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블라인드 채용땐 밥줄 끊긴다" 몰려나온 골목 사진관

이슬비 기자 2017. 7. 29.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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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없는 이력서 철회하라" 사진사 1000명 생존권 투쟁
"수입의 70%가 증명사진인데.. 사진관 줄폐업시킬 정책"
"골목상권 살리기에도 역행" 예상 못한 '생계 피해자' 나올 판

사진사 강문오(62)씨는 충남 논산에서 39년째 '한일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무작정 상경(上京)해 사진 기술을 배운 게 직업이 됐다. 암실에서 흑백사진을 인화하는 일만 3년을 했다. 5년간 필름 사진을 수정하는 법을 익히고서야 카메라를 잡을 수 있었다.

강씨는 요즘 평생 함께해 온 카메라를 내려놓을까 고민 중이다. 디지털카메라와 고성능 카메라를 장착한 스마트폰 때문에 동네 사진관이 어려워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강씨도 '컬러 사진' '디지털 인화' '포토샵' 등 사진 신기술들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배우고 익히며 지금껏 버텨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정부는 '스펙' 대신 능력 위주로 사람을 뽑겠다며 공공기관 채용 때 학력·출신지 등 개인 정보를 일절 보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을 하반기부터 추진한다고 했다. '외모'도 보지 말라며 증명사진을 지원서에 못 붙이게 했다. "증명사진 한번 찍고 1만5000원 받아 겨우 먹고사는데, 이력서에 증명사진을 쓰지 말라니요. 동네 사진관 다 죽게 생겼습니다." 강씨는 "증명사진마저 못 찍게 생겼으니, 마지막 밥줄마저 끊기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내려놓은 카메라… 삭발한 머리카락 - 한국프로사진협회원 1000여명이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로공원에서 정부의 ‘블라인드 채용’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공공기관 이력서에 사진을 못 붙이게 하는 정책이 여권·증명사진 위주로 영업하는 동네 사진관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성형주 기자

강씨는 28일 오전 전세버스를 타고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사진관 생존권 보장 집회'에 참가했다. 한국프로사진협회가 주최한 이날 집회에는 강씨와 비슷한 처지의 사진사 1000여명이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 이들은 '생존권 보장'이라는 빨간 띠를 머리에 두르고 "이력서 사진 부착 금지 철회하라" "사진관 말살시키는 정부는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들고 온 카메라를 무대에 내려놓고, 몇몇은 삭발을 했다.

서울 중곡동에서 58년간 사진관을 운영한 조규영(75)씨는 "우리 때는 가족사진을 찍고 액자도 맞추고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거의 없지 않으냐"며 "증명사진도 못 찍게 하면 후배 사진사들 생활이 안 된다"고 했다.

한국프로사진협회에 따르면 동네 사진관은 전국적으로 2007년 3만곳에서 올해 1만4000곳까지 줄어들었다. 10년 만에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협회 측은 "사진관의 수입 60~70%가 '증명사진 촬영'에서 나온다"는 입장이다. 취업용 사진으로만 한정해도 전체 40%의 수입을 차지한다고 한다. 육재완 한국프로사진협회장은 "전국 사진관 대다수가 증명사진에 생업을 의지하고 있는데 이력서 사진 부착이 금지되면 동네 사진관은 줄줄이 폐업할 것"이라고 했다. 이재범 협회 비상대책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골목상권 살리기'에도 역행하는 정책 아니냐"며 "블라인드 채용 제도를 전면에서 재검토해 달라"고 주장했다.

이날 집회에는 가업을 물려받은 젊은 사진사도 여럿 참가했다. 사진관을 운영했던 아버지를 따라 2년 전 경남 창원에 사진관을 차린 전웅배(28)씨는 "블라인드 채용 정책이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에겐 좋을지 몰라도 나 같은 청년 창업자에겐 청천벽력 같았다"고 했다. 전씨는 "휴대용 사진 인화 기기도 워낙 잘 나오니, 사람들이 증명사진 말고는 사진관 찾을 일이 없었는데…"라고 했다. 광주대 사진영상학과 2학년인 정유나(20)씨는 "외할아버지, 어머니에 이어 3대째 사진관을 하려고 공부 중인데 사진관들이 문 닫을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흑백사진관, 필름 사진관 등 남들과 차별화한 사진관으로 바꾸는 곳도 있다. 서울 강서구의 한 사진관 대표는 "가족사진, 증명사진 촬영을 주로 했는데 손님이 떨어져 요새는 '포토앨범 제작' '반려견과의 사진'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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