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연극 '1945' 스토리텔링은 탁월한데..왜 뒷맛은 불편할까

문학수 선임기자 2017. 7. 24.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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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극작가 배삼식의 신작

국립극단 제공

배삼식은 뛰어난 스토리텔러다. 아니, 어쩌면 이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먼 데서 오는 여자>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1945>를 본 관객들이라면, ‘우리 시대 최고의 스토리텔러’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 연극의 스토리는 차지다. 물론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1945>에서 만나기는 어렵다. 이 연극의 이야기들은 소소하고 때로는 ‘찌질’하기까지 하다. 거시적 맥락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개개인들의 운명을 뚜렷하게 돋을새김하면서 삶의 구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 세세한 이야기들이 가로세로로 촘촘히 직조돼 농밀한 정서적 울림을 전해온다.

제목에도 드러나 있듯이 작품의 시간은 ‘해방이 됐다’는 소문이 들려온 1945년이다. 만주 땅 이곳저곳을 떠돌던 조선인들이 전재민(戰災民) 구제소에 몰려든다. 연출가 류주연은 바로 그 구제소를 무대로 옮겨놨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돌멩이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똥이 넘쳐나고 솥단지 하나가 덩그러니 걸려 있다. 사람들의 피란 짐 꾸러미는 무대 한쪽에 대충 쌓여 있다. 제대로 된 방 한 칸도 없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죽을 끓여 먹는다. 사방이 툭 트인 공간에서 누가 보든 말든 섹스를 한다. 정처 없이 떠돌던 조선인들은 그렇게 간이역과도 같은 삶을 영위하면서 조선으로 자신들을 데려다줄 기차를 기다린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곳에는 “약하고 더럽혀진 존재들”이 모여 있다. 일본군 위안소에서 능욕의 세월을 견뎠던 ‘명숙이’와 ‘미즈코’는 과거를 숨긴 채 구제소로 숨어들었다. 임신까지 한 미즈코는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감춘다. 명숙이는 “지옥의 세월을 함께 견딘” 미즈코를 친동생으로 속여가며 조선행 기차를 애면글면 기다린다. 마약쟁이 ‘선녀’는 그 황폐한 세상에서도 생존의 촉각을 곤두세운다. 암시장에서 아편을 팔아가면서 꼬깃꼬깃한 돈을 속주머니에 챙긴다. ‘수봉이’는 그런 선녀와 눈이 맞아 구제소에서 살림을 차렸지만 장질부사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다. 그 밖에도 이노인, 끝순이, 만철이, 구씨, 순남이 등이 구사하는 조선 팔도 사투리가 구수하다.

배삼식의 연극은 둥글다. 그는 1998년 <하얀 동그라미 이야기>로 데뷔했다. 고(故) 김동현이 연출해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던 <하얀 앵두>(2008)는 삶과 죽음의 순환을 그려냈다. 이번 작품 <1945>에서도 그의 작가적 시선은 여전히 둥글다. 1945년의 구제소를 배경으로, 어떻게든 살아나려는 인간군상의 치열한 욕망을 보여주면서도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거의 예외없이 착하고 불쌍하다. 이 따뜻하면서도 연민 가득한 시선은 아마도 그의 성품에서 비롯할 터이다.

하지만 세상은 둥글지 않다. 오히려 모나고 울퉁불퉁하며 삐뚤빼뚤하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탁월한 극작가 배삼식의 연극은 때때로 불편하다. 국립극단이 내놓은 <1945>는 올해의 수작으로 부족함이 없음에도 여전히 불편한 뒷맛을 남긴다. 어쩌면 이 연극은 조선으로 가는 기차를 끝내 타지 못한 두 여인의 이야기일 것이고,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특히나 불편하고 공허했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3시간짜리 공연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끌고간 류주연의 연출력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배우들 각자의 연기와 앙상블도 합격점. 특히 ‘숙이’ 역의 주인영, ‘선녀’ 역의 김정은, ‘이노인’ 역의 박상종이 기억에 남는다. 3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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