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오디세이]현재는 과거의 미래
[경향신문]
최근 방영되는 TV 드라마의 단골 소재는 단연 시간여행이다. 그렇다고 해서 타임머신과 같은 상상 속의 기술이 등장하거나 가늠하기 힘든 먼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여행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들은 낡은 무전기나 타자기, 혹은 어두운 터널을 통해서 다소 우연적인 방법으로 일제강점기나 20~30년 정도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미제 사건을 해결하거나, 엇갈린 사랑을 만난다. 시간여행이라는 장치로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은 과거에서 바라본 미래와 미래에서 바라본 과거가 중첩하고 갈등하는 ‘현재’이다.
지난 ‘미래 오디세이’ 칼럼은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문장으로 ‘현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과거가 쌓여 현재를 만들고, 미래가 필연적으로 현재를 기반으로 한다면,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상상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거나 때로는 충돌하며 현재를 움직이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서로 만나고 어긋나는 경험을 했다. 시간여행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경험한 것은 과거로의 유사 시간여행이었다. 은근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탄압받는 언론과 예술가의 이야기를 듣거나 공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시위가 진압되는 장면을 볼 때, 우리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난겨울 내내 치러진 촛불집회는 과거로 돌아간 듯한 시계를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되돌려 놓으려는 열망이었다. 그 끝에 내려진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은 비로소 2017년을 ‘현재’로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현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전 정부의 핵심 부처는 미래창조과학부였다. “미래”라는 단어를 이름에 품고 있지만 이 부처의 주요 임무는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경제발전 패러다임으로 제시된 창조경제를 “선도적으로 이끌어” 침체된 국가경제를 되살리고 높은 실업률을 해소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연구를 수행하거나 적극적으로 창업가가 되도록 기대되었고, 대학은 “창업기지”가 되어 여기에 힘을 보탤 것을 주문받았다. 창조경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것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은 분명했다.
창조경제 패러다임이 잘 작동한 결과는 “제2의 한강의 기적” 혹은 “경제부흥”으로 묘사되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이런 수식어를 외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창조경제혁신센터 페스티벌”이나 “코리아 VR페스티벌” 같은 기술 및 창업 박람회를 열어 “21세기형 창업국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사람들은 박람회에서 로봇이 전기차를 운전하거나 밸브를 잠그고,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증강현실 기술을 통해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를 미래로 데려다 줄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기계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창조과학부에 없는 것이 있다면, ‘미래전략’이었다. 중앙일보 최준호 기자는 2014년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발간하는 미래연구 전문 계간지 ‘퓨처 호라이즌(Future Horizon)’에 쓴 칼럼에서 “‘미래전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다. 그는 부처의 영어 이름이 말해주듯이 미래전략(future planning)은 미래창조과학부의 핵심 임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공약한 “미래사회 전반에 대한 연구와 과학기술에 기반한 미래사회 예측”은 미래창조과학부의 어느 조직도 이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다만, “철저히 산업과 과학기술에 기반한 미래전략”만이 세워져, “미래전략 정책은 되레 후퇴”하였다고 주장했다. 즉 기술에 대한 전망만 있을 뿐, 그것과 공존할 미래의 인간과 사회 변화를 포함한 미래의 모습을 제시하고 준비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어제(26일)로 미래창조과학부는 과거가 되었다. 지난주 발표한 조직개편 계획에 따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이름을 변경하고 새로이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변경된 이름은 다소 길지만 ‘과학’ ‘기술’ ‘정보통신’으로 부처의 역할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 눈에 띈다. 영문명은 “Ministry of Science and ICT”인데, 전신인 미래창조과학부의 영문 이름에서 “future planning”만 빠졌다. “미래”라는 단어는 새 정부에서 청산해야 할 과거의 상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를 상상하고, 예측하며 대비 전략을 세우는 일은 새 부처에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미래 예측과 미래전략 수립이라는 과제는 이제 다음 정부로 넘겨졌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은 ‘퓨처 호라이즌’ 올 봄호를 “차기 정부의 국가 미래전략 기능 강화를 위한 제언”이라는 제목의 특집으로 꾸렸다. 지난 정부에 제안한 미래전략 어젠다의 이행 과정과 결과를 평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차기 정부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한 것이다. 특집 기사의 결론에서 박병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미래연구센터장은 미래전략의 목적은 “미래를 100% 맞추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버티고 극복할 수 있는 대비와 기초역량을 갖추는 것에 있다”고 했다. 결국 미래전략은 현재를 향해 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움직이는 두 축이다. 과거를 아는 것은 언제나 자명하지 않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두 축을 잘 설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미래의 축은 온전히 우리가 만들어 나가기에 달려 있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여 교훈을 얻고, 동시에 미래를 상상하고 분석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는 까닭이다.
<강연실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건희 여사, 윤석열 체포되자 “총 갖고 다니면 뭐하냐” 경호처 질책
- 헌재, 오늘도 “공지 없다”···윤석열 탄핵심판 결론 다음주로 연기되나
- [단독]“무승부로 끝내자”…모처럼 학생들 만나 “언제 돌아올래” 토로한 중앙대 의대 학장
- 저서에 ‘구속기간 계산은 날짜로’ 썼던 법제처장 “개인적 저작물” 답변 회피
- “곰 세 마리가 야산에 있어”…경북 경산서 목격 신고, 대구환경청 현장 조사
- 토허제 해제 ‘실책’ 수습될까···“오락가락 정책에 시장 혼란만 커질 것”
- [단독]여인형 “KBS서 나올 간첩죄 보도에 소스 줘야”…비상계엄 직전 언론작업 정황
- [단독]검찰, 명태균 ‘박형준 부산시장 선거 여론조사’ 수사도 본격화···박 시장 “통화한 적
- 여야, 국민연금 ‘출산 크레디트’ 잠정 합의…이르면 20일 본회의 처리
- 구제역·아프리카돼지열병·AI·럼피스킨 4종 동시 발생…‘가축 전염병 창궐’ 악몽 재연 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