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광복절 앞뒀지만..'국뽕'과 '애국' 사이서 자취 감춘 태극기

최규진 입력 2017.08.13. 15:55 수정 2017.08.1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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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제 70 주년 광복절 당시 빌딩숲에 태극기가 걸려있는 모습
72주년 광복절을 코 앞에 앞두고 있지만 요즘 거리에선 태극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거리뿐 아니라 TV에서도 태극기나 애국심을 소재로 한 광고는 자취를 감췄다. 광복 70주년이었던 2년 전과는 딴 판이다.

당시 서울 광화문 일대의 빌딩은 대형 태극기가 점령하다시피 했다. 본점에 1500개의 태극기를 내걸고 모든 지점에도 관련 현수막을 걸었던 롯데백화점의 경우처럼 태극기를 활용한 마케팅도 많았다. 업체마다 건물 외벽에 대형 태극기를 내걸고 영화 '국제시장' 앞다퉈 상영하는 등 경쟁적인 양상도 띠었다. 지난해에도 요맘때 열렸던 리우올림픽과 연계한 ‘애국심 마케팅’이 활발했다.

올해에는 ‘태극기 마케팅’이나 ‘애국심 마케팅’을 찾아보기 어려울 전망이다. 유통업체의 경우 롯데ㆍ신세계ㆍ현대 등 3대 백화점과 이마트ㆍ홈플러스ㆍ롯데마트 등 대형 마트들 가운데 광복절 연휴 기간인 11~15일 별도의 행사를 기획 중인 곳은 없다. 강종호 홈플러스 홍보팀 과장은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애국심을 상업적으로 부각해선 안 된다. 크리스마스라면 몰라도 광복절 같은 국경일을 활용해 행사를 여는 건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최기봉 신세계 이마트 홍보팀 과장도 “여름 할인 행사가 이미 진행 중이다. 광복절을 활용하기보단 곧 이어질 추석 대목을 준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말부터 올 상반기까지 이어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수사와 탄핵 국면 때 보수 단체들이 태극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의 반작용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익명을 원한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이른바 ‘태극기 부대’가 태극기에 대한 이미지를 실추시킨 건 사실이다. 판매자 입장에선 굳이 위험 부담을 안고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올해 3·1절이나 현충일에도 국가 유공자를 대상으로 한 할인 행사 외에 별다른 마케팅은 전무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부 정파가 태극기를 독점하듯 해 태극기를 보면 광화문 광장에서 마주친 '태극기 집회'를 떠올리는 경향이 생겼다. 국정 농단 사태의 후유증 중 하나다"고 말했다.

태극기나 애국심 관련 정서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국뽕’이다. 네티즌들은 국가와 필로폰(히로뽕)의 합성어인 ‘국뽕’이란 말로 지나치게 애국심을 조장하거나 국가를 찬양하는 행태를 조롱하고 있다. 산업계나 문화계에선 ‘국뽕’이란 꼬리표가 붙는 걸 극도로 꺼린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군함도’의 제작진은 ‘국뽕 혐오’ 논란에 시달렸다. 예고편에 일제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찢는 장면 등이 등장해 ‘국뽕 영화’라는 입소문을 탔다. 개봉 후 제작진은 여러 인터뷰에서 "우리 영화는 국뽕이 아니다" , "절대 국뽕은 만들지 말자고 했다" 등의 말을 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에 국가주의 정책과 콘텐트를 강조해온 박근혜 정부에 대한 반감도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국뽕 혐오 현상은 박근혜 정부가 무너지고 조롱의 대상이 되면서 함께 부상했다. 지난 4년간 사회 구성원이 국가주의에 대해 그만큼 예민해졌다는 방증이다”고 말했다.

애국심을 둘러싼 다양한 견해가 나오는 게 자연스럽다는 주장도 있다. 정근신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국가주의와 개인주의가 서로 경쟁을 거쳐 축소와 확대를 반복하는 것은 보편적인 사회 현상이다.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고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늘어나면서 인터넷에서 국뽕이라는 이름으로 논의가 이뤄지는 것이다”고 풀이했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애국심을 강요하고 조장하는 분위기에는 거부감을 느끼지만 여전히 월드컵 국가대표 경기, 대통령 선거 등에는 자발적인 관심을 갖는다. 애국심을 인위적으로 이끌어내지 않고 사람들의 보편적인 애국심에 공감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산장려운동부터 류현진까지"…애국심 마케팅 변천사 「“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쓰자” 애국심 마케팅의 뿌리를 찾다 보면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기업가들은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일본 기업에 저항했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기반을 만들기 위해 우리 물건을 써 주자는 이유였다. “조선 사람 조선 것”이라는 구호는 이후 표현은 바뀌었지만 애국심 마케팅의 핵심 주장이 됐다.
물산장려운동

해방 이후엔 국가ㆍ대학ㆍ기업에서 주도한 다양한 애국심 마케팅이 이어졌다. 1960년 4ㆍ19혁명 뒤 대학가에서는 ‘신생활 운동’이라는 국민계몽운동이 활발했다. 학생들은 국민계몽대를 조직해 “사치품 배격하고 국산품 애용하자” “한 개비 양담배에 불타는 조국”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ㆍ극장ㆍ다방 등을 돌았다. 양담배 수천 갑을 서울 광화문에 쌓아 놓고 불태우기도 했다.

새생활 운동

5ㆍ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도 애국심 마케팅을 강조했다. 이 시기 길가와 건물 곳곳에선 ‘국산품 애용’ 표어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국가가 공권력으로 양담배 등 외제품 사용을 단속하기도 했다.

국가가 위기 상황일 때 애국심 마케팅은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1998년 외환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이 대표적이다. 시민들은 장롱에 있던 금목걸이와 금반지를 들고 은행에 갔다. 351만여명이 낸 약 227톤의 금을 수출해 22억 달러의 외화를 벌었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차관으로 받은 210억 달러의 10% 가량이다.

이듬해인 1999년, 현대증권은 ‘바이 코리아(Buy Korea)’ 광고를 내보냈다. 당시 한국 증권시장의 주가총액(137조원)이 일본 회사(NTT) 하나의 주가총액(157조원)보다 적다는 내용이었다. “한국 경제, 외국 기업 하나만도 못합니다. 온 국민이 이룬 나라 한국에 투자합시다”라는 광고가 나간 지 4개월 만에 12조원어치의 ‘바이 코리아’ 펀드가 팔렸다.
815콜라
‘815콜라’도 애국심 마케팅에서 빠질 수 없는 상품이다. 미국 코카콜라에서 원액을 받아 라이선스 생산을 하던 범양식품은 1998년 코카콜라가 직영 체제로 전환하자 “콜라 독립”을 홍보 문구로 외치며 815콜라를 출시했다. 토종 기업의 기술로 만든 제품이라는 점이 외환위기 이후 국산품을 이용하자는 분위기와 맞물려 1999년 시장점유율은 13.7%까지 올라갔다.

2000년대부터 애국심 마케팅은 “세계 속에서 활약하는 한국”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국제화가 빠르게 진행돼 “국산품 애용”이 호소력을 잃은 점도 있지만 2002년 한ㆍ일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오른 게 전환점이 됐다. 기업들은 박지성ㆍ김연아 등의 스포츠 스타를 활용해 글로벌 기업이란 이미지를 강조했다. 」

최규진ㆍ송승환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