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살면서 공황장애가 사라졌어요"
[경향신문] ㆍ서울 ‘한 지붕 세대 공감’ 정책에 독거 어르신·청년 ‘웃음꽃’
“정말 가족이 필요했어요. 내가 살아 있는지 들여다봐줄 사람요.”
대학원생 전세은씨(32)에게 이선재 할머니(73)와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경기 수원에서 함께 살던 가족이 지방으로 이사가면서 혼자 남게 된 전씨에게 혼자살이는 감당하기 버거웠다. 교통사고를 당해 6개월간 꼼짝없이 집 안에만 누워 있던 적이 있는가 하면, 세들어 살던 원룸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떼인 일도 있었다. 악재가 이어지면서 전씨는 공황장애를 겪었다.
연극배우이기도 한 그는 무대에서 웃을 수도 대사를 하기도 힘들었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도 탈 수 없었다. 혼자 방 안에 누워 있으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던 때, 이 할머니를 만났다.
‘남남’인 전씨와 이 할머니가 함께 살게 된 것은 지난해 11월. 서울시의 ‘한 지붕 세대 공감’에 참여하면서다. 한 지붕 세대 공감은 어르신과 대학생이 주거공간을 함께하는 사업으로, ‘공유도시’를 표방하는 서울시 주거정책 중 하나다. 어르신이 집 안의 빈방을 내어주면 학생은 주변 시세의 60% 수준의 임차료를 내고 말벗이나 간단한 심부름을 한다. 6개월 계약으로 시작해 연장도 가능하다. 빈방이 1개 이상 있는 60세 이상 어르신과 대학 및 대학원 재·휴학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2014년 초부터 2017년 7월 현재까지 총 526가구 593명의 학생이 이 사업에 참여해 새 가족을 만났다.
지난 28일 오후 서울 광진구 능동의 한 빌라에서 만난 전씨와 이 할머니는 다정한 친할머니와 친손녀 같은 모습이었다. “젊은 시절 남편과 사별하고 교직생활을 하며 혼자 3남매를 키웠어요. 자식들이 다 장성해 독립해 나가게 되니 허전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 그때 전씨를 만났다. 할머니에게도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이다.
변화가 찾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씨는 할머니와 살며 자신감을 되찾았다. 지난해 12월부터 다시 연극활동을 시작했고, 올 초부터는 학교 조교 일도 하게 됐다.
변화는 이 할머니에게도 찾아왔다. “한번은 내가 전동휠체어랑 충돌해 119를 타고 응급실에 가야 하는데 당장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세은이밖에 없었어요. ”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생활습관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밥을 해놓고 기다리는데 밥을 안 먹으면 그렇게 속이 상하더라고.” “전 세끼를 다 챙겨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할머니는 세끼를 꼭 다 챙겨드시거든요.” 하지만 식사를 함께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자 갈등도 사라졌다.
공간을 공유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이 할머니는 전씨가 있어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방 3개짜리 빌라(69.73㎡)를 뜨끈하게 데우려면 난방비 30만~45만원이 드는데, 세은이가 있어서 지난겨울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어요.” 전씨도 할머니 집에 들어오면서 생활비가 절반으로 줄었다.
함께 생활한 8개월의 시간 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무엇인지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전씨는 “혼자 살면서 너무 외롭고 힘들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낸 평범했던 일상 자체가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전씨는 이 할머니의 집을 나왔다. 누수 문제로 곰팡이가 생기는 등 방 상태가 악화되면서다. 이 할머니의 집을 나와 선택한 곳 역시 한 지붕 세대 공감에 참여하고 있는 또 다른 공유주택이다. 그는 “타인과 함께 살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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