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금요일, '잠금'하고 싶다

표태준 기자 2017. 8. 1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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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불금' 즐기다 매주 주말을 망치는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의 '금요일 밤'이 조용해지고 있다
회식 줄어든 금요일.. '수면 빚 갚기' 딱 좋은 날
잠들지 않는 대한민국
수면시간 7시간41분 OECD국가 중 가장 짧아
지속적으로 잠 부족하면 기억력 저하·우울증 불러
목요일 '활활' 금요일 '쿨쿨'
직장인들 목요 회식 선호
"다음날 출근 핑계로 적당히 마실 수 있어.."
대신 금요일은 '내 시간'
"이제 잠은 상류층 상징"
잠 줄이며 일하는 건 산업화 시대의 미덕
MS·구글·아마존 CEO "하루 8시간씩 자려 노력"
아무런 고민도 걱정도 없다. 알람을 맞출 필요도 미리 계획을 짤 이유도 없다. 온전히 잠에 집중할 수 있는 날, 금요일이다. 사진은 ‘잠금족(族)’ 이다겸(24)씨가 금요일에 숙면하고 있는 모습. /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금요일, 꼭 불태워야 할까. 은행원 최완우(29)씨는 얼마 전부터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끊었다. 하혈 때문이었다. 토요일 저녁 난생처음으로 화장실에서 피를 봤다. 금요일 밤은 활활 태워야 한다며 피곤한 몸 이끌고 밤새 술을 마신 게 독이 됐다. "은행 업무는 은행 문 닫고 나서 시작한다고 하잖아요. 매일 야근 때문에 잠이 부족해서 받은 스트레스를 술로 풀려다 피까지 본 거죠."

해가 뜰 때까지 술로 허함을 채우고, 토요일 오후 늦게야 신음을 내며 일어난다. 속은 뒤틀리고, 머리는 어지럽다. 이번 주말에는 전시회에 가거나 하다못해 자전거라도 타야겠다는 계획은 알코올과 함께 증발한다. 밤과 낮이 바뀌니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무기력함이 어깨를 짓누르는 사이 월요일이 두려운 일요일이 온다. 끝장날 때까지 술로 채우는 이것은 주말(週末)인가 주말(酒末)인가.

최씨가 택한 치료법은 '잠금(잠자는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은 그나마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할 수 있는 날. 업무가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향한다. 속이 더부룩하지 않게 소식(小食)하고 샤워한다. 침대에 누워 차 마시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

스마트폰은 잠금 모드. 금요일 밤만 되면 영감이 떠오르는 팀장의 '카톡', 술로 불금을 달리자는 친구들 전화 모두 받고 싶지 않다. 밤 9시쯤 스르르 잠에 들어 다음날 몸이 기상 신호를 보낼 때까지 '몰잠(몰아서 자는 것)'을 잔다. "일주일 중 금요일 밤이 가장 마음 편하잖아요. '금요일에 못 놀면 찌질이'라는 '불금 강박증'에서 벗어나 맘 편히 '잠금'하고 나면 온전한 주말도 생기고 월요병도 없어요."

금요일 밤을 잠으로 보내는 사람이 늘고 있다. friday 섹션이 지난 2일 SK플래닛 설문 플랫폼 '틸리언'과 함께 남녀 1017명에게 '잠들기 가장 좋은 날'을 물은 결과 '금요일'이 44.2%로 가장 많았다. 주말을 시작하는 금요일 밤은 그동안 쌓인 피로를 숙면으로 풀기 가장 좋은 날. 금요일, 이제는 '잠금'하고 싶다!

Getty Images 이매진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잠은 최고의 명상이다"고 했다. 그는 매일 밤 9시 30분 잠에 드는 것을 중요한 수련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과학적으로도 잠은 뇌를 깨끗이 하는 최고의 명상이 맞는다. 과학지 '사이언스'는 2013년 10대 연구 성과 중 하나로 미국 학자들이 발표한 잠에 관한 논문을 꼽았다. 수면 상태인 쥐의 뇌를 연구한 결과, 잠을 자는 시간 두뇌 세포 사이 공간이 넓어지며 해로운 물질이 없어지는 대청소가 시작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청소 시간을 줄이면 치매 원인으로 가장 유력한 물질이라 알려진 '베타아밀로이드' 단백질이 쌓이는데 뇌의 활동을 방해하고 두통을 유발한다. 그 외에도 잠이 부족하면 기억력이 떨어지고, 살이 찌고,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는 얘기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수면 부족의 백해무익이 알려지며, 이를 '잠금(잠자는 금요일)'으로라도 해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한국인의 금요일 밤이 조용해지기 시작한 이유를 friday가 들여다봤다.

'수면 빚' 최다 국가 대한민국

미국 수면의학자 윌리엄 디멘트는 저서 '수면의 약속'에서 "수면이 계속 부족하면, 금전적인 빚이 쌓이듯 나중에 잠을 자야 할 시간도 쌓인다"며 '수면 빚(sleep debt)'에 대해 설명했다. "수면 빚이 쌓이면 집중력 저하와 의사 결정 지연, 무관심, 동기 상실 같은 문제가 생긴다"며 쌓인 수면 빚을 제때 '숙면'으로 갚아줘야 한다고 했다.

일러스트= 김병철

'수면 빚' 개념에 따르자면 한국은 빚더미에 오른 나라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평균 수면 시간은 7시간 41분으로 OECD 평균 수면 시간인 8시간 22분보다 41분이나 짧았다. 18개 회원국 중 수면 시간이 가장 짧은 것은 물론이고, 2014년 한국인 평균 수면 시간(7시간 49분)보다 오히려 8분 짧아졌다. 수면 시간이 부족해 수면 장애 등으로 병원 진료를 받은 환자 수도 2015년 46만2848명으로 5년 전보다 60%나 늘었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왜 잠들지 못하고 있을까. friday 섹션이 '틸리언'과 함께 남녀 1017명에게 '잠 못 드는 이유'(복수 응답)를 물은 결과, '스트레스'(30.7%), '영화 및 TV 프로그램 시청'(26.1%), '과도한 업무 및 회식'(19.5%), '불면증, 코골이 등 수면 질환'(18.4%), '가사 및 육아'(16.4%), '인터넷 및 게임'(11.7%)이 꼽혔다. 스트레스나 처리해야 할 업무나 가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을 줄이기도 하지만 '영화 및 TV 프로그램 시청'(26.1%), '인터넷 및 게임'(11.7%) 등 기분 전환 거리를 위해 잠을 포기하는 이도 많았다. 워킹맘 김주희(36)씨는 "일과 육아에 치이다 보면 잠들기 전 잠깐 누워 있는 시간 외에는 개인 시간이 없다"며 "보상심리로 새벽까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뒤적인다"고 했다.

금요일, 빚 갚기 가장 좋은 날

영상 프로덕션에서 일하는 김주영(28)씨에게 금요일은 '빚 갚는 날'이다. 토요일 오후까지 '몰잠(몰아서 자는 잠)'을 잔다. 김씨는 "밤샘 작업이 많다 보니 부족한 잠을 쌓아두었다가 몰아 잔다"며 "토요일이나 일요일보다 금요일 밤에 집중적으로 자는 게 가장 피로가 잘 풀리는 것 같다"고 했다. 주5일제가 오래전부터 정착돼 있던 외국에서는 이미 금요일이 가장 숙면하기 좋은 날로 굳어져 있다. 지난 2008년 영국 노리치대학교 병원 연구팀이 성인 남녀 3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0% 이상이 금요일 밤에 가장 깊게 잔 것으로 나타났다.

김혜윤 국제성모병원 신경과 교수는 "요일마다 심리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수면의 질도 차이를 보이는 것"이라며 "만성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한국인들도 외국처럼 가장 숙면하기 좋은 날을 골라 그동안 쌓아놓은 수면 빚을 갚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한 김 교수는 "다만 잠을 몰아 자더라도 다음 날 기상이 늦어지면 평소 수면 습관을 해칠 수 있다"며 "늦게 일어나는 '몰잠'보다는 저녁 일찍 잠에 들어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몰잠이 더 건강하게 수면 빚을 갚는 방법이다"고 했다.

목요일은 활활, 금요일은 쿨쿨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려 잠에 들지 못하는 남성. 잠을 줄여가며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더 이상 자랑이 아니다. 세계적인 기업의 CEO들은 자기가 얼마나 숙면하고 있는지를 알리기 시작했다. / 시몬스 제공

불금 대신 '불목(불타는 목요일)'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잠금족(族)' 증가의 원인이다. 지난해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 947명에게 '회식하는 날'을 물은 결과 '목요일'이라고 답한 사람이 19%로 가장 많았다. 지난해 삼성전자에 입사한 강재혁(27)씨는 "회식은 주로 목요일에 하고, 금요일 회식은 입사 후 단 한 번도 없었다"며 "금요일은 일찍 퇴근해 가족과 있거나 집에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보내는 분위기"라고 했다.

목요일 밤을 불태우는 사람이 많아지며 국내에서도 금요일을 편하게 쉬는 날로 생각하기 시작한 분위기다. friday 섹션 설문 결과에서도 '잠들기 가장 좋은 날'을 물은 결과 '금요일'이 44.2%로 가장 많은 반면, 목요일은 2.8%로 화요일(2.5%) 다음으로 적었다. 직장인 신혜림(28)씨는 "금요일 밤에 술을 마시면 주말에 지장을 줘 피로를 풀기 어렵다"며 "대신 다음 날 출근이 신경 쓰여 적당히 술을 마시게 되는 '불목'을 보낸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밤새 술을 마시며 집단을 결집하는 문화가 사라지며 '불타는 금요일'도 사그라지기 시작한 것이다"며 "개인의 건강과 다양해진 여가 생활을 위해 고삐 풀린 '불금'보다 자제할 수 있는 '불목'을 보내고 금요일은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쪽잠'보단 '꿀잠'이 인정받는 시대

"나폴레옹은 하루 3시간 잤다는데, 너흰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나폴레옹은 한때 프랑스의 황제보다 '잠의 신화'로 유명했다. 잠을 못 이긴 학생들이 단체로 헤드뱅잉을 하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선생님들은 수험생의 한심함을 나폴레옹과 대조해 말했다. "나폴레옹은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말 위에서 쪽잠을 잤단다. 그렇게 해야 성공하는 거야." 사당오락(四當五落·4시간 자면 원하는 대학에 가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보다도 심하다.

수많은 수험생을 게으름뱅이로 만든 나폴레옹의 일화는 사실 오해다. 나폴레옹의 비서 브리센이 남긴 자료에 따르면 그는 하루 8시간 이상을 꼬박꼬박 챙겨 자야 했다. 일이 많아 잠을 못 잘 때는 오히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불면증을 앓아 종종 판단력을 잃곤 했다. 워털루 전투 같은 중요한 순간에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았을 정도다. 그가 유럽 대륙을 호령할 수 있었던 원인은 '쪽잠'보단 '꿀잠'에 가깝다.

21세기 잠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적게 자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산업화 시대에는 '비행기에서 쪽잠을 자며 계약권을 따낸 사장님'이나 '가장 늦게 퇴근해 새벽에 출근하는 회장님'이 존경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잠을 적게 자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되려 '잠 잘 자는 CEO'라는 사실을 알리기에 바쁘다. 마이크로소프트 최고 경영자 사티아 나델라는 "하루 8시간을 자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글 회장 에릭 슈밋은 하루 8시간 반 이상을 자고, 아마존 최고 경영자 제프 베조스는 하루 8시간 숙면을 강조한다. 골드만삭스는 직원들의 수면 건강을 연구하기 위해 아예 수면 전문가를 고용했다. 보험사 애트나에서는 7시간 이상 잠을 잔 직원들에게 숙면을 취한 날 수에 따라 25~300달러 상금을 지급한다.

지난 4월 뉴욕타임스는 "잠이 상류층의 새로운 상징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제대로 자지 못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기 시작하며 잠을 잘 자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깊은 잠에 드는 명상법 강의가 북새통을 이루고, 숙면을 유도하는 전자기기가 고가에 팔린다. 일과 여가를 위해 수면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제 옛말. '꿀잠'을 자기 위해서라면 금요일 밤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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