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회적 취향, 20대에겐 촌스러운 허세", "재미 없는 성적 묘사 너무 많아..하지만 필력은 여전"
[경향신문] ㆍ“과도한 떡밥·수다스러운 잔재주…그래도 끝까지 읽게 돼”
ㆍ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 문화부 기자들의 방담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7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사진)는 이달 국내 출간과 동시에 40만부를 찍었다. 책은 출간과 함께 압도적인 판매량으로 국내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은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4명이 지난 26일 이 소설에 대해 방담을 벌였다. 30~40대 기자들은 하루키와 이 소설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얘기했다. 솔직한 대화를 위해 이름 대신 ‘A, B, C, D’로 진행했다.
“소설에서 자신 없는(?) 남성이 느껴진다”
A: 이번 작품은 전작들에 비해 어땠나.
B: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유독 베드신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지, 이렇게까지 나올 필요가 있나, 잦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C: 하루키의 성적인 묘사는 도파민을 분비시키지 않는다. 너무 건조하고 만질만질하다고 해야 할까. 별로 재미가 없다. 매끈한 외모의 여자들과 뻔한…. 하루키는 여자의 가슴 사이즈에 대한 이야기와 묘사가 너무 많다. 왜 그런 걸까?
A: 연령대별로 등장하는 모든 여성의 가슴에 집착하고, 크기와 모양 등 묘사가 지나치게 디테일하다. 최근에 본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에도 비슷한 설정이 있던데, 주인공 남성의 성관계 파트너로 폭력 남편을 둔 여자들이 등장한다. 맞아 멍든 몸으로 일시적인 성관계에서 위안을 받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식이다. 주체적으로 삶을 살지 못하는, 무기력한 여성의 모습이 마치 소품처럼 사용된다. 도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B: 그런데 10대 소녀(아키가와 마리에)가 처음 본 남자에게 성적인 상담을 하는데 실제로 가능한가.
C: 하루키 소설들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남자 주인공들이 표준 이하의, 사이즈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를 감추면서 남성성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는 건 ‘발기된 페니스’에 대한 묘사나 ‘경도’에 대한 강조에서 느껴진다. 유독 여성의 가슴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이야기하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A: 이 추론에는 동의하는 여성들이 꽤 있다. 섹스신 묘사도 그렇다. 자신은 큰 가슴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표현 등에서 왠지 자신감이 없다는 게 유추되는 것 같다.
C: 좀 불만스러웠던 점이 소설에서 변죽을 세게 울려놓고 별 볼일 없어지는 게 많았다는 거다. 구덩이에서 발견한 방울의 경우도 그렇다. 과도한 효과음이랄까. 후에 엄청나고 대단한 뭔가를 끌어낼 것처럼 보이게 해놓고서는 용두사미가 되지 않았나. 짜증났다.
B: 테크닉 과잉이라는 생각이 든다. 큰 예고를 해놓았지만 정작 뒤엔 별게 없다.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 독자를 끌어들이는 잔재주 같은 걸 부린다는 느낌.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남다른 대가인데 그런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도 독자를 충분히 끌고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D: 등장인물이 꼭 등장해 자기가 다시 요약해주는. 이게 독자를 배려한 것일까.
C: 떡밥들이 과도했다. 마리에 아버지 이야기만 해도 사이비 종교단체 이야기를 하면서 새로운 사건에 대한 긴장감을 만들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B: 그런 얕은 수법에도 끝까지 읽게 된다는 건 장점이다. 궁금하게 만드는 힘 말이다(하하). 출간되기도 전에 40만부 찍은 건데 국내엔 그런 작가가 없지 않았나.
“하루키 독자들이 늙었다고?”
B: 하루키의 문화적 코드가 우리와 거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출간과 동시에 40만부를 찍었다는 것은 뭔가 탁월한 보편성이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한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전 세계 어느 공항에 가도 하루키 책이 있다. 주된 독자들은 30~40대인가.
D: 거의 그렇다. 1990년대부터 하루키 소설을 읽어온 독자들이다.
B: 그런데 그 층이 지금 독서시장의 주된 구매층이긴 하다. 굳이 그걸 가지고 하루키 독자가 늙어서 새로운 독자층은 없다고 할 건 아니고.
D: 30~40대 비중이 높은 것이기도 하고. 하루키 스타일 자체가 지금 20대들한테는 낡게 여겨지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가 국내 출간됐을 때 20대 반응 중에 하나가 하루키의 취향이 촌스럽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C: 아재스럽잖아. 레코드 설명하면서 누가 연주한 게 어떻고, 연주는 이래야 하고 자기 이야기를 많이 강요하는 게 좀 답답했다.
D: 1990년대 초반에만 해도 그런 도회적 라이프스타일이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이젠 연식이 느껴진다.
B: 음악과 옷, 차 등에 대해 브랜드라든지 굉장히 정교하게 묘사를 하는데.
C: 그 부분은 시각적으로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아키가와 쇼코의 옷들을 묘사한 부분에선 여성복 브랜드 구호나 손정완 스타일의 옷이 그려졌다.
D: 난 반대로 부정적 느낌을 가졌던 게 자동차라고 안 하고 재규어라고 한다. 레코드도 모차르트의 솔티 지휘 빈필 연주 이렇게 구체적으로 얘기하는데, 그걸 모르면 이미지화할 수 없도록 해놓은 게 좋은 방식이 아닌 것 같다. 무엇을 읽으면 시각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게 문학다운 것 아닌가.
A: 하루키는 누구나 읽으면 다 알 수 있는 문화적 코드보다는 차별화된 코드를 제시하면서 구별짓기를 해왔다. 하루키가 던진 코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독자들을 겨냥한. 너무 대중적인 문화코드를 쓰는 것은 하루키의 방식이 아니다.
D: 브랜드 하나 툭 던져주는 것은 약간 허세라고 생각한다. 친절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놀라운 건 하루키가 1948년생인 이문열과 거의 동년배다. 1949년생 작가가 이렇게 꾸준히 소설을 쓰면서 화제를 일으키고 돌풍을 일으킨다는 게 놀랍긴 하다.
C: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면서 취향을 계속 갈고 다듬는 거 같다. 다른 걸 떠나서, 이번에는 뭘 썼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게 대단하지 않나. 긴장감과 호기심을 준다는 것 자체로도 힘이 느껴진다.
B: 전작들에 비하면 재미가 덜하다. 생각해보면 공간이 한정적이어서 갑갑했다. 그러나 예술가가 주인공으로 나온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장면, 그림을 구상하고 필요 없는 요소를 제거하고, 완성인지 미완성인지에 대해 예술을 그린 소설로서의 필력은 탁월했다.
C: 진짜 화가의 고뇌가 느껴졌다. 소설에서 그림을 보여준 게 없는데도 그림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B: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이 실재하는 것 같고, 그림이 불탔다고 했을 때 안타까웠다. 하루키도 추상화가를 우연히 소개 받아서 취재를 시작하게 됐다고 하는데. 우리도 기자라서 취재해봤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쓸 수 있는 거 아니지 않나.
“역사를 정면으로 담지 않았다고?”
C: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래서 기대가 더 큰 것 같다. <1Q84> 같은 경우 더 긴장감이 있었는데 이 소설은 뒤가 약해져서 아쉬웠다. 음악 이야기도 그의 소설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인데 이번엔 과도해 헛돈다 싶더라. <돈조반니>야 그림의 모티브가 되는 거니까 필요하다지만 오페라 <장미의 기사>는 대화나 이야기 전개에 그렇게 녹아드는 것 같지 않았다.
B: 왜 필요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C: 역사적 사건들을 엮은 정교함, 긴장감은 떨어졌지만 소설에서 오스트리아 합병, 난징 학살을 엮어서 의미를 주려고 했던 시도는 괜찮았다.
B: 역사를 다룬 부분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순 없을 것 같다. 일각에서 하루키가 역사를 끌어들였다는 것에 과도한 해석을 하던데 본격적으로 역사를 못 다뤘다고 해서 비판할 건 아니다. 이 정도 묘사를 가지고 일본 우익들이 비판했다고 하지 않나. 그것도 한심한 일 같았다.
C: 한국이었다고 생각해도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 같다.
A: 역사적 문제를 점점 적극적으로 작품에 끌어들이고 있는 게 노벨 문학상을 염두에 둔 때문은 아닐까.
C: 기대하고 있겠지? 노벨 문학상!
A: 노골적인 의도는 아니겠지만 지난번 이스라엘 문학상인 예루살렘상을 수상하면서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에 대해 비판했던 것도 그렇고. 원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문학이었는데 점점 사회와 정치에 대한 참여를 확장해가고 있는 것 같다.
B: <1Q84>만 해도 직접적 역사적 사건을 명시하지 않지만 충분히 사회적 시선으로 넓힌 측면이 있다. 옴진리교 테러를 다룬 <언더그라운드>도 있었고, 그게 더 자연스럽게 넘어들었고…. 물론 1990년대 작품만 생각해보면. 너무 트렌디하고 낯간지럽고 그런 측면이 있다.
C: 1990년대 중반에 ‘스파게티집이 왜 이렇게 늘어나나’ 하는 기사가 있었는데 원인은 ‘하루키 때문이다’였다. 재즈도 마찬가지고.
A: 하루키가 당대 사회문제는 그동안 다뤄왔지만 먼 역사의 문제를 소설 속 주요 테마로 끌어온 건 처음인 것 같다.
D: 자기 시대의 사회에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의식이 작가에게 자리 잡고 있는 건 맞는 거 같다. 그런데 보통 정통 문학에선 사회나 시대에 대한 공기, 좌표를 잡을 수 있는데 하루키 소설은 그게 없다.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지도 않고.
C: 하루키 작품은 그런 소설이 아니다.
A: 역사소설가가 아니니까 하루키는.
B: 소설로써 그런 걸 다루는 시대는 지난 거 아닌가.
A: 하루키 소설은 번역해놨을 때, 이 소설이 일본 작가가 쓴 건지 미국 작가가 쓴 건지 모르는 일종의 무국적성과 코스모폴리타니즘이 고유의 특징인 건데.
D: 난 프랑스 사회를 읽고 싶으면 이 작가를 읽는다, 그런 게 있는데. 하루키는 그게 없어서 손으로 물을 움켜쥐는 느낌. 기분 좋지만 남는 게 없는.
C: 하루키 소설은 일본 사회를 알기 위해 읽는 소설은 아니지 않나.
“‘하루키 월드’를 뛰어넘는 작품 나올까”
A: 어쨌든 대가다.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고 ‘하루키 월드’를 창조한 사람이니까.
D: 지난주에 오스카 에이지라는 사람의 책이 나왔는데, 그 사람의 하루키 분석이 설득력 있었다. 하루키 소설엔 특정 구조가 있다는 건데 영화 <스타워즈> 같은.
C: 일종의 영웅서사 같은 것. 그 나름에서 주인공이 성취를 이뤄낸다. <1Q84>에 나오는 아오마메와 덴고도 그랬고.
D: 그런 부분들이 소설에서 비슷하게 반복되는 느낌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도 마찬가지고 신화적인 모험의 여정이 반복된다.
B: 어쨌든 우리는 계속 같은 건데 또 읽고 있다(하하).
C: 대단한 힘이다.
A: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 본격 장편으로는 7년 만에 나온 소설이라고 하는데, 마치 7년 만에 한 번 하는 올림픽의 개막식이랄까, 7년에 한 번 나오는 유명 전자회사의 신제품 발표랄까, 세계적 이벤트가 됐다는 느낌. 이 소설을 안 본다는 것은 굳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안 볼 이유가 없는. 세계적 트렌드에 동참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D: 유종호 문학평론가의 경우 하루키(소설)를 싫어하는데 최근에도 어떤 토론회에서 하루키를 비판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하루키만 한 파워를 가진 작가가 안 나오는 상황에서 여전히 소설을 읽게 만드는 것은, 일부 ‘평론가들이 소설이 아니다’라고 비하했던 하루키라는 게 재미있다.
A: 나온 얘길 종합하면, 하루키라는 작가가 거장이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인정하지만 이번 작품만 놓고 본다면 전작들에 비해 몰입도나 속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면이 있다. 그동안 나왔던 하루키적인 모든 것을 집대성한 소설이기도 하고.
C: 서사가 주는 긴장감이 떨어지는 건 맞다. 그러나 하나라도 놓칠까 싶어 챙겨 보게 된다.
A: 하루키도 이제 점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작품에서 느껴졌다. 전작을 넘어서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독자로서 차기작이 궁금하긴 하다.
<박경은·백승찬·정원식·심혜리·고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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