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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세종대왕은 사대주의자? 명에 사대 외교 이유는?





13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두 얼굴의 세종 - 3편 세종은 사대주의자였나?’ 편이 전파를 탄다.

▲ 심해도 너~무 심했던 세종의 지성사대

“내가 지성(至誠)으로 중국을 섬겨 오랠수록 더욱 공경히 하여, 일호도 속이려는 마음이 없었음은 천지 신명인들 어찌 모르리오. 그러나 혹 일호라도 다하지 못함이 있을까 심히 두려워한다”

- 세종실록, 세종 13년 8월 19일

애민(愛憫)의 군주로 불리며 조선을 태평성대로 이끈 세종. 그런데 그의 엄청난 업적 뒤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바로 세종이 명(明)나라에게 극진한 사대를 했다는 것! 명 나라 황제의 요구에 조선의 백성들을 공녀와 화자(火者)로 바치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 마리의 말을 보내기까지 이른다. 엄연히 한 나라의 왕이었던 세종. 이토록 그가 지극정성으로 명에 사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지성사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15세기 세종이 재위한 당시 명나라에는 황제 영락제가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전쟁을 일으키며 영토를 확장한 정복왕 영락제. 그의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15세기는 명나라의 최대 판도를 이룬 상황이었다. 신생 왕조였던 조선의 국왕으로서 세종이 상대하기 쉽지 않았던 영락제의 위세.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조선은 명과의 전쟁 대신 사대를 외교의 방편으로 선택, 명을 상대로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이어나갔다. 세종이 사대를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 사대의 역습? 4군 6진 개척

“조종의 옛 땅을 헛되이 버릴 수 없다”

- 세종실록, 세종 16년 8월 22일

1432년 여진족이 평안도 여연군의 조선인 마을을 침략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자 여진족 토벌을 명령한 세종. 이듬해 노장 최윤덕은 1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파저강 유역에 사는 여진족을 정벌한다. 단 4명의 아군 사상자를 낸 조선의 압승. 파저강 전투를 시작으로 조선은 4군 6진의 북방 영토를 개척,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립한다.

그러나 북쪽으로 올라오는 조선군의 칼끝이 명에 향해있는 민감한 상황. 세종이 그건 지성사대를 하며 쌓아온 신뢰 덕분이었을까? 그러나 명나라는 세종의 북방 개척을 용인한다. 세종이 지성사대를 하며 쌓아온 신뢰 덕분이었다. 훈민정음, 역법,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자주(自主) 정책을 펼친 세종은 조선의 자주적 문화 부흥기를 이끈다. 자주(自主)를 위해 사대(事大)를 선택한 세종의 역습이었다.

[사진=KBS 제공]

/서경스타 전종선기자 jjs737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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