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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책보기] 촛불혁명과 개혁의 자세

주둥룬의 ‘장거정 평전’

(서울=뉴스1) 최보기 북 칼럼니스트 | 2017-08-02 08:01 송고 | 2017-08-02 08:07 최종수정
© News1

가객 김수희가 부르는 유행가 ‘정거장’은 익숙해도 장거정(張居正)은 낯설다. 조선 초기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 아래 6조 판서를 두루 거치며 왕국의 기틀을 다졌던 서거정(徐居正)과는 이름의 한자가 똑같아 언뜻 헷갈린다. 낯선 장거정은 중국 명나라 말기 신종 때의 아주 유명한 개혁가였다.

연산군의 폭정과 적폐를 개혁해야 할 임무를 지니고 19세에 왕에 오른 중종은 그러나 박원종, 성희안 등 반정공신들의 훈구세력에 갇혀 반쪽의 왕권밖에 행사할 수 없었다. 연산군 때 좌의정 신수근의 딸이라 해서 조강지처 왕비 신씨를 궁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중종이 23세가 되던 해 29세의 신진 사림학자 조광조를 만났다.

조광조는 무오사화 등으로 선배 사림학자들의 씨가 마르는 통에 젊은 나이에 사림의 중심으로 떠오른 풍운아였다. 중종은 성종의 치세를 거울삼아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조광조 중심의 사림세력을 키웠다. 조광조는 당시의 모든 부(땅)를 움켜지고 있던 훈구세력에 대항해 그들이 정당하게 세금을 내도록 과세제도부터 뜯어고쳤다.

그러나 모든 개혁에는 반드시 수구세력의 저항이 따른다. 개혁가 조광조의 10년은 ‘왕권강화’의 동상이몽을 추구했던 중종의 숙청(기묘사화)으로 물거품이 돼버렸다. 이 개혁의 실패가 선조 대 임진왜란의 단초가 됐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한명기 외 17인이 쓴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 참조).

조광조의 단명 후 6년 뒤인 1525년에 태어난 장거정의 삶은 영락없이 조광조를 닮았다. 차이라면 조광조가 현실개혁을 위해 먼저 사림세력의 확장을 꾀했다가 기득권층 훈구세력의 역공에 말려 좌절했던 반면 장거정은 ‘사직을 위해 개인적인 것은 모두 포기’하는 명분으로 힘을 얻었기에 그가 죽자마자 신종의 돌연한 복수로 개혁정책들이 원점회귀 했다는 점이다.

장거정 사후 매관매직으로 벼슬에 오른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명나라는 망국의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그나마 양반층 세법개혁, 황하·회수·장강의 치수(治水)정책, 적폐청산 등 장거정의 국정개혁이 폐국을 70년 연장 했음은 물론 이후 중국의 정치, 경제의 기본 틀을 바꾸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장거정이란 인물 중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모든 국정의 개혁을 '만기친람'(임금이 온갖 정사를 친히 보살핌)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례로 그는 자신이 치수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을 쿨하게 인정하며 전문가 반계순에게 문제 해결을 일임함으로써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촛불혁명을 이어받아 적폐청산과 국정개혁을 서두르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정부의 중요 인사라면 ‘장거정 평전’의 ‘장거정’을 심도 있게 만나 볼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가 필요한지, 개혁에는 어떤 식으로 저항이 따르고, 그 저항을 물리치는 비법은 어디에 있는지를 고민해 보라는 것이다. ‘오직 국민만 보고 간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어서다.

◇장거정 평전/ 주둥룬 지음/ 이화승 옮김/ 더봄/ 1만7000원


unga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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