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우아한 탐닉, 한 잔의 칵테일

2017. 7. 2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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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라이프 레시피

[한겨레]

코블러. 바 제공.

조선시대에 내자시(內資寺)라는 관아가 있었다. 쌀과 국수, 채소, 과일, 꿀 등 먹거리를 궁에 공급하고, 궁중 잔치인 내연(內宴)도 담당했다. 왕실 사람들의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책임진 이곳에서 각별히 신경 쓰던 품목이 바로 술이었다. 생각해보라, 임금과 고관대작 입맛이 오죽 까다로웠겠는가?

문헌을 뒤져 보니, 내자시 관리들은 양조용 곡물과 누룩 품질을 관리하는 정도를 넘어 어떤 물로 빚었을 때 술이 맛있는지도 연구했다고 한다. 이런 내자시가 있던 곳이 세월이 흘러 지금의 서울 종로구 내자동(內資洞)이 됐다. 원래부터 술과 인연이 깊은 동네라서일까?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바(bar)들이 최근 이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다.

‘기술이 예술’이 되는 ‘텐더바’

내자동 랜드마크인 서울경찰청 옆 골목. 좁다란 길을 따라가면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바가 나타난다. ‘대체 왜 여기에 바를 열었지’ 싶을 만큼 외진 곳이다. 밖에서 한 번 놀라고 안에 들어가면 더 놀란다. 천장에는 분명 서까래와 대들보가 있는데, 정작 자리에 앉으면 일본에 온 기분이 든다. 어두운 조명과 낮게 깔린 음악, 단정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바텐더까지 일본 만화에서 본 모습 그대로다.

코블러. 바 제공.

한옥 바인데 왜 이렇게 꾸몄냐고? 이유가 있다. 이곳 바텐더 양광진씨는 도쿄 긴자의 바 명소인 ‘텐더’(tender)에서 칵테일을 배웠다. 그를 가르친 스승은 일명 ‘하드셰이킹’ 창시자인 우에다씨. 50년 경력 바텐더 장인에게 하드셰이킹 기술을 전수받아 지난해 이곳에 ‘텐더바 서울’을 차렸다.

그럼 하드셰이킹은 뭘까? 질문을 던지기 전에 진(gin)과 라임즙이 들어가는 칵테일 ‘김렛’(gimlet)부터 주문했다. 바텐더는 말이 아닌 몸으로 답을 준다. 먼저 셰이커에 재료를 넣고 흔들기(셰이킹) 시작한다. 물론 그냥 흔드는 게 아니다. ‘샥샥샥샥’… 4박자 리듬을 타듯 위에서 한 번, 가운데로 한 번, 아래에서 또 한 번, 빠르고 경쾌하게 3단으로 흔든다. 동작 하나하나가 매끄럽다. 아이돌 ‘칼군무’처럼 절도가 있다.

코블러. 바 제공.

이렇게 흔들면 맛도 다르나? 그렇다. 라임 특유의 향과 맛은 강한데, 알싸한 알코올 기운은 잘 안 느껴진다. “비밀이 뭡니까?” “하드셰이킹으로 기포가 많이 발생하면 이런 변화가 생기죠.” 이 맛을 잡아내기 위해 바텐더는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혼자 칼군무를 췄을까? 기술이 곧바로 예술이 될 순 없다. 하지만 궁극을 지향하면 가끔은 예술이 된다.

내자동 입성한 세련된 바
한옥개조, 텐더바·코블러
초콜릿·위스키 만남, 쇼콜라디제이

텐더바의 외관.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덴더바의 칵테일.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덴더바.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바텐더의 ‘배려’와 ‘진심’, ‘코블러’

‘텐더바’ 바로 옆에 또 다른 한옥 바 ‘코블러’가 있다. 열 걸음쯤 되려나? 정말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다. 거리도 가깝고 같은 한옥 바인데, 느낌은 영 딴판이다. 분위기가 밝고 경쾌하다. ‘텐더바’에선 의관을 정제해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선 넥타이부터 당장 풀어야 할 것 같다. 비교적 환한 조명 아래서 손님들 목소리도 조금은 커진다. 음악으로 치자면 ‘텐더바’는 정통 클래식, 코블러는 퓨전재즈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인이면서 바텐더인 유종영씨에게 물었다, 왜 이런 분위기로 꾸몄는지. 그는 “어릴 때 살던 한옥처럼 겉은 특별한데, 속은 편안한 곳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만한 답이 없다. 머무는 내내 특별하면서도 편안했다. ‘뭘 시켜야 하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메뉴판이 없기 때문이다. 술 좀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걸 시키면 되고, 몰라도 상관없다. 그날 기분이나 상황, 혹은 자신의 입맛 취향만 말하면 그걸로 끝. 바텐더 경력 20년인 유종영씨가 알아서 척척 만들어 준다.

쇼콜라디제이. 바 제공.

맛은 어떠냐고? 내 생각엔 이 집 칵테일에는 ‘깊은 맛’이 있는 것 같다. 술에 넣는 재료 말고도 손님에 대한 ‘배려’와 ‘정성’을 듬뿍 첨가했다. 한마디로 바텐더의 ‘진심’이 느껴진다. 여기 왔으면 다른 건 몰라도 ‘브레드 피트’는 꼭 드셔보시라. 잘생긴 미국 영화배우 ‘브래드 핏’(Brad Pitt)이 아니다. 빵(Bread)과 흔히 소독약 냄새 같다고 말하는 훈연 향인 피트(Peat)를 합성한 ‘브레드 피트’(Bread Peat)다. 피트 강한 라프로익 위스키로 만든 개성 만점 칵테일에 진짜 빵이 곁들여 나온다.

쇼콜라디제이. 바 제공

영감과 창조를 위한 공간, ‘쇼콜라디제이’

어떤 한 공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사이좋게 붙어 있는 한옥 바에서 길 하나 건너에 있는 ‘쇼콜라디제이’(chocolat dj)가 딱 그렇다. 밖에서 보면 그냥 초콜릿 가게다. 그런데 안에 들어가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금방 알게 된다. 특히 당신이 술꾼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벽장에 진열된 술병에서 눈길을 뗄 수 없다. 싱글몰트위스키를 비롯해 버번과 진, 럼, 각종 리큐어까지, 가게에 있는 술이 대략 70종류다. 술이 가득한 걸 보고서야 여기가 어떤 공간인지 짐작이 된다. 술 들어간 초콜릿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제조하는 쇼콜라티에 작업실이면서 동시에 ‘초콜릿 바’인 셈이다.

술과 초콜릿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위스키봉봉’(Whisky Bonbon)부터 맛봤다. 달콤한 초콜릿 안에서 쌉쌀한 술이 톡톡 터지는 느낌이 재미있고 유쾌하다. 그냥 초콜릿만 먹었을 때보다 훨씬 설렌다. 몸은 어른인데 마음은 어린이가 되어 술을 마셔보는 기분이랄까? 4년 넘게 이런 특별한 공간을 운영해온 쇼콜라티에 이지연씨는 이 느낌을 “일탈과 관능”이라는 단어로 요약했다. 손님 스스로 ‘골라 먹는 재미’도 있다. 아이스크림과 술을 결합한 ‘리큐어 아이스볼’을 시키면 손님이 술을 고를 수 있다. 술맛을 모르는데 어떻게 고르냐고? 초콜릿은 물론 술에 대해서도 전문가인 주인장이 조언을 해준다. 그는 끝마무리는 생초콜릿으로 하는 걸 추천한다. 물론 보통 초콜릿 가게에서 파는 생초콜릿과는 차원이 다르다. 술이 듬뿍 녹아 있는 ‘알코올 생초콜릿’이다. 여기에선 이걸 ‘술로 만든 벽돌’이라는 뜻으로 ‘리큐어 파베(Pave)’라고 부른다. 낮보다는 밤이 좋고, 친구보다는 애인이 필요한 술꾼이라면 이곳에 들러보시라. 특히 기분이 우울할 땐 정말 최고다.

광화문 일대 술꾼들, 요즘 복 터진 것 같다. 멋진 바가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가 생겼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동네는 애초에 ‘맛집 천국’이었다. 좀 과음했다 쳐도 걱정이 없다. 쓰린 속 달래줄 해장 음식이 골목골목마다 지천이다. 술과 해장의 환상적인 조합. 술꾼으로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이 동네 사람들이 부럽다. 진짜 이사라도 가야 하나?

조승원(<문화방송> 기자, 조주기능사)

초보 바(bar) 여행자를 위한 조언

한남동과 청담동, 내자동을 비롯해 서울 시내 곳곳에 ‘바 타운’(bar town)이 형성돼 있다. 좁은 지역에 밀집해 있다 보니, 몇 시간 동안 이들 바를 한 번에 방문하는 게 가능해졌다. 흔히 ‘바 호핑’(bar hopping)이라고 한다. ‘바 호핑’에 처음 도전하는 분을 위해 몇 가지 조언을 드린다.

▶많이 돌려고 하지 마라. 오늘 아니어도 기회가 있다. 비행기 타고 가야 하는 여행지가 아니라면, 과욕은 금물. 한 번에 2~3곳이면 충분하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곳을 가보려고 욕심을 부리다간 무거운 영수증만 남는다.

▶물을 많이 마셔라. 바 3곳에서 한 잔씩만 마셔도 석 잔. 두 잔씩 마시면 여섯 잔이다. 웬만한 주량이라도 취하기 십상이다. 적게 마시는 게 최선이지만, 그럴 수 없다면 물이라도 많이 마셔라. 화장실에 자주 가는 단점은 있지만, 훨씬 덜 취하고 머리도 덜 아프다.

▶바텐더를 믿어라. 바는 내 자랑을 하는 곳이 아니다. “얼마짜리 술을 먹어 봤네” 같은 얘기는 다른 곳에서 하라. 바텐더는 술이 ‘업’인 사람이다. 매일 실전에서 전쟁을 치른다. 술이 취미인 당신과는 다르다. 그러니 바텐더를 믿어라. 그가 추천해주는 칵테일을 믿어라. 만약 못 믿겠다면 아예 가지 마라.

▶단골집을 만들어라. ‘딱 여기다’ 싶은 곳이 있다. 그렇게 느껴지면 ‘정착’하라. 천하무적 주당 헤밍웨이도 그랬다. 파리, 베네치아, 키웨스트, 아바나 등 머무는 곳마다 단골집을 만들었다. 집처럼 편한 곳에서 왕처럼 대접받으려면 단골이 되는 게 최선이다.

조승원(<문화방송>기자, 조주기능사)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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