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카페>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자기성찰의 아이콘.. '東柱의 부끄럼'

기자 2017. 7. 2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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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에서 길을 따라 150m쯤 올라가면 시민공원으로 조성된 곳에 윤동주의 ‘서시’ 시비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연합뉴스
시인 백석
윤동주 ‘별 헤는 밤’ 육필 원고.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④ 그를 이어가는 계보는 왜 없을까 ?

◇ 윤동주가 참조한 경의에 찬 선행 언어들 =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는 오래도록 자신만의 빛을 발하는 명편들이 많다. 세월의 풍화를 전혀 겪지 않고 새로운 순간을 재현하면서 항구적 매혹을 주는 시편들에는 서로 공명하고 마주 보는 눈높이의 뚜렷함이 있다. 그 가운데 지금도 정상 시편으로 손색이 없을 다음 두 편에는, 후배 시인이 선배 시인의 작품에서 취한 계승과 신뢰의 흔적이 선연하게 나타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윤동주, ‘별 헤는 밤’ 부분)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세상의 존재자들을 하나하나 호명해가는 두 시인의 모습은 많이 닮았다. 시의 세목에서도 앞의 시편이 성취해낸 것들은 뒤의 시편으로 파동 치듯 번져간다. ‘흰 바람벽이 있어’는 1941년 4월 ‘문장’에 실렸는데, 이 시를 접한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이었던 그해 연말에 이 작품의 세목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변형한 ‘별 헤는 밤’을 써서 친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의 마지막 순서에 넣었다. 비유하자면 ‘흰 바람벽이 있어’는 골방에서 ‘미리’ 씌어진 ‘별 헤는 밤’이요, ‘별 헤는 밤’은 언덕에서 ‘이어’ 씌어진 ‘흰 바람벽이 있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들은 퍽 닮았고 또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윤동주가 백석의 유일한 시집 ‘사슴’(1936)을 구하지 못하여 일일이 그 안에 실린 시편들을 필사하고 또 특정 구절에는 느낌이나 해석까지 써두었다는 증언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백석이 호명한 대상이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였다면, 윤동주는 그것들의 이형동체(異形同體)인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를 정성껏 불렀다. 서양의 두 시인을 함께 나열하는 장면이나, 백석이 어머니와 여인을 생각하듯 윤동주가 어머니, 아이들, 소녀들, 계집애들, 이웃 사람들의 이름을 연쇄적으로 부르는 모습도 꽤 닮아있다. 그렇다고 ‘별 헤는 밤’이 ‘흰 바람벽이 있어’의 모작이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윤동주는 선행 시편에서 받은 지극한 감동과 자극을 창의적으로 변형하여 더없이 아름다운 성찰 시편을 써냄으로써, 전통의 창의적 계승 사례가 되기에 족한 시인으로 남았을 뿐이다.

물론 후대 시인이 선행 시편을 어법이나 세계관 차원에서 무반성적으로 옮겨 적는 일은 거의 없다. 시편 곳곳에 선행 시편들의 흔적이 간접화되어 남게 되는 사례가 많을 뿐이다. 그 경우, 후대 시인은 선행 시편에 깊이 의존하면서도 그에 대한 일정한 변형을 수행함으로써 전통을 품고 또 전통을 넘어선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윤동주는 정지용과 백석의 영향을 많이 입었다. 그 시인들의 시집을 여러 차례 숙독하면서 선배들을 사숙하고 흠모하는 다독가로서의 면모를 충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겸허하게 배우고 또 배웠다. 그래서인지 윤동주가 남긴 시편에서 선행 시편들의 흔적은 여럿 발견된다. 그렇다고 윤동주가 선배 시인들을 무반성적으로 베끼거나 그 모방적 성과를 대수롭지 않게 발표한 흔적은 전혀 없다. 다만 그는 매우 성실한 습작의 정신으로 당대 대가들의 작품을 읽고 메모하면서, 거기에 창의적 변형을 가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을 뿐이다. 이 점,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할 윤동주의 생래적 성정(性情)이자 적공(積功)의 과정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윤동주가 시를 써가는 과정에서 강한 암시와 자극을 준 텍스트는 당시의 선행 시편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신구약 성경은 물론, 릴케나 투르게네프 등의 외국 시인들, 그리고 키르케고르를 비롯한 서양 철학자들의 저작에 나타난 사유와 방법을 끊임없이 읽고 참조하였다. 일본 근대시인 다치하라 미치조(立原道造)의 시편들도 윤동주가 많이 궁구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처럼 윤동주는 자신의 텍스트 안으로 경의에 찬 선행 언어들을 안아 들이면서 부단한 창의적 굴절 작업을 지속적으로 행했던 것이다.

◇ 윤동주만이 누리는 기억 전승의 특권 = 하지만 정작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윤동주의 후행 시인이 그 계보를 이어간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 현대시사에서 정지용, 이상, 백석, 서정주, 김수영 등은 막강한 후배 시인의 계보와 후행 현상들을 파생적으로 거느리고 있다. 정지용의 경우 한시적이기는 했지만 당대의 가장 커다란 ‘정지용 에피고넨’들을 만들어냈고, 백석은 해방 후 많은 시인의 서사 지향 시편과 유장한 호흡의 고백 시편들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이상-서정주-김수영은 우리 현대시사의 세 가지 지향 곧 ‘실험-서정-참여’의 연원이자 비조(鼻祖)가 되었다. 하지만 윤동주에게는 후행 계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간헐적이거나 예외적으로 존재할 것이고, 그 또한 괄목할 만한 시사적 자산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윤동주는 우리 문학사에서 반복이나 대체가 불가능한 유일한 사건이자 표지(標識)이다. 흉내를 내거나 모방할 경우 바로 촌스러워지는 유일성을 그는 배타적으로 가지고 있다. 어쩌면 ‘윤동주적(的)’인 존재는 윤동주 자신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윤동주는 선행 시인으로부터는 많은 영향과 참작을 통해 새로운 창의적 변형으로 나아갔지만, 후행 시인들에게는 모방하거나 따라 할 수 없는 유일한 아이콘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진정성을 통해 윤동주만이 누리고 있는 기억 전승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 ‘부끄럼’이 ‘자랑’으로 전이되어가는 윤동주 시 = 그렇다면 윤동주만이 누리는 이러한 기억 전승의 특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순결한 생애와 비극적 죽음이 그 일차적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시의 내부로 들어가면, 우리는 그에게만 존재하는 치열하고 정직한 자기 응시와 입법 과정이 그 안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한국 현대시사에서 거의 최초로 본격적 의미의 성찰적 일인칭 시편들을 써갔다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그 성찰의 가장 중요한 발원처는 이제 윤동주만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부끄럼’이다. 물론 이 ‘부끄럼’은, 타자의 시선에 자신의 윤리적 결함이 들켰을 때 느껴지는 수치심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눈높이에 못 미치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느끼는 실존적 안타까움 같은 것일 터이다. 윤동주의 계보가 존재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까닭이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거의 최초로 자기 자신을 시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래서 자기 확인이나 성찰이 얼마나 성실한 변증 과정을 이루면서 한 사람의 삶과 언어를 완성해가는가를 보여준 유력하고도 유일한 사건으로 남은 것이다. ‘부끄럼’을 소녀 취향의 정서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거니와, 그것은 섬약한 퇴영적 정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 대한 부단한 ‘부정-긍정’ 과정을 통해 다다른 성찰적 소산인 것이다. 그런데 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바로 그 ‘부끄럼’을 ‘자랑’으로 바꾸어가는 아름다운 전이(轉移)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별 헤는 밤’의 마지막 연)

이처럼 그는 자신의 부끄럼을 ‘자랑’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윤동주에게 ‘부끄럼/괴로움/자랑스러움’은 하나의 육체를 이루는 정서의 안팎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가 노래하는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이라는 대목이, “자랑처럼 풀이 무성한” 상태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별 헤는 밤’의 구조는 ‘흙으로 덮음-봄의 도래-풀(잔디)의 재생’이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짜여 있는데, 그러한 자연의 순환과 섭리에 그대로 대응되는 은유적 상관물이 바로 “(부끄러운) 내 이름자”이다. 윤동주는 이 시편에서 흙 속에 피어나는 잔디를 통해 재생과 부활을 꿈꾼다. 그 재생과 부활은 수난과 영광에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체적이고 집단적인 갱생이라는 의미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현실적 시련을 자연의 순리처럼 받아들이며 견디겠다는 자세를 무덤 위에 돋아나는 ‘풀’의 이미지, 서러움과 생명력을 동반한 소망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내 이름자를 써서 흙으로 덮어버린 위에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이라는 의미는, 이처럼 ‘부끄럼’ 자체를 순결한 자신에 대한 긍지로 삼아간 의식의 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자기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반성적 인식이야말로 윤동주 시가 자기 회귀성이 강한 전형적인 서정 양식으로, 모어(母語)의 아름다움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체현한 언어의 보고(寶庫)로, 어둑한 역사를 외적 투쟁이 아닌 내면의 치열한 싸움으로 대응했던 첨예하고도 이색적인 저항의 한 양상으로 기억되게끔 작용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 안에는 ‘부끄럼’에서 ‘자랑’으로의 실존적 전이 과정이 이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이러한 실존적 전이 과정을 순결한 언어로 구현해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그 점에서 윤동주 시의 성숙 과정을 보여주는 자전(自傳)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이 시집을 대하는 순간, 우리에게도 ‘부끄럼’이 “자랑처럼” 감염되어올 것이다. 이 점이 윤동주의 후행 계보가 존재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까닭이다. 그리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시집을 새삼 꼼꼼하게 읽어야 할 까닭도 이러한 맥락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문화일보 6월 27일자 28면 3회 참조)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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