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끌려온 소녀들 12시간 2교대..경성방직 잔혹사

신상미 자유기고가 입력 2017.08.1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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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제강점기 감옥과 같은 통제를 하던 서울 영등포의 경성방직공장에서 여공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 경향자료 사진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장규순 할머니(86)의 온몸은 방직공장에서 얻은 상처투성이다. 야간작업 중 졸다가 손가락에 실이 감겨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쇳덩어리가 다리에 떨어져 뼈가 파이고 피가 났다. 무거운 추를 들다가 치아 2개가 부러진 적도 있다. 70여년이 지났지만 10대 초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장 할머니는 12살이던 1942년 초에 경북 상주에서 동원돼 서울 영등포 경성방직(현 경방)으로 끌려왔다. 할머니는 2월의 어느 날 밤 부모와 헤어져 목적지도 모르고 트럭에 올랐다. “처음엔 너무 어린 나이라 울지도 못했다”며 “기숙사 다다미방에 오니 실감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 4년간 공장에서 실 감는 일을 했다.

할머니는 “밤새워 일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며 “존다고 많이 때렸다. 도망가는 사람도 많았다. 집에 가고 싶어서 매일 울었다. 무사히 돌아오고 나니 일본사람들이 전쟁하는 데 필요해서 끌고 갔던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회고했다. 할머니는 또 “주방에서 몰래 음식을 훔쳐 먹다가 들킨 애들이 매를 맞고 멍든 얼굴로 벌을 서기도 했다”며 “또 맞을까봐 솜 속에 들어가 숨어 있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말기에 이르자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면서 일제는 8~16세 사이의 소녀들도 근로정신대, 할당 모집, 국민징용 등의 명목으로 끌고 갔다. 이들 중 절대다수가 방적공장으로 징용됐다. 조선(주둔)군의 군복 천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신고된 피동원자 285명, 평균 나이 12.17세
현재는 활동을 종료하고 해산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에 신고된 방적공장 피동원자는 285명이다. 피해자의 동원 당시 평균 연령은 불과 12.17세로 미성년 노동의 대표적 사례다. 특히 10세 이하 아동도 무려 54명이나 됐다.

전남 나주 출신 최휴임 할머니(86)도 미쓰이(三井) 가네가후치(鐘淵)방적(당시 전남 광주)에서 일하다가 작업반장이 실가락으로 한쪽 눈을 찔러 실명했다. 면직원이었던 작은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할머니는 “애꾸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고, 시집도 늦게 갔다. 사람 많은 곳은 가지도 못하고 살았다”면서도 “작은아버지가 뭘 알았겠나. 모르고 보내신 것”이라고 했다.

최 할머니는 도망가다 붙잡혀 온 소녀들에게 행해진 가혹행위도 들려줬다. 할머니는 “큰 광장이나 복도에 내놓고 때리더라”며 “머리를 깎이고 옷도 벗겨서 방마다 데리고 다니며 망신을 줬다”고 몸서리쳤다. 이어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지도 몰라. 일하다 코를 다친 아이가 있었는데 어디로 보냈는지 다시는 못 봤다”며 “집에서 면회 오면 다들 많이 울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는 1944년 동원돼 이듬해 해방을 맞아 공장으로 찾아온 아버지를 따라 귀환했다.

가네가후치는 1953년,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의 부친인 김용주가 김형남(후에 숭실대 초대 총장)과 함께 불하받았고, 지난 1961년 두 사람이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분할해 나눠 가졌다. 전방은 가족경영체제로 유지돼 오면서 친·인척 간에 지분 다툼 등 경영권 분쟁이 있어 왔다. 현재는 김 의원의 큰형인 김창성씨가 명예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일제강점기에 값싼 노동력을 찾아 13개의 일본계 면방대기업이 한반도에 진출했다. 전국에 흩어진 방적공장에서 10대 중·후반의 어린 소녀들이 12시간씩 2교대로 근무했다. 작업장이 건조하면 실이 끊어진다는 이유로 연중 내내 30도 이상의 고온·고습을 유지했다. 밀봉된 창문으론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밤낮을 구분할 수 없었고, 솜에서 나는 먼지와 영양부실로 면폐증이나 각기병에 걸린 소녀들도 많았다.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가면서 손목·손가락 절단사고가 빈번했고, 작업반장의 폭언 및 구타에 대한 증언도 많다.

위원회 피해신고 내용을 살펴보면, 1940년 3월 8세에 동원돼 1945년 9월 6년 만에 귀향한 소녀도 있었다. 동원된 지 불과 9개월 만에 부산의 조선방직(미쓰이 계열) 기숙사에서 사망한 10세 소녀도 있다. 동원된 지 1년 만에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성폭력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례도 있다. “일하다 죽느니 도망가다 죽겠다”며 탈출을 시도한 피해자들의 증언도 있다. 전체 285명 가운데 13명이 탈출에 성공했거나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다. 탈출에 실패해 다시 붙잡혀 오면 보복으로 구타가 행해졌다. 심지어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앞서 장규순 할머니는 기자에게 “영등포 공장이 아직 있다고 들었다”면서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죽기 전에 가보고 싶다”고 바람을 표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하고 교통수단도 마땅치 않아 서울에 살면서도 경방 공장 터에 가보고 싶다는 바람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경방은 영등포 공장이 있던 부지에 지난 2009년 경방타임스퀘어를 완공했다. 부지 남쪽엔 옛 경성방직 사무동이 남아있는데, 2004년에 등록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됐다. 경방은 1919년 주주들을 모아 주식회사로 김성수·김연수 형제가 설립했다.

12시간씩 2교대 근무, 작업 중 사고 빈번
경방은 지난 2014년 위원회 조사 결과, 조선운송(현 CJ대한통운), 경성전기(현 한국전력), 조선중공업(현 한진중공업) 등과 더불어 ‘강제동원 국내 현존 기업’ 4개 사로 처음 확인된 바 있다. 경방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사는 거물 친일파가 임원으로 활동하거나 대주주로 투자한 군수기업이었으나 당시와 현재에 법인격에 연속성이 없어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책임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경방의 경우엔 현재도 김씨 일가가 소유하고 있다. 김성수의 매제 김용완과 그 아들을 거쳐 김용완의 손자 2명이 현재 경방의 공동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김용완은 일제강점기에 경방의 서무과장·지배인, 삼양사 전무 등으로 재직하며 경영에 참여했고, 김연수가 반민특위에 연행됐을 당시엔 참고인 신문을 받고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경방이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민족자본으로 세운 최초의 근대기업 혹은 최초의 해외 진출 회사라는 그간의 선전과 동떨어진 결과다. ‘최초의 해외 진출 회사’는 남만방적을 말한다. 1939년 만주국 심양 근처에 자본금 1000만 엔을 투자해 세운 남만방적은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한 ‘관동군’의 군복 천을 생산한 공장이었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김연수는 남만방적의 공장 설비와 부지를 모두 잃었다.

1936년 지어진 경방 사무동. 지난 2009년 완공한 경방타임스퀘어 남쪽에 복원돼 있다. / 신상미
강제동원 피해자 위로금 대상에도 빠져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경방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을 탐구하는 박사학위 논문 <제국의 후예>에서 “물자 부족과 전시하 공급자 위주 시장을 기반으로 1933~1945년 사이에 고정자산을 50배 이상 늘린 경방에 품질과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평화시대는 오히려 장애물이었고, 식민통치가 준 경제적 기회를 이용해 1945년 이전에 최초로 재벌을 형성했다”고 평가했다. 공출과 강제동원으로 고통받는 식민지 대중과 달리 군국주의와 손잡은 친일 기업가들에겐 전쟁이 되레 기회가 된 것이다.

김성수는 경방 설립 다음해인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했고, 5년 후인 1924년 김연수는 삼양사(현 삼양그룹)를 설립했다. 두 형제 모두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 각종 친일파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경성방직 동원 피해사례는 장 할머니 외에도 폐결핵에 걸려 귀환한 후 사망한 사례(2건), 14세에 동원됐다가 5년 만에 해방을 맞아 귀환한 사례(1건), 3년 계약기간을 채우고 인근 동네 소녀들과 함께 귀환한 사례(1건) 등 총 5건(신고 기준)이 집계됐다. 위원회 관계자는 “손이나 팔 절단사고가 나도 집에 보내주지 않아 계속 일을 해야 했고, 정신질환을 얻거나 폐결핵 같은 전염병에 걸린 소녀들만 귀환 조치됐다”며 “현재 한국의 지원 관련법에서 국외 강제동원에 한정해 지원금을 주면서 국내 동원은 수급대상에서 제외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위로금 지원은 1938년 4월~1945년 8월 15일 사이에 일제에 의해 군인·군무원·노무자 등으로 국외로 강제동원된 건에 한정돼 있다. 국내 동원의 경우 위로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고, 1965년 한일협정에서도 한국 측의 미숙한 협상력으로 국내 동원은 보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여기에 피해자와 유족을 상대로 “일본 정부에 피해보상을 받게 해주겠다”며 접근하는 사기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점을 파악한 서울시와 광주시 등 일부 지자체에서 국내 여성 노무 동원 피해자에게 생활보조금 월 30만원 및 진료비 20만~30만원, 사망 시 장례비 100만원 등을 지원 중이다.

강제징용 및 위안부 관련 소송을 국내·외에서 진행해온 최봉태 변호사는 피해보상 문제에 대해 “법인격의 동일성, 청구시효 문제, 노동을 했다는 근거 등이 쟁점이 될 것”이라며 “현재 지원법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출범했다. 한일협정 체결 당시 경제협력자금을 지원받은 포스코가 재단에 100억원을 넣기로 하고 30억원을 선납하지 않았나. 책임이 있는 걸로 보이는 경방 같은 기업이 더 모범을 보여야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도 나설 것이다. 포스코도 하는데 경방 측이 시효 등을 주장해 숨지 말고 좀 더 피해자들의 아픔을 직시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한편 “피해 할머니와 유족에게 사죄를 하고 피해보상을 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의에 경방 측은 11일 오전 현재까지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경방 측은 기자와의 여러 차례 통화에서 “처음 듣는 얘기”라거나 “전화로 말할 사항은 아니다” “상황 파악을 해보겠다”고 답했다.

<신상미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