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가 걸어가는 '이회창의 길'?

2017. 8. 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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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BAR_김태규의 영점조준_1998년과 2017년의 데자뷰

[한겨레]

그래픽_장은영
“더 이상 개인이 당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된다. 당을 특정인의 대권 대책기구쯤으로 생각하는 사고부터 버려야 한다.” “대통령후보 경선 때도 정치에는 연습이 없다며 정치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복잡한 당내상황을 봤을 때 아마추어 정치로는 안된다. 대선 패배 책임은 90%가 후보에게 있다. 대선에서 패배해 놓고 곧장 조기전당대회 운운하며 총재가 되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정치도의가 아니다.”

누구를 향한 비판일까?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 아니다. 1998년 8월, 한나라당 총재 경선에 출마한 이회창 후보를 겨냥한 서청원·이한동 후보의 일갈이었다. “국민의당은 지난 1년 반 사당화의 그림자가 지배했다.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고 아무 때나 출마할 수 있고 당선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사당화의 명백한 증거다”(정동영), “이번 전당대회는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지도부를 대체하기 위한 보궐선거다. 가장 큰 책임은 안철수 전 대선 후보 본인에게 있다. 대선 패배 책임을 지고 물러난 당대표 자리를 대선 패배에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대선후보가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안 전 후보가 그렇게 부르짖던 새 정치인가”(천정배)라는 국민의당 당권주자들의 비판과 놀랍게도 비슷하다.

199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전날인 8월30일, 측근들과 막판 대책을 숙의하고 있는 이회창 후보.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안철수 전 대표의 당권 도전 때문에 국민의당 안팎이 시끌시끌하다. 대선 패배 뒤 3개월 만에 당대표가 되겠다는 그의 결심은 한국정치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매우 빠른 타이밍이다. 그간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가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명분’이 필요했다. 1992년 12월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87년 개헌 이후 처음으로 치러지는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앞둔 1995년 5월, ‘지역등권론’을 설파하며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재개했고 그해 7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정계은퇴 2년7개월 만의 복귀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패배 뒤 의정활동을 하며 지역구 국회의원의 삶을 살았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당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고 SNS를 통해 정치 현안에 목소리를 내며 때를 기다렸다. 2015년 2월 전당대회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에 오르며 대선 재도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대선 패배 뒤 당권을 잡기까지 걸린 시간은 2년2개월이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새 대표 선출을 위한 8·27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주요정당의 대선후보로 출마해 패배한 뒤 최단기간에 당을 접수한 기록의 소유자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다. 지난 7월3일 당대표로 선출됐으니 5·9 대선으로부터 55일만이다. 당대표 경선 토론회에서 대선패배 책임론이 불거지긴 했지만 당이 요동칠 정도로 격렬한 쟁점은 아니었다. 안철수 전 대표가 8·27 전당대회에서 당대표가 된다면 3개월 만의 컴백으로 역대 2위의 기록이 된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패한 뒤 1998년 8월에 또 다시 당수가 된 이회창 총재의 ‘조기 복귀’보다 5개월 빠르다.

패배한 대선후보의 조기 등판이라는 ‘사변’을 마주한 2017년 국민의당의 모습은 19년 전 한나라당의 데자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한동·김덕룡·서청원 등 당시 당권주자들은 이회창 명예총재의 전당대회 출마를 혹독하게 비판하며 ‘반이연대’를 구축했다. 당권주자들 본인은 부인했지만 이회창 명예총재의 출마에 반발하는 집단탈당설도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들 3인은 1차 투표에서 이회창의 과반 득표를 저지한 뒤 결선투표에서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국민의당도 7일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이번 전당대회 때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겠다고 결정했으니 큰 틀의 ‘게임의 룰’은 일치한다.

그러나 1998년 8월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는 1차에서 55.7% 득표율로 게임을 끝내버렸다. 결선투표까지 갈 것도 없이 이한동(21.2%), 김덕룡(17.5%), 서청원(5.4%) 후보를 압도한 것이다. 정권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 대안’으로 다시 인정받은 이회창은 그뒤 2002년 대선까지 정주행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결과는 대선 2연패였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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