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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 가난, 인간의 뇌를 바꾼다

원호섭 2017. 8. 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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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하면 인지기능까지 저해…'경제력과 뇌' 메커니즘 찾는 과학자들

1969년 과테말라의 수도인 과테말라시티에서 약 35~100㎞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인 산후안과 엘코나카스테. 중미파나마영양협회(INCAP) 연구진이 멕시코 전통음료인 '아톨레'를 들고 나타났다. 아톨레에는 여러 채소와 함께 고단백질 재료가 섞여 있었다. 또 다른 시골 지역인 에스피리투산토와 산토도밍고에는 설탕과 조미료가 섞인 음료인 '프레스코'가 보급됐다. 네 지역 모두 먹을 것이 부족해 갓 태어난 아기들이 굶는 일이 잦았다. INCAP는 7세 미만의 영유아에게 고단백질의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성장부진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INCAP는 그로부터 8년 뒤인 1977년까지 연구를 이어갔다. 실험은 예상대로였다. 7세 이전에 고단백질의 음식을 먹은 산후안과 엘코나카스테 지역 아이들의 키는 다른 지역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1~2㎝ 이상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따르면 이후 이어진 추적조사에서 어렸을 적 고단백질을 섭취한 아이들은 청소년기가 됐을 때 읽기와 지능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에머리대 연구진은 2010년 2월 영양학저널에 과테말라에서 진행됐던 연구를 추적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1~3세 때 고단백질 음식을 먹은 여성 아이의 경우 성인이 됐을 때 대부분 고학력자가 됐으며 남성보다 많은 월급을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를 이끈 레이날도 마르토렐 에머리대 교수는 네이처와 인터뷰하면서 "후속 연구가 없었다면 1960년대 INCAP의 실험이 잊힐 뻔했다"며 "이 연구는 세계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어린아이에게 영양식을 제공하는 것이 인간의 건강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고 말했다.

과테말라 실험 이후 브라질, 페루, 필리핀, 케냐 등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진행됐다. 결론은 같았다. 어렸을 때 제대로 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아이들에게서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형준 한국뇌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뇌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 뿐 아니라 어렸을 적 많은 발달이 일어난다"며 "많은 연구들이 어렸을 때 극심한 기아, 척박한 환경 등에 노출되면 뇌에 이상이 생기며 인지기능까지 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조금 더 정확한 '메커니즘'을 찾으려는 연구를 하고 있다. 어떤 영양소가 중요한지, 적정한 음식의 양은 어느 정도인지, 정상적인 뇌 발달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말이다.

네이처에 따르면 현재 방글라데시의 빈민가 '다카'에서는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3개월 된 아기의 뇌를 기능성자기공명영상장치(fMRI)로 들여다보고 뇌파를 측정한다. 방글라데시 국제보건연구소가 진행하고 있는 이번 연구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만든 '빌앤드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연구비를 지원했다. 네이처는 "이 연구는 개발도상국에서 유아의 두뇌가 역경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피는 첫 번째 연구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이번 연구에는 찰스 넬슨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도 참여했다. 넬슨 교수는 2000년, 루마니아의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의 뇌를 연구한 경력이 있다. 2012년 8월 국제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게재된 넬슨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 20명의 뇌에서는 회색질, 백질 부위 영역이 상당히 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부위는 주의력, 언어능력 등을 담당하는 곳이다. 넬슨 교수는 "입양돼 가족이 생긴 아이들의 뇌에서는 이 부위가 다소 넓어졌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미국 유럽 등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으며 대부분 연구결과는 비슷하게 나타났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어린 시기 뇌는 바깥 세상과 상호작용하고 자극을 받으며 발달한다"며 "어렸을 때 빈곤으로 인한 영양부족, 학대와 같은 환경에 놓이면 뇌 구조에 변화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네이처는 방글라데시 다카 지역에서 진행되는 실험은 또 다른 결과를 낳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 유럽 등에 살았던 빈곤 아이들은 적어도 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지만 다카 지역은 더 열악하다. 네이처는 "빈곤에 허덕일 뿐 아니라 주변 환경조차 비위생적"이라며 "아이들이 하는 일이라곤 아침에 눈을 떠 하루 종일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넬슨 교수팀은 '기능적 근적외선 분광법(fNIRS)'을 이용해 다카 지역에 있는 2~3개월된 아이 12명의 뇌를 살펴봤다. 모자 쓰듯 착용하는 fNIRS는 뇌 속으로 적외선을 보내 혈류를 측정하는 장비로 fMRI와 비슷하다. 혈액 속 산소의 양을 측정해 뇌의 발달 정도를 알아낸다. 12명의 아이들은 루마니아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처럼 회백질 영역이 상당히 좁은 것으로 나타났다. 넬슨 교수는 "어린 나이에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매우 안 좋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회백질 영역이 좁을 경우 인지, 언어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데 태어난 지 2~3개월 된 아이의 뇌에서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할 경우 성장과정에서 뇌의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카 지역에서 36개월이 된 아이 130명을 조사한 결과도 흥미로웠다. 성장이 더딘 아이들의 경우 사람보다는 비사회적인 현상, 즉 트럭과 같은 것을 봤을 때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성장에 문제가 없는 아이들은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 등 사회적인 자극에 반응했다. 뇌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달하고 있다는 증거다.

국내에서는 빈곤 아동의 뇌를 영상으로 분석하지는 못했지만 학업 성적, 인지 기능 등과 관련된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한국도 다른 연구결과와 마찬가지로 어렸을 적 빈곤이나 학대 등에 노출된 아이의 경우 성장하면서 학업 능력이 저하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순천향대 연구진 조사에 따르면 국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복지 사각지대에 방치된 빈곤 아동의 수가 최대 68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직접적인 생계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만큼 적절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봉주 교수는 "빈곤은 아이의 뇌발달,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데 성인이 됐을 때 경제활동에서 뒤떨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결국 빈곤이 대물림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빈곤 아동에게 투자하는 자원은 소비라기보다는 사회적 효용성이 상당히 높은 투자"라며 "빈곤이 미치는 악영향을 상쇄할 수 있는 사회적인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돈 쪼들릴 때 어질어질~ 했던 적 있나요
성인도 궁핍하면 인지기능 떨어진다는데…월급 깎으며 논리테스트 했더니 낮은 점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회는 '실패한 사람'이라는 낙인찍기를 좋아한다.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인데 이는 가난을 사회 책임이 아닌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금전적인 부분에 많은 신경을 쓰다 보니 뇌의 일부가 항상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인지기능이 떨어지기도 한다.

센드힐 물라이나단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영국 워릭대 경제학과, 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등 공동 연구진이 2013년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이 이를 말해준다. 가난하면 뇌 인지기능이 떨어져 잘못된 결정을 내리거나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였다.

연구진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행동을 파악하기 위한 실험을 기획했다. 먼저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쇼핑몰에 온 사람들 중 무작위로 선택해 연소득이 7만달러 이상인 사람과 2만달러 이하인 사람 400명을 분류했다. 소득별로 그룹을 나눈 뒤 간단한 인지능력 테스트와 논리 테스트를 보게 했다. 문제는 총 4개였는데 '돈'과 관련된 내용을 넣어 실험 참가자로 하여금 문제를 풀 때 자신의 소득을 생각하도록 했다. 가령 이런 방식이다. "당신의 차가 고장났는데 수리비가 150달러, 또는 1500달러가 나왔다. 이 비용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또는 "회사가 어려워 당신의 급여를 5%, 또는 15% 삭감할 상황에 놓였다면 현재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와 같은 문제다.

실험 참가자들은 이 문제를 풀면서 자신의 소득을 생각하며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연구진에 따르면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돈을 사용하는 데 현명한 결정을 했을 뿐 아니라 논리 테스트와 인지능력 테스트에서도 모두 좋은 성적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연소득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문제 해결력은 2배 가까이 차이 났다. 연구를 이끈 물라이나단 교수는 "쉬운 문제는 소득에 상관없이 실험 참가자 대부분이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문제가 어려워지면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점수가 현저하게 떨어졌다"며 "이는 뇌의 인지기능이 재정적 문제를 신경 쓰는 데 사용되면서 다른 결정을 내릴 때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연구진은 인도에 살고 있는 사탕수수 농부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사탕수수는 1년에 한 번 수확하는 작물이라 수확이 끝난 직후에 농부들은 금전적인 걱정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확하기 직전까지는 금전적인 문제로 허덕인다.

연구진은 사탕수수 농부 464명을 대상으로 수확하기 전과 후로 나눠 논리 테스트와 인지능력 테스트를 실시했다. 그 결과 사탕수수를 수확한 뒤, 즉 금전적인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높은 점수가 나왔지만 수확 전에 본 테스트 결과는 낮게 측정됐다. 첫 번째 실험과 마찬가지로 수확 후와 수확 전 문제 해결력에는 두 배가량 차이가 있었다.

연구진은 참가자 중 가난한 사람들은 빈곤과 관련된 염려·걱정에 정신을 쏟게 되면서 다른 업무를 할 수 있는 여력을 뺏긴다고 설명했다. 인지능력을 판단하는 뇌는 일정한 공간을 갖고 있는데, 이 공간에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걱정이 들어서게 되면 그만큼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머리를 쓰지 못하는 셈이다. 물라이나단 교수는 "가난한 사람들의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유전적인 것이 아니라 가난 그 자체의 문제로 발생하는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인지능력 감소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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