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믈리에' 자격증에 500명 몰려..'치킨공화국' 대한민국

표태준 기자 2017. 7. 27.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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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1회 '치믈리에 자격시험'에서 참가자들이 치킨을 먹고 메뉴를 맞추는 문제를 풀고 있다. /성형주 기자

“페리카나 치킨이 찾아왔어요. 정말 맛있는 치킨이 찾아왔어요”

지난 22일 오후 서울 송파구 롯데호텔 3층. 1980~90년대 TV 광고에서 들을 수 있던 치킨 프랜차이즈의 광고음악이 울려 퍼졌다. 500여명의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른바 ‘치킨’ 전문가를 선발한다는 ‘치믈리에(치킨과 소믈리에를 합친 말) 자격시험’을 치러 온 이들이었다.

문제는 “다음 멜로디를 듣고 치킨 프랜차이즈 광고음악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일종의 듣기 평가였다. 이어진 문제는 “닭 가슴살의 정확한 위치는?”

생각치도 못한 문제에 시험장 여기저기서 한숨이 나왔다. 이 시험은 배달앱 회사 ‘배달의 민족’이 주최한 행사였다. 치킨에 대한 지식을 점검하는 필기 30문제, 치킨을 직접 먹어보고 메뉴 이름을 맞추는 실기 12문제가 출제됐다. 필기와 실기 각각 절반 이상 맞춘 사람은 ‘치믈리에 자격증’을 받는다.

'치믈리에' 자격증 시험엔 외국인도 참가했다./성형주 기자

시험장 분위기는 진지했다.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치킨 냄새를 맡거나, 필기시험 시작 전 A4 용지에 각 브랜드별 치킨 메뉴를 빼곡히 적어와 외우는 이도 많았다. 치킨을 많이 먹는 20~30대 젊은이나 치킨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음식평론가, 요식업계 전문가 등 다양한 이들이 참가했다.

바리스타로 일한다는 정태령(26)씨는 “해외에서는 프라이드 치킨이 정크푸드 취급을 받지만 우리나라에선 가장 사랑받는 엄연한 요리 중의 하나”라며 “소믈리에나 바리스타처럼 언젠가는 치킨 전문가라는 직업도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일견 엉뚱해 보이는 이 ‘치킨고시’를 보겠다고 수백명의 사람이 몰릴 정도로 우리나라에선 치킨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1인당 닭고기 소비량은 13.8㎏으로 국민 1명당 14마리의 닭(1㎏ 기준)을 먹었다. 작년 소비된 식용닭만 8억 마리에 달한다. 치킨으로 먹고사는 사람도 많다. 올해 3월 기준 전국에 영업 중인 치킨 매장은 5만9000여개(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전 세계 맥도날드 매장(3만6000여개)보다 많다. 고개만 들면 치킨집이 보이는 ‘치킨 공화국’이다.

치킨이 ‘국민 먹거리’이자 ‘국민 자영업’이 되기 시작한 건 1970년대부터다. 경제 성장과 함께 양계업이 발전하면서 유통되는 닭 값이 싸졌다. 1971년 해표에서 식용유를 출시하자 닭을 기름에 튀겨먹기 시작했다. 식용유가 팔팔 끓는 가마솥에 닭을 통째로 넣고 튀긴 일명 ‘가마솥 통닭’에 맥주를 곁들여 파는 가게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1970년대 말부터 이런 가게가 프랜차이즈로 진화하면서 기름에 튀긴 치킨, 즉 프라이드 치킨을 그냥 ‘치킨’이라고 불렀다. 양념 치킨은 1980년대 초 등장했다. 이후 한국의 치킨은 이 두 가지 치킨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치킨은 한국인이 즐겨 먹기도 하지만,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먹거리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가 치킨 값을 2000원 인상한다고 발표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인상안을 철회했다.

대중문화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2014년 방송된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주인공 천송이(전지현)가 “눈 오는 날엔 ‘치맥(치킨+맥주)’”이라고 말한 대사가 아시아를 강타했다. 드라마가 중국과 동남아 등에서 인기를 끌며 이제 ‘치맥’은 한국에 왔을 때 꼭 즐겨야 하는 대표 음식이 됐다. 대구에선 2014년부터 매해 ‘치맥 페스티벌’을 연다. 작년엔 유커(중국인 관광객) 4500명이 인천 월미도를 찾아 단체로 치맥 파티를 열기도 했다.

'치킨 인형탈'을 쓰고 시험장을 찾은 이색 참가자./성형주 기자

이날 시험은 1교시 필기 20분, 2교시 실기 30분씩 치러졌다. 수백 명의 사람이 치킨고시를 치르는 기상천외한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 취재진도 현장을 찾았다. 이날 시험에 응시한 미국인 제이슨 린들리씨는 “외국과 달리 한국 치킨은 메뉴가 너무 많아 문제가 어려웠다”고 했다. ‘땡초 치킨’부터 ‘뿌링클 치킨’까지 이날 시험지에 등장한 치킨 메뉴만 50개가 넘었다.

치킨을 즐기는 사람과 업으로 삼은 사람의 모습도 한눈에 띄었다. 시험 마감 5분 전 다급하게 OMR 답안지에 마킹을 잘못했다며 감독관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찌감치 시험을 포기한 듯 펜을 놓고 실기문제로 제공된 치킨을 느긋하게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음식평론가 김지영씨는 “소는 밭을 가는데 써야 하고, 돼지는 비싸서 못 먹었던 예부터 닭은 서민들이 먹을 수 있는 친숙한 고기였다”며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치킨을 먹거나 생업으로 삼다보니 진짜 전문가를 가리는 시험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영은 원광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간장치킨’ ‘구운치킨’ 등 프랜차이즈를 대표하는 한 메뉴만으로 밀고나가던 시대가 가고, 이제는 가지각색의 소비자 입맛을 정확히 반영해야 살아남는 시대”라며 “수백 개의 치킨 메뉴를 쏟아내다가 이제는 소믈리에처럼 아예 맛 전문가를 가리는 시험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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