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를 금지하라](13)'그런 옷 안돼'는 사라졌지만 '그런 옷 저급해'는 여전

김성환 |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교수 2017. 8. 13.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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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패션의 정치

옷은 신체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었기에 한 사람의 존재와 타인과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다. 시대와 사회 흐름 속에서 옷이 가진 의미의 네트워크를 패션이라 할 때, 패션은 문화적 함의는 물론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표출한다. 성과 인종, 계급의 차이가 나타나고 억압과 강요의 메커니즘이 켜켜이 쌓이기도 한다. 패션이 가진 정치성이다. 2003년 4월 유시민 당시 개혁국민정당 의원은 ‘평상복’을 입고 국회에 첫 등원, 선배 의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의원선서도 할 수 없었다(왼쪽 사진). 1970년대 미니스커트 단속 모습(오른쪽 사진)은 패션에 투사되는 국가권력을 잘 보여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국회의원의 재킷

2003년 유시민 의원의 첫 국회 등원 장면은 역사적이었다. 알다시피 그의 캐주얼한 복장이 격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선배 의원들은 ‘국민에게 예의가 아니다’ ‘탁구 치러 왔냐’라며 그의 복장을 비난했고 결국 이날 의원선서는 무산됐다. 이튿날 평범한(?) 정장을 입고서야 의원선서는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때 문제의 복장은 어땠을까. 흰색 면바지에 남색 재킷을 걸쳤으며 안에는 넥타이 없이 라운드 티셔츠를 받쳐 입었다. 구김이 많이 가는 재질인지 바지주름이 눈에 띄었을 뿐, 당장 결혼식장에 참석한대도 이상할 것 없는 반듯한 복장이었다. 탁구 치기에는 불편할 것 같은 복장의 어떤 부분이 국민을 모독했단 말인가.

복장의 다름을 문제 삼는 데에는 국회의원이라는 특권 의식이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국회법에 복장규정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국회의원 벼슬길에 어울리는 복장은 따로 있어야 한다고 믿은 까닭이다. 사회적 통념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기로야 일생을 ‘남장여자’로 지낸 김옥선 전의원의 남성 정장이 더 극단적이겠지만, 그 이유만으로 김 의원을 비난한 경우는 없었다. 하물며 유 의원의 색다른 옷차림이 도발은 아닐진대, 정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격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가진 옷에 대한 강고한 관념을 잘 보여준다. 그 논란은 국회의원들의 잘못이라거나 옷의 잘못이라 말하기보다는 정치인에게 옷이 주는 의미, 달리 말해서 패션의 정치성이 그 시점에서 폭발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 패션이라는 메시지

옷은 신체와 세계를 연결한다.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유행과 문화를 전파하는 것도 옷이고, 40대 초선의원과 점잖은 중진의원을 격렬하게 이어준 것도 옷이다. 1980년대 초, 브룩 실즈가 모델로 등장한 청바지 광고처럼 우리의 신체와 옷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옷은 신체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었기에 한 사람의 존재와 타인 간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마셜 맥루언의 유명한 명제처럼 옷이라는 매체는 수많은 사건과 그보다 더 많은 의미들을 만들어 냈다. 사실 국회의원 한 사람의 옷매무새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그로 인해 대립이 가시화되었을 때 그의 재킷 한 벌은 국회의 권위에 도전한 저항의 상징이자 실체가 되었다. 시대와 사회의 흐름을 거슬러 함부로 고쳐 입지 못하는 것, 혹은 누구든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옷이 가진 의미의 네트워크를 우리는 패션이라 부른다. 옷뿐 아니라 안경이나 신발 같은 장신구는 물론 화장이나 문신처럼 신체를 치장하고 드러내는 행위는 관계성을 드러내는 매체이자 메시지이다. 그 때문에 패션은 권력적일 수밖에 없다. 패션에는 성과 인종, 계급의 차이가 고착돼 나타나며 억압과 강요의 메커니즘이 켜켜이 쌓인다.

한국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이자 화장하는 남자로 이름을 남긴 앙드레 김이 우리 사회에서 명사 대접을 받은 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오히려 우스개 이야기에 더 많이 등장한 것이 그의 이름이다. 앙드레 김은 그나마 대중적인 명성이라도 있어 괜찮았지만 평범한 이들에게 마음껏 꾸미고 차려입는 일은 말 그대로 신변의 위협이 되었다. 장발 단속에 경찰력이 동원된 것도 무시무시하거니와, 남자가 머리하고 치장하는 것만으로도 음란퇴폐로 몰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경향신문, 1970·8·29). 남녀 가릴 것 없이 유신시절 패션은 권력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으며, 권력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기호였다. 이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대통령의 눈 밖에 나서 히피 같은 말종 취급당했던 것이 그 시절 패션이었다(동아일보, 1971·1·22).

국가권력에 의한 ‘금지’는 늘 ‘권장’ 또는 ‘장려’와 짝패를 이룬다. 교복자율화 이전 고교생들이 입어야 했던 교복은 일제 군국주의 군복에서 유래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권력으로서의 패션

일상이 병영처럼 통제되던 시기, 패션에 국가권력이 투사됐다는 사실은 통제의 자장이 일정한 목표와 방향을 가졌음을 뜻한다. 바리캉을 든 경찰은 힘없는 젊은이들에게는 무자비한 권력의 대리인이었지만 청년 못지않은 ‘8인치나 되는’ 긴 머리를 휘날리던 40대 교수에게는 뜻밖으로 관대했다(동아일보, 1971·7·14).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이 청년층과 청년문화를 분명한 표적으로 삼은 풍기단속이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바리캉으로 ‘고속도로’를 내고 허벅지에 줄자를 들이대던 미니스커트 단속 따위가 ‘그때 그 시절’의 풍경으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런 풍기단속은 한국의 군사독재만을 규정하는 특수한 상황은 아니었다. 1960년대 말, 미니스커트는 이미 세계적인 변혁을 상징하는 패션으로 떠올랐다. 정치적 배경만큼 논란 또한 세계적으로 고르게 퍼져나갔고 국가권력의 대응들도 유사했다.

미니스커트가 만든 풍경은 나라별로 약간의 시차는 존재하지만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미니스커트는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 전통관습과 유독 격렬하게 충돌한 듯이 보이지만 서유럽이라고 이 문화적 충격을 대범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미니스커트를 입었다는 이유로 구류 처벌을 내린 나라에는 이탈리아도 포함된다(동아일보, 1971·2·24). 영국에서는 미니스커트에 과세를 하자는 주장도 농담처럼 등장했다가 실제로 시행 직전까지 갔다. 당시 아동용 스커트 면세 기준이 길이였기 때문에 세법을 고쳐 미니스커트에 과세하겠다는 계획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발상만은 아니었다(동아일보, 1968·7·16). 미니스커트는 한 국가의 관습과 문화는 물론 과세제도까지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의 각 풍경이 그럴진대, 줄자를 대고 길이를 단속하던 한국의 1970년대 상황은 도깨비나라의 풍경은 아니었던 셈이다.

■ 금지 혹은 장려의 패션 정치

금지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짝패를 이루는 권장·장려와 함께 작동한다. 1970년대 혹독했던 패션권력은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과 동일한 힘을 가진 권장과 장려를 통해 효과적으로 발휘됐다. 당근과 채찍 혹은 빵과 서커스로 유지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고 보면 패션 또한 금지와 장려가 하나의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1970년대의 패션에는 대중문화를 화려하게 수놓은 미니스커트 말고도 재건복, 새마을복으로 불린 관급 복장이 있으며 군인처럼 짧은 머리와 한 세트인 교복을 빼놓을 수 없다. 단속만큼 강력하게 장려 혹은 강요되었던 이들 복장은 기원에서부터 너무나도 정치적이었다.

네 개의 겉주머니와 네 개의 단추로 여민 사파리 재킷인 재건복을 만든 이는 김종필 당시 중정부장이었다(중앙일보, 2015·10·30). 그는 이 옷이 자유민주주의 정신과 5·16의 실용정신을 표현한다고 했지만, 단추 하나가 적다는 점을 제외하면 중국 혁명의 상징인 중산복(中山服)과 다른 점은 없었다. 중산 쑨원(孫文)이 고안했고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적극적으로 이념화한 이 옷이 쿠데타 세력에 의해 전 국민에게 장려됐는 사실은 권력의 본질적인 동질성을 보여주기에 아이러니를 넘어 섬뜩함까지 불러일으킨다. 1980년대 교복자율화 이전의 중·고등학생 교복도 마찬가지다. 식민지 시기의 교복을 반성 없이 물려받은 한국의 교복은 일제 군국주의 군복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학생 교복은 육군제복을 본뜬 것이었으며, 해군복을 본뜬 여학생복이 그 유명한 ‘세라복’(sailor服)이다. 해방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식민지배의 상징은 선택의 여지 없이 미래 세대의 신체 가장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장려라는 이름의 강요는 권력의 특징이자 본질이다. 아무리 좋을 말로 꾸며도 원하는 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원하지 않는 옷을 입히는 일은 권력행위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패션 정치의 연원은 권력만큼이나 깊다. 그 사례로 총독부의 색복장려운동을 들 수 있다. 식민지 초기에는 흰옷이 위생에 유리하다고 진단 내렸으나 1920년대 이후 식민통치가 본격화되자 정책의 방향은 뒤집혔다. 흰옷은 미개하고 비위생적이며 경제적으로도 불리하다는 것이 총독부와 지식인들의 결론이었다(조희진, ‘식민지시기 색복화 정책의 전개 양상과 추이’, <국학연구>16, 2010·6). 총독부의 색복장려는 구습타파와 생활개선을 목표로 삼아 흰옷을 적대시했다. 강연회를 한다, 선전대를 꾸린다, 염색비를 보조한다 말은 많았지만 식민지배를 위한 억압과 강제가 색복장려의 맨얼굴이었다. 흰옷을 입고서는 관공서와 시장을 이용할 수 없도록 해 정책의 형식을 갖췄지만 흰옷 입은 이를 기둥에 묶어두고 옷과 얼굴에 먹칠을 하고, 상복에까지 먹물을 뿌리는 실행방식은 정책이 아니라 지배를 위한 모독이자 폭력일 뿐이었다.

‘색복’이라는 패션 규범에는 위생, 경제, 그리고 식민지적 진보를 망라하는 이념들이 투영되었고 이를 선전하고 강요함으로써 패션은 국가적 정치성의 핵심이 되었다. 색복장려는 개개인의 신체 가장 가까이에서 작동한 식민 통치술의 하나였다. 이 통치술은 체제를 떠나서도 오래도록 유효했다. 1970년대 후반 우리식 사회주의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해 ‘유색옷 입기’를 장려한 김일성 주석의 교시를 보노라면(서유상, ‘북의 패션 변천사: 인민복과 몸뻬바지에서 화려한 저고리와 투피스로의 진화’, <민족 21>, 2009·9) 권력의 본질적 유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패션의 정치를 넘어서

이제 1970년대식의 촌스러운 통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패션의 정치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패션에는 더 복잡한 의미들이 다층적으로 얽힌다. 문화적 함의는 물론 정치·사회적 메시지가 패션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 신체에 직접 맞닿음으로 인해 옷은 신체의 정치성을 드러낸다. 오래전부터 옷은 신체를 의미화하는 가장 원초적인 매체였다. 왕권과 계급적 질서를 위해 패션경찰을 동원해 복장 하나하나를 통제한 것이 16세기의 상황이라면(김홍기, <옷장 속의 인문학>) 지금 우리의 패션은 갈수록 미분화되는 우리 시대의 차별과 격차의 현실을 반영한다.

꾸미고 가꾸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을 통제하고 목적에 따라 독점하는 것이 패션의 정치성이다. 남자라고 꾸미고 싶지 않을까마는 패션은 항상 성 역할에 따라 차별적으로 고착됐다. 최근 개그맨 김기수가 ‘화장하는 남자’로 돌아왔을 때 꾸밈의 본질을 떠나 단박에 성소수자 논란을 일으킨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아름답게 꾸미는 일은 고착화된 패션의 통제를 넘어서기가 너무나 힘들어 보였다. 이뿐인가. 패션에 가장 민감한, 그래서 한껏 패션의 자유를 누릴 청년들은 ‘헬조선’의 패션 감옥에 갇혀 있다. 기안 84의 웹툰은 패션에 대한 열망과 그 허망함을 적실히 묘사한다. 부모 등골을 뽑아서라도 유행하는 패딩점퍼를 입지만 짝퉁에 좌절하거나, 너도나도 똑같은 모습들이 군체를 이뤄 하늘 멀리 사라져버리는 것이 패션에 들뜬 청년들의 현실이다. 패션왕이란 이른바 ‘지잡대’에 격리된 채 미래 없이 살아가는 청년들의 덧없는 희망의 반어적 표현은 아닐까. ‘과잠’을 벗고 명품을 걸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때 그들의 패션은 너무도 가슴 쓰리다.

예전엔 호스티스가 여대생을 흉내냈지만 지금은 여대생이 호스티스를 흉내 낸다고 어느 소설가는 개탄했다(이외수, <장외인간>). 강제적인 규율은 사라졌지만 문화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패션에서 우열과 선악을 가르려는 시도는 여전한 것 아닌가. 온갖 매체들 덕분에 코드니, 에티켓이니 하는 패션 규율은 밀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그것이 패션과 욕망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레드카펫마다 베스트드레서, 워스트드레서를 꼽으며 이게 옳고 저게 그르다는 식으로 내려진 평가는 결국 상업적으로 재생산될 뿐이다. 그래서 배우 김꽃비의 한진중공업 작업복은 귀하고 반갑다. 지난 대선에서 후보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스포츠팀의 유니폼을 번갈아 입으며 유세를 펼쳤다. 그 옷의 의미는 너무나 명백해 질릴 수밖에 없었다. 목적에 따라 옷을 선택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정치성을 버릴 수는 없을까. 신체와 맞닿아 있는 옷이 신체를 자유롭게 꾸미고 치장하는 순수한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

▶필자 김성환
한국 현대소설을 전공했으며, 비교문화학의 관점에서 한국 문학과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교수로 다양한 문화현상 속에서 현재 우리 삶의 기원과 미래를 발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1960~70년대 노동과 소비의 주체화 연구> 등이, 함께 쓴 책으로 <1970 박정희 모더니즘> 등이 있다.

<김성환 |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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