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코리아 패싱' 깊이 들여다보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코리아 패싱 현상에는 대략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우선 G2(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한국이 배제되는 경우다. 이해 당사국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전형적인 강대국 외교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 정권 붕괴 이후 상황에 대한 미·중의 사전 합의를 트럼프 행정부에 제안했다는 지난달 29일 자 뉴욕타임스 보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 전직 고위관리는 얼마 전 사석에서 “우리가 미국에 한 얘기는 중국도 곧 알게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며 “우리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손’이 늘 왔다 갔다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 다른 코리아 패싱은 한·미의 북한 관련 정책 방향의 이견에서 나올 수 있다. 미국의 코리아 패싱이다. 야당이 문재인 정부의 ‘제재와 대화 병행’ 원칙 고수를 두고 비판하는 이유다. 지난 4일 김광림 자유한국당 의원은 이명박 정부 당시 한·미 정상회담에서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제부터 한국에 (북한 관련) 정보를 주겠다’고 말해 충격을 받았다”는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회고록을 인용하면서 “노무현 정권에 대한 미국의 불신”이라고 지적한 것이 한 예다.
마지막으로 ‘핵 문제는 북·미 간의 문제’라는 북한의 코리아 패싱이다.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이다. “조선반도 핵문제는 철두철미 미국 때문에 생겨난 문제”라는 지난 7일 이용호 북한 외무상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연설은 최근 사례다. 세 가지 코리아 패싱 가능성은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1위인 한국 외교 운신의 폭을 늘 제약해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수정권이건, 진보정권이건 잠시 한눈을 팔면 언제 ‘패싱’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세 가지 코리아 패싱을 막기 위한 ‘종합 처방전’을 내놓았다. “한반도 전쟁을 두 번 다시 용인할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은 첫 번째 패싱,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배치 결정과 “유엔 제재에 원유 공급 중단이 빠진 건 아쉽다”는 발언은 두 번째 패싱, 한국 주도의 남북관계 개선 필요성 설명은 세 번째 패싱을 각각 막아보자는 의도였다. 힘든 길이지만 가야 할 길이고 이제 그 시작이다.
차세현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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