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마법의 맛, 한겨울 복숭아 병조림

2017. 7. 2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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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병조림을 사랑한다.

만약 세상에 종말이 찾아왔을 때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릴 여유가 생긴다면, 열세번째 정도로 떠올릴 것이다.

말했듯 나는 복숭아 병조림을 사랑한다.

복숭아 병조림과 사랑에 빠진 것은 충북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에 있던 이모의 집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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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보통의 디저트

[한겨레]

그림 김보통

복숭아 병조림을 사랑한다.

만약 세상에 종말이 찾아왔을 때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릴 여유가 생긴다면, 열세번째 정도로 떠올릴 것이다. 앞의 열두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사랑한다.

통조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비교 대상이 아니다. 통조림은 병조림이 없어도 굳이 먹고 싶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깡통을 따는 게 수고스럽다거나, 배가 부르다거나, 황도가 아닌 백도이기 때문이거나, 이유는 많다.

그러나 병조림은 거부할 수 없다. 특히 델몬트 오렌지 주스병에 든 것이라면 먹지 않을 재간이 없다. 안에 든 것이 황도인지 백도인지 낙과(떨어진 열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맛있다. 완전식품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아니겠지만 상관없다. 말했듯 나는 복숭아 병조림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복숭아 병조림과 사랑에 빠진 것은 충북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에 있던 이모의 집에서다. 음성은 감곡 복숭아가 유명하지만, 감곡면이 아니더라도 복숭아 농가가 많고, 모두 맛이 좋다. 생극면 역시 마찬가지. 여름방학이 되어 이모집에 맡겨지면 내내 복숭아를 까먹으며 지냈다. 깔끄러운 털을 씻어내고 물을 잔뜩 머금은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면 턱으로, 무릎으로 과즙이 뚝뚝 떨어졌다. 더러는 복숭아를 파먹고 들어온 벌레를 함께 먹어버려 절단된 벌레의 반신을 뱉어내야 할 때도 있었는데,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이모는 딱딱한 복숭아를 깎아 병조림을 만들었다. 도시로 공부하러 간 사촌 누나의 방엔 그렇게 만들어진 병조림들이 옷장 위에 줄을 맞춰 진열되어 있었다. 보고 있자면 군침이 돌았지만, 당장은 먹으면 안 된다고 이모가 말했다. 당장은 발에 차이는 것이 복숭아니 빠르게 단념한 나와 동생은 다시 마루에 앉아 온 얼굴을 적시며 복숭아를 베어 먹었다.

겨울방학이 되면 다시 이모 집에 갔다.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서 공부하던 사촌 누나와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한밤중에 생극면 정거장에 내렸다. 눈이 많이 내려,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졌다. 거리의 불빛은 가로등을 제외하곤 모두 꺼져 있어 꿈속을 헤매는 것만 같았다. 장갑을 끼고 있지만 손끝이 저리고, 코끝이 땡땡 얼어붙었다. 입에서는 연신 김이 나왔다. 마치 증기기관차라도 된 것처럼.

눈밭을 헤치며 병암리 이모 집까지 걸어갔다. 커다랗게 뜬 보름달의 빛이 하얗게 쌓인 눈에 비쳐 밤길이 환했다. 한참을 가면 멀리서 이모 집이 보인다. 불이 켜진 채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면 집 앞 어둠 속에서 누군가 서성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모부였다.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부터 집 앞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데 어서 들어가”라고 말하며 이모부가 현관문을 열면 뜨뜻한 공기가 훅 하고 느껴진다. “이제 왔어? 밖에 춥지?” 하고 이모가 말한다. “추워! 추워!” 하고 말하며 신발을 집어 던진 채 따뜻한 이불 속으로 뛰어든다. 아궁이로 불을 때던 것이 기억난다. “아랫목으로 와 앉아” 하고 이모부가 말하면 꾸물꾸물 엉덩이만 움직여 이동한다.

그때, 문이 열리며 이모가 복숭아 병조림을 가지고 들어오며 말한다.

“복상(복숭아의 사투리) 먹자.”

드디어 병뚜껑을 따고 그릇에 담기는 복숭아 조림. 포크를 들어 하나를 찍어 먹은 순간. 나는 사랑에 빠진다. 거역할 수 없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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