 역사죠."

유사역사가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자, 매국 집단이라고 비방해왔다. 그들은 일본과 중국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켜 돈을 번다. 식민사학과 동북공정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들이 불러일으키는 증오의 시간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대중이 있는 한.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벌써 72주년이 된다. 대한민국은 세계 선진국 대열에 올라 있다. 이런 나라를 대체 어디다 팔아먹는다는 말인가? 아직도 독립운동의 시기란 말인가?

유사역사가 추종자들은 흔히 "일본과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드는데 우리는 있는 역사도 챙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있는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세계 학계에서 하나도 인정해주지 않는 국수주의에 물든 유사역사학이다. 그러면 이들은 외국 학자 이름을 주워섬긴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학자가 아니거나 그들의 책을 잘못 전해 듣고 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푸쓰녠처럼 동북공정의 전초를 만든 학자의 이론을 가져와 단장취의(斷章取義)하는 파렴치한 짓들을 되풀이한다.

유사역사학에 맞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견 교환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유사역사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지구가 네모났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그냥 틀린 것일 뿐, 어떤 의견이 아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서는 그렇게 믿었던 의견이기는 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두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그 주장을 존중하고 하나의 의견으로 취급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유사역사학의 주장이 바로 이와 같다.

물론 대중은 자신들이 증오할 대상을 선정하고 위대한 조상들에 대해 말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내버려둘 것인가? 맥밀런의 말을 보자.

"전문 역사가들은 자기 영역을 그렇게 쉽게 넘겨줘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역사의 모든 풍부함과 복잡성 안에서 과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저기 바깥의 대중 영역에 있는 편향되고 틀리기까지 한 역사서에 맞서 싸워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의 지도자와 여론 형성가들이 역사를 악용해 거짓 주장을 강화하거나 어리석은 불량 정책을 정당화하는 것을 용납하게 된다."

맥밀런은 이렇게 조언한다.

"우리는 역사의 이름으로 내세우는 거창한 주장이나 진실을 단정적으로 내뱉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요컨대 내가 들려주고 싶은 조언은 이것이다. 역사를 사용하고 즐기되, 언제나 신중하게 다루어라."

역사는 증오를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우리 조상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걸 알기 위해 배우는 것도 아니다. 우리들의 삶이 풍부해질 수 있도록 다른 인간들의 삶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역사의 본질이다.

- 지금까지 '물밑 한국사'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시리즈 끝>

[이문영 역사작가]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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