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 덩케르크 철수 작전, 히틀러가 방조했을까

2017. 7. 2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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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진격 중단 둘러싼 진실 공방 여전

(서울=연합뉴스) 유영준 기자 = "덩케르크의 진실은 무엇일까?". 영화 '덩케르크'의 상영으로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다시금 조명을 받으면서 이를 둘러싼 역사적 진실 공방도 재연하고 있다.

2차 대전 초기인 1940년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 9일간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프랑스명 케르크)지역에 고립된 영국과 프랑스, 폴란드 등 연합군이 독일군의 압박 속에서 기적적으로 영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40만 명 가운데 약 33만 명이 영국으로 탈출해 후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을 통해 유럽 대륙을 탈환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영국은 5월 윈스턴 처칠이 총리에 선출된 직후 첫 과제로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라는 첫 시험대에 서게 됐다. 당시 처칠은 위급한 현지 전황을 감안해 3-4만 명만 구해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10배가 넘는 인력을 구출해 냄으로써 결국 첫 시험대를 성공적으로 통과하게 된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만약 독일군이 계속 연합군을 밀어붙여 영국군의 탈출을 저지하고 영국의 주력군을 포로로 잡았다면 영국은 군대를 상실한 채 총리로서 처칠의 경력도 조기에 끝났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지적도 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둘러싼 역사적 진실의 공방은 과연 영불 연합군을 덩케르크 해안으로 몰아붙인 독일군이 무엇 때문에 갑자기 덩케르크 문턱에서 진격을 멈췄는가 하는 것이다.

독일군이 덩케르크 문턱에서 전격적으로 진격을 중단한 것은 2차 대전 중 주요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다. 포린폴리시(FP)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둘러싼 진실 공방을 소개했다.

특히 일시적 멈춤이 아니라 히틀러의 직접 지시 때문에 막강한 독일군 기갑부대가 덩케르크 8마일(약 13km) 지점에서 전면 움직임을 멈춰 해당 부대 독일군 지휘관들조차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당시 독일군 현지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그대로 밀어붙였으면 영국군이 그렇게 쉽게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당시 자신의 손이 히틀러의 지시 때문에 완전히 묶인 상태였다고 후일 회고했다.

지금까지 상당수 역사학자나 2차대전 전사가들은 나치 독일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영국과의 평화 협상을 염두에 두고 독일군의 마지막 진격을 정지시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히틀러는 유럽 대륙을 석권하면서도 영국과의 대결을 꺼렸으며 이에 따라 만약 덩케르크에서 영국군을 궤멸시킬 경우 영국에 굴욕을 안겨줘 평화 협상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우려했다는 설명이다.

당시 독일군 판저 탱크부대 9개 사단의 진격을 중지시킨 히틀러의 명령은 암호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하달됐으며 이것 역시 영국군이 이를 탐지해 독일 측의 평화협상 제의의 하나로 받아들이도록 했다는 지적도 있다.

히틀러는 또 나중에 자신이 너무 순진했었다고 한탄했다는 역사적 기록도 있다. 독일군 총사령부의 장성이었던 발터 발리몬트의 기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신이 내민 스포츠 정신을 처칠이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탄한 것으로 돼 있다.

스포츠 정신은 곧 덩케르크 해안에서 영국군을 궤멸시키는 것을 자제함으로써 양국 간에 치유 불가의 불화가 조성되는 것을 피했다는 것을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설명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고 FP는 지적했다. '평화협상 운운….'은 당시 히틀러의 잘못된 결정을 정당화 또는 은폐하기 위해 날조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히틀러 전기 작가인 이언 커쇼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영국군의 탈출을 방조했다는 히틀러의 주장은 (잘못된 결정을 정당화 하려는) 체면 치레용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전사가인 게르하르트 바인버그는 히틀러의 평화 협상 관련 주장을 '날조'로 역시 일축했다.

또 다른 전사가인 앨리스테어 혼은 히틀러가 당시 전공(戰功)을 정치적으로 자신에 가장 충성스런 공군에 돌리려 의도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덩케르크 전투의 마무리를 공군이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혼은 덩케르크 지역 독일군 기갑부대에 내려진 명령 가운데 하나가 '덩케르크는 공군에 맡겨질 것'이었다는 당시 기갑부대 지휘관의 후일 기록을 인용했다.

FP는 그러나 이러한 진실 공방 속에서 히틀러의 평화협상 희망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영국 처칠 전시 내각이 실제로 독일과의 평화협상 조건을 놓고 격론을 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시 로드 핼리팩스 외교장관은 협상을 선호했으나 처칠 총리가 강경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처칠 전기를 쓴 보리스 존슨 현 외교장관은 당시 처칠이 정치생명을 걸고 강경책을 주장했다면서 만약 핼리팩스 장관에 양보했으면 그의 정치생명은 끝났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yj378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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