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유안진 "詩, 人生의 압축.. 문학독서는 '진짜'를 얻는 것이죠"

장재선 기자 2017. 7. 2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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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시인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신을 섬기는 우주적 자아”라고 했다. 지난 24일 오후 서울 중구 문화일보 옆 농업박물관 정원에서. 신창섭 기자 bluesky@

유안진 시인·예술원 회원

시집 표지 안쪽에 붓펜으로 멋스럽게 흘려 썼다. ‘소납(笑納)’. 변변치 않은 물건이지만 웃으며 받아 달라는 뜻이다. 요즘 보기 드문 활판(活版) 인쇄 시집이니 변변치 않은 게 아니다. 그 속에 든 내용은 어떤가.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반세기 동안 시대를 물들여 왔던 문채(文彩)로 빚은 시작품의 정수를 모아 놓은 것이다. ‘세한도 가는 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며 서울대 명예교수인 유안진(76) 시인의 시선집이다. 시인은 지난 24일 오후 인터뷰를 위해 문화일보로 오면서 가방을 두 개 갖고 왔다. 한쪽 가방에는 시집들이 들어 있었다. 활판 시선집뿐만 아니라 작년에 나왔던 시집 ‘숙맥노트’도 거기에 들어 있었다. 이번 인터뷰를 함께한 신창섭 사진부 부장과 인지현 문화부 기자에게 줄 것도 있었다. 아담한 체구의 노시인이 무거운 가방을 손수 들고 온 게 황감했다. 더욱이 시인은 최근 여름 감기를 앓았던 탓에 기력이 부친 상태라고 했다. 그러나 3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꼿꼿한 자세를 풀지 않았다. 결곡한 이미지 그대로 차분하면서도 강단 있게 자신의 뜻을 표했다. 겸허한 말투를 시종 유지했으나, 문인으로서의 자존을 표하는 것에는 거침이 없었다. 경북 안동 유가(儒家) 출신이라는 게 절로 떠올랐다.

일제강점기 말에 태어난 그는 안동에서 보낸 유년 시절에 대해 “조선 시대 후기 분위기에서 자랐다”고 했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엄격할 뿐만 아니라 남존여비(男尊女卑)가 철저했던 고장이었다. 세 딸 중 첫째였던 그는 대를 이을 수 없는 자식으로서의 한(恨)을 안고 자라야 했다. 그런 아픔을 준 고향은 문학적 토양이 돼 주기도 했다. 남자 어른들은 한시(漢詩)를 읊고 아낙네들은 내방가사(內房歌辭)를 짓는 분위기에 젖어 살았다. 그의 시 작품의 주조(主調)가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는 한편 동양의 기품을 품고 있는 것은 고향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그의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기저에도 유가의 중용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조선 후기 분위기에서 자랐던 그는 이제 디지털 시대를 맞아 노년의 삶을 다스려 가고 있다. 그를 만난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우리 사회를 휩쓸고 간 정치의 격랑이 좀 가라앉은 시점에서 우리네 삶을 깊고 넓게 성찰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요즘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독서와 시작(詩作)을 하는 한편 각 지방자치단체와 관련 기관의 초청에 응해 문학 강연을 하고 있다.

―‘삶,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시, 거짓말로 참말하기이다’. 이게 최근 강연 제목이던데요, 요즘 사람들은 세상에서 한 번 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공포가 있습니다.

“그런 공포를 갖고 사는 것도 좋은 거예요. 이기려고 하면 도로 집니다. 그래서 져주는 게 그 사람으로부터 내가 상처를 안 받는 것이 되는 거죠. 스트롱 에고(strong ego)가 되는 것. 제 아들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상대방이 팍 치면 그냥 맞고 져 줘라. 그 사람이 손을 떼자마자 ‘네 손만 아팠을 거야. 난 상처 안 받았어’, 그런 자신감을 키우면, 지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죠.”

그는 성장기에 어머니로부터 늘 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컸다고 했다. 왜 나는 항상 져야 하는지, 그는 그게 불만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삶의 숱한 경험을 통해 지는 게 이기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니 사르트르가 그런 말을 했더군요. ‘지는 것으로 이기는 자가 예술가다.’ 제 어머니가 사르트르보다 훨씬 더 실존적인 철학가였던 거지요. 예술은 거짓말로 참말을 하는 것입니다. 기교로, 예술적 장치로 거짓말을 하니까요. 저는 ‘거짓말로 참말하기’라는 시집을 냈어요. 그런데 피카소가 ‘정치가는 거짓을 위해 참을 말하고, 예술가는 참을 위해서 거짓을 이야기한다’고 했더라고요. 제가 혼자 고민해서 찾은 것인 줄 알았는데, 이미 말한 사람들이 있으니 저의 깊이가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되돌아보며 좀 철이 들었지요.(웃음)”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지만 문학은 패자의 기록이라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역사는 햇볕에 있는 것이지만 문학은 달빛에 있는 것입니다. 승리의 역사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많이 희생됩니까. 문학은 숨겨진 진실, 희생, 억울함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역사는 나선형으로 발전하니까 반복되는 부분이 있어요. 제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보면, 역대 정권이 전 정권의 잘못을 반복하고 또 정적에 대한 보복을 똑같이 했어요. 결국 국민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것이죠. 그 희생을 먹고 몇 명이 잘 누리며 살았지만, 역사 기록을 보면 그게 이기는 게 아니라 결국 지는 거예요. 조선 시대 문인들은 정치 권력에서 물러나 있을 때, 비로소 학문과 예술로 역사에서 살아남았어요. 퇴계(이황)와 율곡(이이), 송강(정철)이 다 그랬잖아요.”

―이 바쁜 세상에서 허구인 소설, 시 작품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 의문 때문에 지식인 중에도 실용서만 읽는 이들이 많습니다.

“문학 독서는 진짜를 얻는 거예요. 시와 소설은 사람됨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세상을 다양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며 인생을 진짜로 이해하게 해줍니다. 제가 교육심리학을 연구했는데, 인간의 성장에 대해 수천 년간 탐구해 온 것이지요. 그 관점에서 보면 시는 인생을 압축한 것입니다. 언어경제학적으로 인생을 표현한 것이지요. 시를 쓱 읽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눈깔사탕처럼 빨고 껌처럼 씹으며 왜 이렇게 썼을까, 고민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문학 체험을 자세히 밝혔다. ‘단아한 내적 아름다움의 시인’으로 알려진 그의 문학 세계 들머리에 복수심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무척 흥미로웠다.

그는 중학교 때 안동을 떠났다. 대전에 자리 잡고 있던 외숙부를 따라서 가족이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온 저는 사투리를 쓰고 공부도 못 하니 존재감이 없었지요. 그때 어떤 아저씨가 리어카에 헌책을 싣고 다녔는데, 거기서 책을 빌려다 읽었어요. ‘소월시초’라는 책은 껍데기가 떨어져 나간 얇은 것이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거기 ‘산유화’라는 시가 있지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 여기서 갈은 가을의 사투리라는데 왜 시에서 촌스럽게 사투리를 썼을까, 그리고 왜 계절의 순서를 봄이 아니라 가을부터 썼을까. 그때 선생님께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이 가만히 계시더니 ‘소월이 그렇게 쓰고 싶었으니까 그랬겠지’ 하며 시덥지 않은 질문을 하냐는 식이었어요. 그래서 1~3학년 문예반 시간에 애들이 다 웃어버렸지요. 그때의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보복하고 싶었어요. ‘내가 시인이 돼 당신 앞에 나타날 테니까 두고 봐라.’ 일기를 쓰면서 혼자 맹세를 했어요. 학교 운동장을 돌다가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다가 또 맹세하고….”

복수를 다짐했던 여중생은 대전호수돈여고에 진학해 공부를 열심히 했고, 서울대 사범대에 진학했다. 5·16 군사정변으로 휴교했을 때, 청계천 헌책방에 들렀다가 잡지 ‘현대문학’ 과월호에서 박목월 시인을 접했다. 고교 때 백일장에 나갔다가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목월의 칭찬을 들었던 게 생각났다. 대학 3학년 봄이었다. 목월에게 편지를 썼는데, 엽서 답장이 왔다. 그동안 쓴 시 작품을 갖고 한번 찾아오라고.

시단의 거목이었던 목월은 당시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서울사대 재학 중이었던 문청은 그의 엽서를 받고 한양대로 찾아갔다. 그 첫 만남에서 그는 목월로부터 ‘숙맥’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이 저를 옛 화신백화점 뒤쪽에 있는 이문설렁탕 집에 데리고 가셨어요. 거기서 설렁탕을 시켰는데, 선생님이 소금 그릇을 끼고 드셨어요. 제가 그 소금 그릇을 밀어 달라고 못 하고 맹설렁탕을 먹었어요. 그걸 보고 선생님이 ‘숙맥이니까 시는 곧잘 쓰겠다’고 하셨어요. 녹두와 보리를 구분 못 하는 숙맥. 제가 나이 들어서 깨달은 것은 문학은 숙맥의 이야기라는 거예요. 약삭빠르지 않고 미련스러워야 문학을 하거든요. 제가 그래서 작년에 시집을 내며 ‘숙맥노트’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바보 노릇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한 것인데, 이게 김달진문학상을 받았지요.”

―젊은 시인들이 추구하는, 이른바 난해 시가 요즘 문학계에서 각광 받습니다. 이 때문에 독자들이 시를 멀리한다는 시각도 있지요.

“기존 시 틀에 저항하는 건 좋습니다. 청년기에 그런 저항도 안 해 보고 객기도 안 부리고 인간이 어떻게 성장합니까. 그런데 그게 내 것은 아닙니다. 이미 시기가 지났지요. 내가 미래파나 여성주의 흉내를 낼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는 것이죠. 주름살 없애려고 보톡스를 맞으면 내 얼굴이 아니잖아요.”

―선생님 작품은 동양의 정서와 서양의 기독교 정신이 함께 있다는 평을 듣는데, 그게 삶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증조할아버지가 만세를 부르다 돌아가셔서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빨리 장가보내서 아들이 쑥쑥 나오면 집안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하셨지요. 어머니가 저를 외가에서 낳았는데, 외가는 아들 낳을 기를 보존했다고 좋아했고 친가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어머니가 제 밑으로 남동생 두 명을 낳았는데 다 돌 전에 죽었습니다. 그다음에 여동생이 태어나고 또 아들이 나왔는데 또 죽었어요. 아버지는 결국 밖에 나가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머니 평생의 억울함이 아들을 못 낳은 탓이었고, 그로 인해 제 평생도 시달렸지요.”

그는 미션스쿨에 다녔던 고교 3학년 때 성경을 통독하며 기독교 정신을 체화했다. “대학에 떨어지면 오갈 데 없이 시집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저를 시집보내고, 대를 잇기 위해 아버지는 새 장가를 보낸다고 그랬거든요.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성경을 통독했고, 그 자신감으로 서울대에 원서를 넣었어요.”

―개신교 쪽에서 가톨릭으로 온 계기는 무엇입니까.

“남편이 서강대 교수가 되면서 거기서 가톨릭 신부를 만나 굉장히 감동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는 남편 이야기를 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좋은 모양이었다. 그의 남편은 교육행정학자 김윤태 교수로 지난 2014년 타계했다. 부부의 금실이 유난히 좋았던 만큼, 그는 이후 남편에 대한 시를 여러 편 지었다.) 신부께서 음식을 밥풀 하나 안 남기고 드시면서 월급을 사제관에 반납하는 모습을 본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한 번도 미사를 강요한 적이 없다고 했죠. 가톨릭 대학인데 우리 무속인 굿을 박사 학위 주제로 잡아도 된다고 했어요. 남편이 가톨릭 세례를 받겠다고 해서 제가 6개월 기도를 했어요. 제가 한 사람 구원하기 위해 양보를 하느냐. 마침내 예수께서 ‘건넌방 안방이 다 너희 집이듯이 교회나 성당이나 다 네 집이다’라고 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지요.”

―대학교수로서 학문을 하면서 문학을 한다는 게 힘들지 않았습니까.

“보통의 남성들보다 세 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분들은 집에서 밥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웃음) 저는 본래 신장 쪽이 좋지 않았는데, 술을 먹지 않았던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듯해요. 시아버님도, 남편도 신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술을 너무 즐겼던 탓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이라서 차별을 많이 겪으셨는데, 요즘은 사회 분위기가 좀 달라지는 듯합니다.

“시에도 여성주의 시가 있지요. 저는 웃긴다고 했어요. 여성주의, 여성학이란 게 따로 있나요. 이름 있고 성공한 여성들을 모아서 여성학이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체험적으로 여성학을 하면서 성장한 사람이에요. 하나도 차별 안 받고 공주 대접받은 사람들이 여성학을 한다니…. 학문에, 시에 여성 남성이 어디 있습니까. 내 작품에 대해 여성 시의 섬세함이라고 하는 건 평론가가 하는 말이에요. 남성인 소월의 시에는 여성보다 더 섬세한 게 있잖아요. 저는 손녀에게 치마를 입히지 말라고 며느리에게 당부했어요. 굳세고 담대하게 자라도록 거친 운동을 시키라고 했어요. 여자아이를 예쁘게 키우려고 원피스를 입히는 것은 엄마의 보상 심리일 뿐이에요.”

―막내따님을 월부로 낳으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아 그거(웃음), 그때 36세였는데 당시엔 노산이었어요. 한국교육대학원 책임연구원으로 있었는데 돈이 없었어요. 저희 직장과 연계된 병원이니 월부로 병원비를 내기로 한 것이지요. 첫아이는 옛날에 고려병원이었던 저기(문화일보 건물 창문으로 바라다보이는 강북삼성병원을 가리키며)에서 낳았어요. 그때 봉천동 달동네 17평(56㎡)짜리 집에서 살았어요. 연탄은 돈을 더 줘야 배달이 되고 수돗물은 1주일에 두 번씩 나오는 집이었지요.”

―요즘 청년들은 취직이 안 되니 결혼을 꿈꾸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가난해도 희망이 있었지만 이 시대는 미래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요.

“예전에도 가능성은 하나도 안 보였습니다. 뭐가 있어서 결혼한 게 아닙니다. 방 한 칸 사글셋방에서 시누이랑 시동생이랑 같이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결혼해서 애 낳고 다 했습니다. 지금은 물질적인 조건을 앞에 내세우니 결혼을 기피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환경을 우선시하고, 인생을 뒷전으로 순서를 바꿔버린 거지요. 삶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다음에 경제적인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문학과 예술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시뿐만 아니라 수필도 교과서에 오를 정도로 수작이 많습니다. 그런데 시인으로 불리기만을 고집하는 것은 수필을 낮춰 보기 때문이 아닌가요.

“저는 수필을 부업으로만 썼어요. 수필을 진짜로 잘 쓰는 분들은 따로 있죠. 이양하 선생님처럼. 저는 신문사에서 칼럼 청탁을 해 와서 썼는데, 그게 알려져서 회사의 사보 등에 글을 많이 게재하게 됐습니다.”

그가 1986년에 펴낸 수필집 ‘그리운 말 한마디’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폭정의 시대에 대중 독자들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줬기 때문이라는 게 후일 평자들의 분석이었다. 이듬해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직장인, 가정주부, 재수생 등의 일상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이 큰 공감을 얻었다. 대중적으로 각광을 받은 만큼 문학계 내부에서는 시인이 잡문에 신경을 쓴다며 비쭉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평가받는 에세이를 꾸준히 써냈다. 학생들의 책받침에 등장했던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대표적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그는 이 작품이 땜통 원고였다고 했다.

“어느 날 저녁을 짓고 있는데, 부엌에 있는 전화가 울렸어요. 잡지 ‘문학사상’인데, 15장을 써서 빨리 넘기라는 거예요. 누군가 원고를 펑크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땜통 원고죠. 그 잡지에서 처음 청탁을 받았으니 설레는 마음으로 밤새워 썼어요. 아침에 출판사에 가서 문 밑에 원고 봉투를 집어넣고 직장인 서울대에 출근했지요. 그게 제 글 중에서 가장 장수하고 있어요. 이제 보니 뒷부분으로 가면 좋은 글귀가 많더라고요. 지금 쓰라고 하면 그렇게 안 썼을 거예요. 글에도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거 같아요.”

―사이가 좋았던 친구와 틀어진 경험이 있나요. 문학계에서는 그런 일이 많은데.

“물론 있지요. 그런데 친구가 없으면 얼마나 외롭습니까. 져주고 이기는 게 좋지요. 친구는 부모, 자식과 안 되는 나눔이 가능하잖아요. 향기나는 관계를 가꿔가야지요. 문학계에서도 친구가 시기, 질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냥 져주는 거죠. 입장을 바꿔 보면 나도 그랬을 테니까.”

―문학상 상금을 기부하신다면서요.

“후후, 그게 제가 야비한 거예요. 문학상이 저에게 하도 안 오니까 하나님께 기도를 했어요. 상을 받으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래서 상을 받았을 때 제 고향 안동의 재활원에 상금을 다 보냈어요. 그랬더니 적자예요. 심사위원분들이나 친구들에게 밥을 사다 보니까. 그래서 부대 비용을 빼고 보내겠습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상금을 한 번도 제가 쓴 적이 없어요. 약속한 걸 지켰지요. 제 남편이 그러더군요. 돈으로 하나님을 매수한다고. 필요하면 우주를 수천 개 만들 수 있는 분이 제 돈을 필요로 하겠어요?”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누구나 시를 즐기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다시 피력했다.

“시는 특정 시인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쉴 수 있는 안락의자입니다. 곳곳에 시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책상에 시집 몇 권씩 올라와 있어서 삶의 여유를 좀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시가 누구의 소유물이 아닌 모든 국민이 향유할 수 있는 쉼의 도구가 돼야 합니다. 화장실에 가서 손 씻으며 떠올리고, 편한 의자에 앉아 생각해 볼 수 있는.”

인터뷰 = 장재선 문화부장 jeij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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