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경험을 사고파는 시대

안혜리 2017. 8. 10.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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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일본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덩어리) 세대가 세상을 떠나는 시기가 되면서 명품 그릇 처리에 골머리를 앓는다는 얘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자식들은 취향이 다르다며 물려받고 싶어 하지 않는데 중고시장엔 이미 수십만 세트가 풀려 있어 더는 팔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제아무리 값비싼 명품 브랜드라도 결국은 싸구려와 똑같이 쓰레기장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한때는 분명 모두가 탐내던 식기였을 텐데 왜 이렇게 처치 곤란 애물단지 신세가 됐을까.

답부터 얘기하자면 소비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후에 태어나 성장일로의 삶을 살아온 단카이 세대의 소비는 과시형이었다. 남들이 가진 건 나도 가져야 하는 건 기본이요, 남들 없는 것도 하나쯤은 소유해야 했다. 자신의 취향보다도 남들이 알아주는 브랜드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남과의 비교우위에서 만족을 찾는 소비였던 셈이다. 단카이 세대의 자녀 세대가 소비의 중심으로 떠오른 일본에선 지금 남들 보여 주려고 ‘더 크게, 더 고급스럽게’를 외치던 브랜드 지향 소비에서 탈피해 나만의 가치를 중시하는 소비로 옮겨가고 있다고 한다. 객관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혹은 비싼) 물건이냐가 아니라 나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물건이냐에 따라 소비를 결정하다 보니 물건 그 자체보다 물건과 얽힌 경험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는 얘기다.

사실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다. 물건만이 아니라 경험까지 함께 팔아야 싸든 비싸든 사람들이 지갑을 연다. 이렇듯 경험을 사고파는 식으로 소비 패턴이 점점 바뀌면서 책 한 권도 특별하게 파는 서점이 등장했다. 최근 부산에 문을 연 복합휴양단지 아난티 코브의 ‘이터널 저니’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크기의 3분의 1 공간에서 무려 2만 권 넘는 책을 팔면서 그 흔한 도서검색대 하나 없다.

일부러 이런 불친절한 서비스를 택한 이유도 바로 ‘경험’에 있다. 서가를 구경하면서 발견의 재미를 느끼라는 것, 그렇게 우연한 발견으로 산 한 권의 책은 어디서나 살 수 있는 평범한 책이 아니라 이 공간에서의 경험이 담긴 특별한 책이 된다. 책을 파는 게 아니라 경험을 파는 셈이다.

책 한 권 파는 데도 스토리가 필요한 시대다. 사람은 오죽할까. 생각이 많아진다.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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