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이마 혹까지 그리는 정직성,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DNA죠"

2017. 7. 2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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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nterview 이성낙 가천의대 명예총장

조선 초상화에 심취한 별난 의사의 2막

의료인, 그리고 미술 전문가. 의료인으로서 40여 년 외길을 걸었던 이성낙 가천대학교 의과대학 명예총장의 명함에는 두 가지 직함이 적혀 있다. 조선 초상화에 꽂혀 70세가 넘은 나이에 생애 두 번째 박사학위까지 따낸 그의 열정은 의사로서의 전반부 삶을 뛰어넘을 정도다. 
배현정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7월 한낮 뙤약볕이 내리쬐는 미술관 외부에서 진행된 사진 촬영에도 팔순의 노학자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도슨트   (소정의 지식을 갖춘 안내인)’ 활동으로 빈번하게 찾는 곳이건만 야외에 설치된 조형물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설렘과 경이로움이 가득했다.

베체트병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진 이성낙 가천대학교 의과대학 명예총장. 연세의대 피부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아주의대 학장과 가천의대 총장을 역임했다. 의사로서 이미 최고의 명성과 활동을 펼쳤던 덕분일까. 그는 퇴임 무렵, 개원에 대한 미련 없이 휴식을 택했다. “앞으로는 즐기며 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팔순에 이른 지금도 그를 호출하는 곳이 끊이지 않는다. 달라진 것은 분야다. 문화 관련 칼럼을 쓰고, 도슨트 활동을 하며 미술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의사로서 40여 년간 한번도 TV에 출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술(초상화)과 우리 문화를 알릴 수 있다면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다. 

외국인과 예비 의사들을 위한 ‘우리 문화 길라잡이’

“일본의 지붕은 ‘직선’이 특징입니다. 중국의 지붕은 하늘을 찌를 듯 화려하고요. 정원도 그래요. 중국의 정원은 부(富)를 앞세우고, 일본의 정원은 가위로 손질한 인위적인 꾸밈이 눈에 띄죠. 반면 우리는 자연 그대로의 조화를 중시하고 소박해요.”

이 명예총장에게 ‘인생 2막’은 재능 기부의 시간이다. 문화 전도사로 나섰다. 주한 대사부부와 함께 미술관 투어를 하는 등 한국 문화와 거기에 깃든 역사를 알리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이 크게 늘고 있지만, 우리 문화를 깊이 접하고 이해할 기회는 여전히 드물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중국이나 일본 문화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고 했다.

도슨트 활동의 다른 한 축은 그의 제자이자 후배인 의과(간호)대학생들이다. 의학과 예술. 언뜻 보면 거리가 먼 학문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 명예총장의 생각은 다르다. 대학 교수로 재직할 당시에도 학생들에게 “그림 보러 가고, 음악회 가고, 병원 가서 청소하라”고 가르쳤던 ‘별난 교수’로 알려져 있다. ‘의사 국가고시에 혹여 저조한 성적을 받지 않을까’ 하는 반대의 목소리도 적잖았지만, 예술적·인문학적 교육을 포기할 순 없었다.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 공부만 하느라 미술관 한 번 제대로 가본 적이 없는 학생들이 많아요. 한국 교육의 큰 맹점이죠. 의학은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의료 활동에 인문학적 바탕이 없으면, 의료 기술이 돼 버려요. 인술을 펴는 의사가 돼야지, 의료기술자가 되면 안 되잖아요.”

제자들과 함께 미술관을 돌며 예술의 길로 안내하는 것을 일종의 ‘사명’으로 느낀다. 10명 중 1명이라도 예술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는 “미술관 투어를 처음 경험했던 학생이 수년 뒤 ‘해외에 나갔을 때 미술관을 다녔다’는 얘기를 듣고 기뻤다”고 말했다.


70대 ‘미술사’로 생애 두 번째 박사학위

2014년에는 미술사로, 생애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명지대에서 미술사 석·박사 과정을 전공하고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병변’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냈다. 독일 뮌헨의대에서 박사학위(1969년)를 받은 뒤 40여 년 만의 값진 학문적 결실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의 만학(晩學), 그 시작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에서 공부할 당시 ‘예술품에 나타난 피부 증상’이란 특강을 들으면서 새로운 시각에 무릎을 쳤다. 이후 의사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미술관을 다닐 때마다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해 왔다. 그때만 해도 좋아하는 예술 자료를 모은 것이지만, 막상 퇴임을 하고 보니 이러한 자료를 혼자만의 지식으로 남겨 두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대학원에 가서 직접 연구해 보라는 지인들의 조언에 힘입어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70대의 공부가 젊은 날처럼 쉬울 리 없었지만, 강의 시작 전에 제일 먼저 교실에 가고, 강의가 끝나고 가장 뒤에 나오는 성실성을 보였다. 이 명예총장은 “주변에서 전직(총장)이 뭔지 다 아는데 설렁설렁할 수 있었겠냐”고 웃는다.

“미술사 공부는 너무나 잘한 거예요. 책에서, 미술관에서 본 것이 강의를 들으면서 정리가 됐어요. 또 몇 년 동안 같은 연구를 하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선시대 초상화 500여 점을 분석하면서 그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을 분석했는데, 나중에는 ‘왜 우리나라 초상화에만 유독 피부병이 이토록 많이 보일까’ 문화사적 측면을 보게 됐습니다.”

그의 연구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조선시대 초상화 519점 중 83%에서 피부병이 발견됐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살짝 곰보였고, 우의정을 지낸 오명항 선생은 간경화를 앓은 듯 얼굴빛이 검었다.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에선 이마에 혹이 보였다.

“곰보는 곰보대로, 사시는 사시대로 그린 겁니다. 만약 초상화에 담긴 높은 분들이 ‘왜 이렇게 혹까지 그려’ 했다면 그런 묘사가 가능했을까요? 저는 그 초상화에서 ‘정직함’을 봤고, 선비정신을 읽었습니다.”

<승정원일기>에는 ‘터럭 하나도 다르게 그리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기록이 있다. 높은 신분이라고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올곧게 표현한 강직함의 근원이 선비정신이다. 중국, 일본 혹은 서방 세계 어디서든 찾기 어려운 ‘정직함’을 추구하는 DNA가 한국인에게 내재돼 있다.

조선시대 500년을 관통한 ‘선비정신’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뜻이다. 이 명예총장은 “우리 사회가 잊고 지냈던 선비정신을 다시 상기한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되찾을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오늘날 정치인들은 거짓말하고 사회는 혼란스럽잖아요. 그러나 저는 잠시 지나가는 과도기라고 봐요. 혹자는 한국 사회와 한국 사람이 정직하지 않고 부패됐다고 하나, 어느 시대 어느 국민에게나 부패는 있었죠.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정직함을 추구했던 맥이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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