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다큐를 사랑했던 두 PD의 죽음

2017. 7. 3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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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고 박환성·김광일 PD의 마지막 재구성…
제작비 부족해 직접 밤운전 하다 사고

한국교육방송(EBS)의 간판 프로그램 <다큐프라임> 촬영을 떠났던 두 명의 PD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하나의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 발생한다는 수많은 전조가 그 죽음 뒤에 꼬리처럼 붙어 있다. <한겨레21>은 고인이 된 박환성 PD가 마지막으로 남긴 자료 파일을 입수해 분석했다. 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우종범 사장을 비롯한 EBS 관계자들, 이효성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내정자, 그리고 박 PD의 동료인 다른 독립PD들을 만났다. 이 죽음이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고 말하긴 힘들겠지만, 이 죽음에 책임 있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_편집자
한국에서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의 압도적 존재였던 고 박환성·김광일 PD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촬영을 갔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EBS로부터 제작비 갈취 협박을 당하던 두 PD는 밤운전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졌다.

2017년 7월8일 오후 2시30분

“행님 전 이제 출국합니다. 제가 나가 있는 동안 대처 부탁해요.”

투박한 말투, 그는 굳이 안 해도 될 당부를 한 번 더 했다. “그래, 잘 다녀와라.” 7월7일 밤 9시 고 박환성 PD는 지금까지 EBS와 주고받은 모든 자료와 녹취파일 전체를 선배 PD에게 넘겼다. 박 PD는 출국을 하루 앞두고 바쁜 와중에 꼼꼼하게 자료를 챙겨 보냈다.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예감한 것일까. 아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꼭 잘해내는 사람. 그것은 차라리 기질이었다.

자연 다큐멘터리는 실패의 기록이다. 숱하게 기다리고 찾아헤매다 끝내 실패하면, 그 연속된 실패마저 기록해둬야 다음 작업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일이다. 과정도 결과도 모두 준비의 연속이다. 언제 완성될지 모를 포착을 끊임없이 대비하며, 박환성 PD는 십수년의 삶을 꾸려왔다. “형님, 다시는 방송국이랑 작업을 못해도 이번에는 그냥 안 넘어갈 겁니다.” 그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EBS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싸움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 쳐놓은 착취와 불공정의 울타리 그 자체였다. 그는 이번에도 실패할 것을 알았을까, 아니면 그 실패마저 계산하고 시작한 걸까. 선배 PD는 몇 마디 덧붙이려다 말았다. 박 PD의 마지막 말은 “넵~^^”이었다.

7월14일 오후 4시15분

“이제 일어났어... 이제 나가 촬영하고 또 이동해... 이동이 많아서 운전 많이 할 거 같아... 청소하고 있겠네... 보고 싶다... 집이 걱정이네... 더우면 에어컨 켜고 있어.” “사랑해. 에어컨은 너무 많이 틀면 전기세 감당 안 될까봐. 더워서ㅠㅠ” “벌써 일주일 지났네... 이주일 남았는데... 아직 멀었구나... 이사는 일주일 남았네... 자기도 정신없겠네... 너무 보고 싶다.” “나도 보고 싶어. 언제 연락 올지 몰라 핸드폰 보고 있었는데 너무 졸려ㅠㅠ 문자 줘. 사랑해.” 고 김광일 PD가 마지막으로 아내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10살 딸과 8살 아들을 둔 부부의 대화였다. 아내는 다음주 홀로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의 더위를 걱정했지만, 아내는 전기요금 걱정에 에어컨을 잘 틀지 않았다. 대화 사이사이 서로 ‘사랑해’라는 말을 했다. 짧은 대화 속에 ‘보고 싶다’는 말이 네 번 나온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둘은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

7월15일 밤 9시13분

“무슨 일 있어? 연락이 없네ㅠㅠ” 김 PD의 아내는 꼬박 하루 넘게 남편의 연락이 없자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바쁘고 상황이 고돼도 하루에 한 번은 생사 확인을 하고 아이들의 안부를 묻던 남편이었다. 아내의 걱정은 사흘간 이어졌다. “배터리가 없느냐”고 묻고 “충전+오지 탐험이라 그러느냐”고 묻고, “힘들어서 그러느냐”고 또 물었다. ‘이번에는 이상하게 집에 가고 싶다’던 남편이었다. 방송일이 너무 비전이 없어 이번 작품만 하고 다른 일을 알아봐야겠다고 하던 남편이었다. 아내는 대답 없는 남편을 향해 “잘게~” “오늘은 정신이 없네” “태보 언니들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고 꾸준히 안부를 전달했다.

7월22일 밤 11시31분

남편을 데리러 가기 전날 밤, 김 PD의 아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밤 그는 대체 어디로 가려 했던 것일까.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 내가 만든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변할 수 있고 세상이 긍정적으로 바뀐다면 뭐든 할 수 있어! 나는 하나의 빛이 될 거야”라고 말하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왜 돌아오지 못하고 데리러 가야 할까. 데려온들 내 품에서도, 아이들 품에서도 그 사람은 떠났는데. 아내는 남편의 페이스북에 “너무 안타깝고, 아프고, 또 아프다. 춥고, 배고프고, 집에 너무너무 오고 싶었다던 당신. 나도 너무 애타게 그립다”고 적었다.

7월23일 오후 2시

한국독립PD협회 송규학 회장, 복진오 PD, 박 PD의 동생 박경준씨, 김 PD의 아내 오영미씨가 두 PD의 주검을 수습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다. 출국장에는 정의당 추혜선 의원이 함께했다. 엇비슷한 시각 EBS는 사옥에 분향소를 차렸다. 어린아이들을 두고 홀로 남편을 찾아 떠나는 엄마는 “시신 상태가 너무 많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막막했지만 애써 씩씩한 척했다.

7월27일 저녁 7시

예상보다 15분 늦은 시간. 수척한 얼굴의 사람들이 모이고 1시간쯤 지나자 비행기가 착륙했음을 의미하는 C에 불이 들어왔다. “아, 왔나보다.” 홍콩에서 들어오는 대한항공 KE614편. 지난 7월8일 출국했던 두 PD를 살아 있는 몸(體)이 아닌 혼(魂)으로 태우고 돌아오는 비행기였다. 모여선 이들은 그제야 낮은 탄식을 한숨으로 뱉어냈다.

7월27일 저녁 7시45분

박환성·김광일 PD의 영정을 마주한 한국독립PD협회 회원들.

“어, 저기 나온다.”

열리고 닫히기만 반복하던 게이트 문 뒤로 검은 정장에 하얀 장갑을 낀 사람들이 나타났다. 같은 비행기를 탔던 이들은 이미 모두 빠져나간 뒤였다. 검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들고 있던 김영미 PD가 급히 뛰어갔다. “더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짧고 건조한 제지를 거쳐 검은 물건이 게이트 안으로 전달됐다. 영정 사진이었다. 신원 미상자로 숨진 뒤 얼굴을 찾기까지 꼭 12일이 걸렸다.

고 박환성·김광일 PD는 한국시각으로 7월15일 새벽 3시45분(현지시각 밤 8시45분)에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대 차량은 BMW였고, 박 PD와 김 PD는 닛산 차량을 운전기사 없이 몰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동물 다큐멘터리를 찍는 사람들은 웬만해선 밤에 장거리 운전을 하지 않는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아프리카로 동물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가면 최소 7~8명이 한 팀을 이룬다. 연출 PD, 조연출 PD, 촬영감독, 촬영 보조, 작가, 현지 코디네이터, 그리고 운전사다. 두 PD는 베테랑이다. 하루 종일 야생동물을 기다리다 밤에 운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

두 PD는 가이드를 호텔에 남겨둔 채 번갈아 운전했다. 차량 뒷자리에선 먹다 남긴 햄버거와 콜라가 발견됐다. 둘은 끼니도 차에서 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 그랬을까. 공항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한경수 PD에게 물었다. “뭘 왜 그래요. 돈이 없으니까 그랬죠. 독립PD들이 해외 나가면 현지 가이드들이 깜짝 놀라요. 하나같이 국제 거지꼴이니까. 캐리어 끌고, 카메라 조명 장비 다 짊어지고. 그렇게 가서 ‘한국의 ○○○ 방송국에서 왔다’고 하면 다 안 믿어요. 걔네들 생각엔 그래도 방송국이라는데 그러고 올 리 없잖아요.” 두 PD가 가이드를 호텔에 남겨둔 이유는 누군가는 다음 일정을 챙겨야 다음날 다시 촬영을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두 PD의 죽음이 확인될 수 있었다. 다음 일정을 확정해야 하는 현지 가이드가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체크인하기로 했던 호텔에도 오지 않았다. 현지 가이드는 두 PD와 10년 넘게 일해온 사람이었다. 그들은 촬영을 펑크 낼 사람도, 연락을 안 할 사람도 아니었다. 직감했다. 가이드의 신고로 사고가 확인됐다.

7월27일 저녁 8시

랩에 싸여 도착한 두 PD의 짐.

김 PD의 아내 오영미씨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연신 눈가를 훔쳤다. 몇 개의 짐이 랩에 싸여 딸려 나왔다. 작품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감독들, 오늘의 현실에 질리지 않고 내일을 도모하려 했던 리얼리스트들은 커다란 트렁크 한 개와 백팩 2개, 3개의 카메라가방 꾸러미를 남겼다. 취재하는 기자는 많지 않았다. 그 흔하던 방송사 ENG카메라는 EBS에서 나온 딱 한 대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경수 PD가 말했다. “PD연합회장이 그러더라고. 외주제작사 문제를 지상파 정상화 과제에 넣겠다고. 내가 그건 아니라고 했어요. 방송사 정규직들이 말하는 지상파 정상화는 해고자 복직 아니에요. 고작 옛날로 돌아가보자는 거. 근데 그때도 우리는 마찬가지였어요. 해고자가 복직된다고, 지상파 뉴스가 좀 나아진다고 방송사와 외주사의 관계가 달라져요? 천만의 말씀이지.”

7월27일 밤 10시

김 PD의 두 아이가 상복을 입었다. 10살, 8살 남매가 검은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곤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독립PD 몇 명이 참지 못하고 꺼이꺼이 무너져내렸다. 8살 아들은 바지가 큰지 연신 허리를 추켜올렸다. 조금 의젓한 딸은 아빠의 사진에 절을 올렸다. 영정 사진 앞에 고개를 숙여 “아빠가 PD여서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박 PD의 마지막 파일을 넘겨받은 최영기 PD는 울부짖었다. “이건 적폐다. 동일 노동을 하고 있는 동일 노동자들이 신분에 따라 비정규직 PD들을 착취하는 거다. 박환성·김광일 PD가 어떻게 사고사야. 이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야. 내가 끝까지 싸울 거야. 내가 박 PD랑 약속했어.”

7월27일 밤 11시

박환성, 김광일 모두 맏아들이다. 1968년생 박환성은 결혼하지 않았다. 그의 동생이 맏상제를 맡았다. 박 PD 가족실에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오열이 터져나왔다. 흐느끼는 곡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미어지듯 이어졌다. 김 PD의 부인은 비정규직 방송작가다. 남편도 그녀도 너무 젊다. 김광일 PD의 아내는 누군가의 품에서 계속 울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딸은 우는 엄마의 까만 치마폭에 안겼다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린 아들은 장례식장 로비에서 놀잇거리를 찾았다. 한국독립PD협회 회원들이 자리를 잡고 내키지 않던 술자리에서 안부를 나누기 시작했다. 고 박환성 50살. 한국 자연 다큐멘터리의 독보적 존재. 인간과 동물의 접점에서 자연과 사람을 고민하던 저널리스트. 고 김광일 38살. 자연 다큐멘터리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던,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15년차 독립PD.

글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김지혜 교육연수생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빈소 찾은 방통위원장 내정자
“독립PD의 처지가 열악한 것을 잘 안다”
이효성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내정자가 유가족을 면담했다.
“독립PD들의 처지가 열악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에서) 할 수 있는 걸 해보겠습니다.” 이효성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내정자가 7월28일 오후 고 박환성, 고 김광일 PD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아직 정식 임명을 받지 않은 이 방통위원장 내정자는 수행비서 없이 오기현 한국PD연합회장 등과 빈소를 찾았다. 박환성 PD의 부모는 이 방통위원장 내정자에게 “우리 아들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제작비의 40%를 EBS가 삭감했다고 들었다. 이게 EBS뿐만 아니라 방송사 전체의 관행이라는데 프랜차이즈 본사 갑질과 무엇이 다르냐”고 말했다. 이 방통위원장 내정자는 “그런 관행을 들어 알고 있다. 아직 정식 임명이 안 된 입장이라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문제점을 잘 안다. 방송산업에서 콘텐츠 제작이 핵심인데, 외주제작사 처우와 독립PD들의 환경이 열악해 기술 축적이 안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학자 때부터 이 문제에 관심 있었다. 임명이 되면 꼭 챙겨보겠다”고 덧붙였다. 이효성 방통위원장 내정자는 이어 “독립PD들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방송산업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가신 분들의 삶을 계기로, 외주제작사 발전에 좋은 여건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유가족들은 “관행이라고 얘기하지 말라”며 “관심 갖는 차원이 아니라 독립PD의 처우를 꼭 개선해달라”고 요구했다. 기자들이 이번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묻자 “아직 임명되지 않아 대답하기 어렵다”며 즉답을 피했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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