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산책] 미래 사회와 일의 지속 가능성

2017. 8. 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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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즐겁게 놀던 예전의 기억이 있다. 변변한 도구나 시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공터나 골목은 아이들의 재미난 놀이의 터였다. 도시의 변화 속에서 놀이의 터 역시 변화돼왔다. 일상의 주거 환경이 된 아파트에 과거와 같은 공터나 골목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 자리는 이제 놀이터가 대신하고 있다. 그 놀이터의 특징은 여러 놀이기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곳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미끄럼틀과 그네 같은 놀이기구들로 놀이터는 가득 차 있다.

놀이를 위한 시설 제공은 매우 큰 편익이지만, 놀이터를 채우는 것은 시설이 아닌 놀이여야 한다. 그 놀이가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놀이터를 채우는 것은 결국 사람이어야 한다. 아쉽게도 현재 놀이터의 중심은 사람보다는 시설인 듯하다. 놀이터에 대한 비판은 진작부터 제기돼 온 것이었다. 그 비판의 핵심은 아이들의 놀이터에 아이들의 시선이 반영돼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적의 놀이터'라는 이름으로 순천에서 시도되고 있는 놀이터의 혁신은 정말 기적 같은 변화로 느껴진다. 놀이 수단의 제공이 아닌, 놀이의 터를 열어줌으로써 아이들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가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과인 것이다.

이 기적이 더 이상 기적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느 한 지역의 특성이나 여행지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환경으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그 같은 놀이터에서의 놀이는 결코 혼자만의 놀이일 수 없다. 갖춰진 놀이가 아니기에 놀이는 만들어져야 하며,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놀이는 협력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 기적 속에서 옛 놀이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과거에 대한 향수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다. 협의를 통해 규칙을 만들고, 때로 그것을 부정하고 변경하면서 새로운 놀이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놀이의 근본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같은 아이들의 놀이에서 게임이론이라는 그의 후기 언어철학의 단초를 발견한 바 있기도 하다.

협력과 협의를 통해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새롭게 개정하는 과정 속에서, 놀이는 사회성과 인성 함양의 계기이자 창의성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놀이를 그저 농판스러운 행위로만 간주해서는 안 된다.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역량과 능력을 놀이를 통해 함양해 낸다는 점에서, 놀이는 해야 하는 사건으로서 일종의 일이기도 하다. 놀이가 일이기도 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게임학 연구에 따르면, 놀이의 근원은 제의(ritual)이며, 신화시대에서 제의는 질병의 치유뿐 아니라 부족 간 갈등을 해결하는 과제를 수행했던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놀이와 일을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은 무척 낯설다. 이 낯섦은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놀이의 근본 기능에 기초해 그것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일반화돼 있지만, 아쉽게도 그 기간은 생각보다 짧다. 아이들이 조금만 성장하게 되더라도, 노는 것은 공부하는 것과 다른 것이 돼버리고 만다. 공부를 위해 놀이는 희생되거나 지연돼야 할 것이 돼버리고 말았다. 공부 역시 해야 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대립은 놀이와 일의 관계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일이라는 명칭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성인에게 노는 것은 대개 일과 무관한 시간을 보내는 행위쯤으로 이해되며, 때로 절망스러운 상황을 일컫는 말로도 사용되곤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소년을 위한 놀이의 터나 어른들을 위한 놀이의 터는 생각 내(內)의 것이 될 수 없다.

놀이와 일의 이분법은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한 하위징아는 일 속에서 밀려나는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에게서도 호모 루덴스는 호모 파베르와 대립적 구도를 이룰 뿐이다. 하지만 호모 파베르에게 있어 도구의 제작이 놀이였다는 점은 결코 간과돼서는 안 될 일이다. 놀이와 일이 양립될 수 있다면, 호모 루덴스와 호모 파베르의 구별과 대립은 그저 허위의식일 따름이다.

일에 대한 경고 수위가 높아가고 있다. 우리가 해 온 일들이 새로운 시대에 더는 효용성을 갖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 전망이 인간의 일 자체에 대한 비관으로 귀착돼서는 안 된다. 경고 받고 있는 일은 놀이와 반대되는 것이었으며, 이 점에서 일의 미래에 대한 현재의 경고는 일과 놀이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과 놀이에 대한 시각을 전환할 수 있다면, 일을 놀이의 관점에서도 조망할 수 있다면, 일의 미래에 대한 문제를 우리는 보다 전향적으로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놀이는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수단의 제공만으로 충족되지도 않는다. 놀이는 협력의 산물이며, 놀이의 지속은 수단이 아닌 터에서 확보될 따름이다. 인간의 일도 마찬가지다. 놀이처럼, 일이 만들어지는 터를 준비해야 하며, 그 속에서 비로소 미래사회의 인간 일의 지속 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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