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반지하 사는 것도 서러운데"..폭우에 상처 준 공무원

김기태 기자 입력 2017. 7. 28. 14:15 수정 2017. 7. 2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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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수 신고하니…어느 공무원 "반지하 사는 분이 알아서"

● 폭우가 쏟아진 7월 23일, 시흥 반지하 주택에선 무슨 일이…

지난 23일 오전, 수도권 전역에 물 폭탄에 가까운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특히 경기도 시흥시는 시간당 최대 96mm에 달하는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시흥시 신천동에 있는 한 다세대 주택 반지하 집에는 오전 9시부터 빗물이 들어차기 시작했습니다. 대문을 통과한 빗물은 문과 창문을 통해 흘러들었고 화장실 변기와 세탁실에선 하수가 역류했습니다. 이 집에 사는 49살 조 모 씨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습니다. 하수가 역류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마치 분수처럼 쏟아지는 걸 보고선 집 앞 지하 하수도관에 설치된 '역류방지시설'이 고장 난 걸 알게 됐습니다.
 
이러다 집 전체가 잠길 것 같다고 생각한 조 씨는 오전 10시쯤, 시흥시청에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수가 역류하고 있으니 역류방지기를 수리해 달라."는 도움 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담당 공무원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이랬습니다. 다음은 조 씨와 담당 공무원의 통화 내용입니다.

담당 공무원 : "역류방지기는요, 개인이 관리를 하셔야 될 내용이지 우리가 터치를 해주고 그런 게 아니에요."
조 모 씨 : "그 역류방지기를 개인이 그러면 맨홀을 어떻게 열어야 되는 거죠?"
담당 공무원 : "맨홀 뚜껑을 아주머니들이 힘들면 아저씨들을 불러서 열 생각을 하시고."

역류방지기는 하수도관에 설치돼 있는데 수리하려면 무거운 맨홀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장비가 없으면 맨홀 뚜껑 자체를 열 수 없을뿐더러, 기술이 없는 일반 시민이 고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이라 사설 수리 업체를 부르는 것도 당장은 힘든 상황. 조 씨는 재차 도움을 요청했고, 담당 공무원은 “역류 방지기의 관리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담당 공무원 : "시가 그거 유지 관리할 필요나 어떤 목적으로 설치를 한 게 아니에요"
조 모 씨 : "그러면 침수가 돼도 니들 책임이지 우리 책임이 아니라는 얘기네요? 기반 시설인데 이게 기반 시설 아닙니까?"
담당 공무원 : "아니 기반시설, 옛날 아주 옛날에 침수된 지역에서 설치해 갖고 개인들이 관리를 하라고 설치해 거지. 그게 시에서 괜히 뭐 반지하, 어머니 그 반지하를 저희가 지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반지하에 사시는 것 아닙니까?"
조 모 씨 : "반지하를 지어놨기 때문에. 서민이니까 반지하에 살겠죠."
담당 공무원 : "왜 왜 저희가 저기 반지하까지 해서 그 몫까지 관리해야 합니까?"
조 모 씨 : "여보세요. 반지하를 관리하라는 게 아니고. 역류방지기를 설치했으면 관리해야죠. 당연히."

더 이상 도움을 받기 힘들겠다고 생각한 조 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귀중품과 간단한 생필품만 챙겨 근처 친척 집으로 대피했습니다.
 
● 역류방지기 관리는 누구 책임?

통화 내용을 보면 담당 공무원은 계속해서 "역류 방지기를 관리할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저희가 확인해봤더니 지난 2010년에도 수도권엔 많은 비가 내렸고, 저지대와 반지하 주민들의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이에 정부 차원의 국비 사업으로 저소득 주민의 신청 하에 역류방지시설이 보급됐습니다. 설치는 시흥시청이 맡았습니다. 당시의 조건은 이랬습니다. 역류방지기를 정부가 지원해주는 대신 실질적인 혜택은 반지하 주민이 얻게 되니 작동을 위한 전기 사용료 등은 주민이 부담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역류방지기를 관리하고 고장이 났을 때 수리를 누가 하느냐는 주체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도로나 전기, 상하수도 같은 다른 기반시설과 달리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흥시청은 주민이 알아서 관리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관리 의무가 없다는 이윱니다. 담당 공무원이 "주민이 알아서 하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 뒤바뀝니다.

지난 5월, 경기도청에선 관내 지자체에 공문을 보냅니다. 역류방지시설을 포함한 침수대비시설을 점검하라는 내용입니다. 이때는 시흥시청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시흥시에 설치된 103개 역류방지시설의 현황을 파악하고 그 중 모터불량 등이 발견된 20개에 대해선 한 달 뒤 보수를 완료합니다.

서울시의 경우를 볼까요? 서울시는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5만 6천여 가구에 역류방지시설 11만 3천 500여 개를 교체하거나 새로 설치해줍니다. 또 교체가 요구될 때는 자치구에 요청해 교체 받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역류방지기 관리는 지자체의 의지에 달렸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 말이라도 친절했으면…

담당 공무원을 만나봤습니다. 폭우 피해를 당한 주민에게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정말 나쁜 사람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실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평범한 공무원이었습니다. 17년 차 7급 공무원인 이 사람은 폭우 피해로 며칠 연속 비상근무를 하고 너무 많은 민원이 쏟아지다 보니 실수한 것 같다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대부분이 현장에 나간 상황이라 일일이 개별 민원을 다 대응하는 건 불가능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하지만 반지하 주민 조 씨가 공무원과의 대화를 녹음하고 언론사에 제보까지 하게 된 건 역류방지기를 바로 고쳐주지 않았기 때문 만은 아닙니다. "왜 반지하까지 관리해야 합니까?"라는 이 한마디가 문제였습니다. 조 씨는 취재진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무나 참담했다. 아이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해서 반드시 반지하를 벗어나겠다."고 말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공무원의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재난 상황에 비상 대응하며 격무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의 노고를 모르는 건 아닙니다. 때론 쏟아지는 민원을 당장 대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7월 23일 오전, 담당 공무원이 조 씨에게 "지금은 어려우니 최대한 빨리 가서 살펴보겠다. 기다려달라." 이렇게만 말을 했어도. 반지하니 맨홀 뚜껑이니 이런 말만 안 했어도. 한 주민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이번 일이 공직 사회의 대민 서비스 향상을 위한 고민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기태 기자KK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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