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그는 왜 평생 '단순한 그림'을 그렸을까

박현주 2017. 7. 24. 15: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뉴시스】장욱진, 여름_36.5x26.5cm_Oil on canvas_1982.신갈시절

■가나문화재단 '장욱진 탄생 100년' 재조명
24일부터 '인사동 라인에 서다' 100여점 전시

【서울=뉴시스】박현주 기자 = '단순함'의 국내 대표 화가로 장욱진 화백(1917-1990)이 꼽힌다.

그는 스스로도 “나는 심플하다”라고 했다. 그는 그의 말대로 복잡한 체면과 권위에서 벗어나려고 애썼고 평생을 단순한 그림을 그렸다.

단순하게 그려서 단순한 그림은 아니다. 그 단순함에는 대상의 생명의 본질로써 환원하는 과정이며 상징적 형상의 표현으로, 작가만의 독창적인 세련미로 나타났다.

장욱진은 서양화가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1990년대 현대 미술이 번성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적인 소재와 주제로, 소박하며 단순함과 절제미의 조형단어로 서정적 이념을 표현한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다.

작품은 까치, 가족, 새, 나무, 마을, 아이 등 지극히 소박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순수함과 선함을 표현하며 자신만의 초연한 예술세계를 정립했다.

【서울=뉴시스】새_45.5x38cm_Oil on canvas_1988

화면의 도상들을 자유롭게 변화시키고 간략하게 단순화했지만 견고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6.25 전쟁 이후,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스스로 방식을 찾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마티에르의 질감을 비교적 강렬하게 표현하며 사실적인 형상을 통해 향토성을 뛰어 넘어 이상적이며 평화로운 공간을 표현했다. 특히 그의 마지막 신갈시절은 작가의 마음의 평온함과 작업의 확연한 방식을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정신적인 해방감을 반영한 듯 자유롭고 편안한 선염기법의 화풍이 돋보인다.

가나문화재단이 ‘장욱진 탄생 백년’을 맞아 그의 예술혼을 시대적으로 분류하고 그가 걸어온 길을 재조명한다.

서울 인사아트센터 제 1전시장에서 ‘인사동 라인에 서다展’을 24일 개막했다.

장욱진의 예술정신을 따르던 후배 작가 최종태, 윤광조, 오수환 작가의 작품 세계와 함께 장욱진의 삶과 예술세계를 되짚어 본다.

장욱진 화백 유화와 먹그림 100여점과 최종태, 윤광조, 오수환 3인의 조각, 도자, 평면 40여점을 나란히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세계를 화가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덕소 시절 (1963-1975), 명륜동 시절(1975~1979), 수안보 시절(1980~1985), 신갈 시절(1986~1990)로 나누어 구성했다. 네 차례 아뜰리에를 옮기면서 그만의 유토피아를 형성해 나갔으며 시간의 변화에 따라 성향도 달라지는 작품의 전개 과정을 살펴볼수 있다.

【서울=뉴시스】진진묘Zinzinmyo-My Wife_s Buddist Name_33x24cm_Oil on canvas_1970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은 “장욱진 탄생 백년을 기념하는 이번 가나문화재단 전시는 한 마디로 화가의 달덩이 같은 그림을 바로 보여주려 하는 것"이라면서 "장욱진 그림의 미덕은 우리의 과거와 우리가 살아갈 미래를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전시 타이틀은 생전 장화백이 “내 라인은 인사동!”이라며 명륜동 집에서 인사동을 오가며 풍물을 즐겼던 장욱진의 행적을 기억해 나왔다.

장녀 장경수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경운박물관 관장)는 "아버지에게 인사동은 술 골목이기도 했다"면서 "아버지는 그림이 잘 안 될 땐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술을 드셨었다"고 회상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2014년 10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6억원에 낙찰된 '진진묘'(1970)도 볼수 있다. '진진묘'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부인 이순경 여사의 법명으로, 장 화백이 그림에 직접 제목을 붙인 몇 안 되는 그림으로 꼽힌다.

또한 생전 “그림에 동서양이 있을 수가 없다”며 그렸던 먹그림도 함께 소개된다. '먹그림'은 오랜 유화작업을 통해 다져지며 그려온 형태들이 일휘필지의 순발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포착되어 그려졌다. 먹물의 농담과 붓의 움직임, 결의 모양에 따라 모필의 일회성을 표현함으로써 장욱진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편, 장욱진은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의 거장 중 한 명이다. 1917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나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유영국 등과 함께 2세대 서양화가에 속한다.

【서울=뉴시스】수안보 시기, 장욱진 화백. 가나문화재단 제공

1930년 경성 제2고보에 입학하지만 일본교사의 왜곡된 행동에 항의한 끝에 학교에서 쫓겨났고, 그림 공부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집안 어른의 질책을 받아 수덕사에서 정양을 해야만 했다. 거기서 만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1886-1948)으로 부터 “좋은 화가가 되겠다”는 칭찬을 들었다.

스무살이던 해에 겨우 양정고보 3학년으로 편입했고, 조선일보 주최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 수상을 계기로 집안 어른의 후원을 받아 1939년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1939년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는 길로 들어선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1954-1960)로 근무했지만 6년 만에 작품 창작을 위해 그만두고 자연과 더불어 살며 동화적이고 심플한 선 표현과 독창적인 색채를 선보였다. 1990년 12월 27일 74세로 선종했다. 전시는 8월27일까지.

hyun@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