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도 바그너도 독일 '민족음악' 벗어나지 못했다

2017. 7. 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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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포스트베토벤' 딜레마

1876년, 브람스는 20년을 들인 자신의 노작 '교향곡 1번'을 완성했고, 바그너는 자신이 직접 설계한 극장에서 16시간짜리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 를 초연했다. '자유로운 개인'을 주축으로 삼는 근대 '사회'를 위한 음악에 대한 서로 다른 상상이, 19세기 독일-오스트리아 음악계에서 브람스와 바그너를 필두로 한 대립 관계를 만들어냈다.

[한겨레] 교향악단을 일컫는 용어 가운데 ‘필하모닉’이라는 말이 있다. ‘조화로운 소리(harmonic)를 애호한다(phil)’는 뜻이다. 19세기 이전부터의 오랜 전통 속에서 ‘필하모닉’이라는 명칭을 쓰는 교향악단이라면 특정 음악 애호가 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연히도 같은 해인 1842년 창립된 ‘빈 필하모닉’과 ‘뉴욕 필하모닉’(일본식 축어법으로 ‘빈필’과 ‘뉴욕필’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이 대표적이다. 합스부르크 궁정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를 모태로 하고 있는 ‘빈필’의 경우 1813년에 설립한 빈 음악협회(Wiener Musikverein/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의 후원과 연대 속에 설립되고 운영되어 왔다.

이러한 ‘음악협회’, 즉 음악 동호회 모임을 매개로 ‘궁정 오케스트라’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변모하는 과정은 중요하다. ‘애호가 모임’이나 ‘협회’를 뜻하는 독일어 ‘게젤샤프트’(Gesellschaft)나 영어 ‘소사이어티’(society)는 ‘사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회과학에서 좁게 규정하는 ‘사회’는 혈연·지연·신분질서 등에 기초한 전근대적 ‘자연공동체’(Gemeinschaft)의 운명적 결속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선택적 결사체를 뜻한다. 곧 ‘사회’의 성립을 위한 필수 요건은 ‘자유로운 개인’의 성립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서양 근대의 음악문화가 ‘필하모닉’이라는 말로 은유될 수 있는 근대적 의미의 ‘사회’를 실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개인’을 위한 음악, 따라서 곧 ‘사회’를 위한 음악을 상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남해안 어느 어촌에서 마을 사람들의 결속을 위해 연행되어 온 전통의 민속 음악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지만, 서로 다른 지역민들과 심지어 외국인들까지 모여 사는 서울 어느 대형 아파트 단지 입주민들을 위한 연대의 음악은 상상하기 힘들다. 누군가에겐 소음에 불과한 오락 음악도 억지 화합을 위한 선동의 음악도 아닌 ‘시민’들의 개인주의적 연대를 위한 음악, 그것은 과연 어떤 음악일까?

? 절대음악

서양 근대의 ‘자유로운 개인’이란 곧 ‘시민’이며, ‘사회’란 곧 ‘시민사회’다. 음악이 자유로운 개인이나 보편적 시민(그리고 그 변증법적 쌍으로서의 사회)을 표상하기 위해서는 지역 단위 전근대적 ‘공동체 음악’의 특수한 관습(예컨대 민요에서의 지역적 음조와 선법)을 넘어서는 음악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초(超)관습적’ 음악을 창출하는 방법 가운데 한 가지는 선율을 쪼개고 분해해서 악구(phrase)나 그보다도 짧은 동기(motive) 단위로까지 축소한 뒤 이를 화성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리에 따라 재구성하는 것이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에서 ‘운명’의 모티브로 알려진 ‘딴딴딴 따’ 하는 유명한 네 음 동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교향곡이 초연되고 2년 뒤인 1810년에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열렬한 음악 숭배자였던 에른스트 테오도어 윌리엄 호프만은 근대적 음악비평의 효시가 될 만한 글을 통해서 이 작품의 동기와 주제 발전 기법에 대한 괄목할 만한 분석을 제시했다. 그는 “청자들이 음조(key)조차 규정할 수 없는, 더이상 단순할 수 없는 두 마디로 된” 주제가 악곡 내에서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모습에 대해 자세히 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러한 (두 마디 이내의 짧은 주제와 동기적) 요소들이 파편화되거나 이해불가능한 방식으로 나타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전체에 대한 느낌을 얻게 된다.”

호프만의 논평은 베토벤의 ‘기악음악’을 해석하는 한 가지 전범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당시 낭만주의 문학가들이 동경했던 ‘무한성’의 세계에 접근하도록 해주는 ‘순수’ 기악음악의 예술적 잠재력에 대한 예찬이었던 동시에, 그러한 기악음악이 “파편화”된 개인과 “전체”로서의 사회의 조화를 표상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베토벤의 마지막 9번 교향곡은 ‘합창’이라는 표제가 붙은데다가 마지막 악장에 가사가 딸린 성악 독창과 합창을 곁들여 교향곡과 기악음악에 대한 미학적·정치적 정당화 작업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빈 체제’를 허물어뜨린 1848년의 시민혁명에 고무된 정치적 급진주의자 바그너는 결국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부분적 전거로 삼아 과감하게 교향곡 양식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때 바그너 자신이 부정적 함의를 담아 제시한 용어가 ‘절대음악’이다. 삶으로부터 유리된 순수 기악음악, ‘절대적으로 음악일 뿐’인 예술로는 세속적 시민사회의 변혁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동기와 주제의 발전이 시민적 개인을 표상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교향곡으로 대표되는 순수 기악음악이 세속적 언어를 초월한 추상적 음들의 조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의 말씀’에 따른 우주적 조화를 추구했던 중세 교회의 다성음악이나 심지어 피타고라스적으로 조율된 고대 그리스의 음악 세계와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이 바그너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 총체예술

바그너는 교향곡을 절대주의 궁정음악이나 교회음악의 티를 벗지 못한 케케묵은 전통적 양식으로 여겼다. 여기서 ‘시민음악’을 위한 또 다른 논리적 가능성이 제시된다. 바그너는 스스로 ‘미래예술’이라고 자부한, 실제로 21세기에 이르러 강조되고 있는 ‘융합예술’을 염두에 두었다. 훨씬 더 폭넓은 예술언어의 세계 속에 음악을 부분적 요소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결국 종합예술로서의 오페라를 기초로 하지만, 바그너의 눈에는 당시 전통적 오페라 양식 또한 말초적 쾌락을 자극하는 상업적 오락물로 전락한 것으로 보였다. 바그너는 자신의 새로운 오페라를 ‘음악극’(Musikdrama), 내지는 ‘총체예술’(Gesamtkunstwerk, total work of art)’이라고 부르면서 기존의 오페라 양식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바그너의 총체예술이 기존 오페라와 다른 결정적 측면은 음악극 내에서 아리아라고 할 수 있는 독립적 가창의 부분을 떼어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주인공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모두 음악적 종지(終止)를 회피하는 ‘무한선율’의 일부로서 극이 끝날 때까지 줄곧 이어지기 때문이다. 교향곡의 동기 주제 발전 기법이 선율을 최소 단위로 환원함으로써 보편적 ‘개인’을 표상하고자 한다면, 정반대로 바그너의 총체예술은 보편적 ‘사회’를 표상하기 위해 선율을 작품 전체로 무한 확장한다고도 할 수 있다. 바그너는 극의 소재 또한 신화와 전설에서 가져와 구체적 현실과의 은유적 거리를 둠으로써 또 다른 보편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 보았자 북유럽 신화나 독일 민족과 연관된 전설에 바탕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텍스트 해석의 가능성이 크게 열린다.

결국 19세기 중반 이후 독일-오스트리아의 음악계에는 한편으로 리스트와 바그너를 필두로 하는 이른바 ‘신독일악파’와, 다른 한편으로 멘델스존과 브람스로 대표되는 음악적 전통주의자 사이의 대립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전자는 ‘교향시’와 ‘총체예술’과 같은 새로운 양식에 몰두했다는 점에서 교향곡을 비롯한 전통적 장르를 고수하고자 했던 후자에 비해 ‘진보적’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러한 ‘진보-보수’의 구도는 이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급진적 모더니스트들이 ‘절대음악’을 옹호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기 때문에 적잖이 혼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브람스파’의 변호인이라 할 만한 빈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한슬리크가 1854년 <음악적 아름다움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한 이후로 순수 기악음악의 미학적 우위를 강조한 그의 논점이 다음 세기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탓도 있다.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대립과 관련하여 1876년은 상징적인 해다. 이 해에 브람스는 무려 20년간의 착상과 교정을 거친 자신의 노작 ‘교향곡 1번’을 마침내 완성했으며, 바그너는 총 상연시간만 무려 열여섯 시간에 이르는 4부작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를, 자신이 직접 설계한 바이로이트의 축제 극장에서 초연했다. 음악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음악축제’까지 기획한 바그너의 예술관은 한편으로는 20세기 아방가르드의 급진적 미학과 연결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대중문화의 기획력과 접속된다.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음악적 논쟁이 ‘시민음악’의 성격과 관련한 보편적 담론의 성격을 띠는 것은 19세기 중엽까지도 독일이 ‘국민국가’로서의 정치적 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본격화된 국민국가 시대에 ‘시민음악’의 세 번째 가능성이 제기되는데, 여기서 ‘시민’이란 ‘정치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의 ‘국민(민족)’이다. 바그너의 경우 좀 더 노골적이었지만(바그너의 예술이 히틀러의 나치즘에 이용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브람스 음악의 보수적 성향 또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독일 민족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말하자면 독일의 ‘민족음악가’였다. ‘시민음악’(세계시민을 위한 음악)의 보편적 이념은 처음부터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거나, 21세기의 현재까지 지연되고 있는 미완성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바그너가 직접 설계한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 전경. 해마다 이곳에서 전 세계의 ‘바그네리언’들이 모여 <니벨룽의 반지> 연작 상연을 포함한 바그너 축제를 펼친다. 바그너는 스스로 ‘미래예술’이라고 자부한, 실제로 21세기에 이르러 강조되고 있는 ‘융합예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875년 프리츠 루크하르트가 찍은 브람스의 사진.
1876년 8월 13일에서 17일까지 바이로이트의 축제 극장에서 4부작 <니벨룽의 반지>가 초연(완성판 연작으로서의 초연)될 당시의 제1부 <라인의 황금> 첫 장면 무대 스케치. 총 상연 시간만 열 여섯 시간에 이르는 이 방대한 작품을 완결짓는 데까지 무려 26년이 걸렸다고 한다. 대본과 음악은 물론 축제 기획과 전용 극장 설계, 건설 감독까지 도맡아 한 바그너는 스스로 ‘미래예술’이라고 자부한, 실제로 21세기에 이르러 강조되고 있는 ‘융합예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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