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추억 1편] 야구의 대명사 최동원

조회수 2017. 7. 24. 10:4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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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라는 건 알죠. 알지만 끝까지 나가서 이겨야죠."




최동원부터 이승엽까지, 영상으로 만나는 한국 야구의 전설! <야구의 추억>
매주 월요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야구의 추억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그 당시의 소년들은 공을 던질 때 모두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투수는 안경을 써야 한다며, 부모를 졸라 안경까지 맞춘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이 사람, 때문이었죠. 바로 최. 동. 원.


‘한 시간 동안 움직일 수 있는 거리’로서 가늠되는 ‘시속’이라는 물리학의 속도개념을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는 소년들이 알 수 있었던 것 또한 최동원 선수 때문이었고, 그 ‘시속’을 측정할 수 있는 ‘스피드건’이라는 기계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던 것 또한 최동원 선수 때문이었습니다.

스피드건이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그걸로 최동원 선수의 공을 측정했더니 나왔다고 하는 ‘150’이라는 숫자는 별다를 것 없이 현실감 없는 경지의 이미지일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 소년들은 정말 그랬습니다. 그를 따라하던 소년들은 이제 어른이 되었습니다. 모두 각자의 일터에서 자신의 인생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동원’이란 이름 석자 앞에선 다시 소년이 됩니다.



“최동원 선수는 나의 영원한 영웅이다” - 엔씨소프트 김택진 회장 -





최동원 선수가 당시 소년들이 인생에서 품었던 첫 번째 우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구의 추억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이번 인물은 야구의 대명사, 최동원 선수입니다. 최동원 선수는 프로 무대에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가 프로야구 투수로 처음 나타났던 1983년 동네 아저씨들은 이미 ‘예전의 최동원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고, ‘5~6 년 전에 프로가 생겼으면 한 몫 했을’ 거라고 혀를 찼습니다.

지금 따져보면 208.2이닝을 던지며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대활약이었음에도, 사람들은 이기는 경기(9승)보다 지는 경기(16패)가 훨씬 많은데다가 1983년 당시 427.1이닝을 던졌던 장명부의 절반만큼도 못 던지는 ‘유리어깨’로 전락한 최동원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이틀 연속 등판해 17이닝동안 노히트노런을 이어가고 군산상고를 상대로 20개의 삼진을 빼앗아내던 경남고 시절, 그리고 일주일동안 여섯 경기에 등판해 3승을 따내며 ‘코리안시리즈’를 석권했던 실업야구 롯데 시절의 ‘완벽투’에 대한 기억과 마주 세우자면 초라할 수밖에 없는 기록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5~6년 전쯤 지나가버렸다는 그의 전성기에 대한 궁금증만이 쌓여가기 시작할 무렵, 최동원 선수는 제대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그 전설적인 84년의 대폭발을 보여주게 됩니다. 한국 프로야구사상 ‘한 시즌 최다승 투수’로 기록되어있는 것은 1983년에 30승을 올린 장명부 선수입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승리를 기록한’ 투수는 정규시즌의 27승에 이어 한국시리즈 4승을 올린 1984년의 최동원 선수였습니다. 원년 에이스 노상수 선수의 군 입대, 그리고 부산의 기대주 양상문·윤학길 선수의 아마추어 잔류로 마운드가 텅 비게 되면서 3년째 하위권 탈출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던 1984년의 롯데 자이언츠가 한국시리즈 우승컵까지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드라마였습니다.

최동원 선수가 1·3·5·7차전을 완투(3승 1패)하고 6차전 구원승(5이닝 무실점)을 올려 홀로 우승을 이끌었던 그 해의 한국시리즈는 한국 야구사의 두 번 다시 없을 기적이 분명합니다.


최동원 선수가 뛰던 당시 롯데 자이언츠도 약팀은 아니었습니다. 120%의 능력을 짜내 안간힘을 써대며 던졌던 임호균·배경환·안창완 같은 투수들이 있었고 1할 타자였지만 김일융 투수의 지친 호흡을 노려 7차전 역전 결승홈런을 만들어낸 유두열 선수도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매 경기 24시간도 채 못 되는 휴식시간을 마친 뒤, 어깨를 붕붕 돌리며 나타나 상대의 마지막 저항을 소탕하는 최동원이란 투수가 있었기에 기적은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최동원은 부실한 팀을 한 어깨로 끌고 나가는 선봉장이었고, 무수한 공백을 한 몸으로 막아내는 수문장이었기에, 그에게 ‘에이스’를 넘어 ‘수퍼 에이스’라는 찬사가 주어집니다.



강병철 감독 : "동원아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
최동원 선수 : "네, 알았심더. 마 함 해보입시더"




연속홈런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 타자가 뻔히 알고 기다리는 길목으로 승부구를 우겨넣어 3구 삼진을 노리는, 그리고 홈런을 맞은 다음 타석에서는 다시 한 번 똑같은 코스로 더 강한 공을 던져 오기와 배짱을 겨루는 격렬한 승부사였던 그는 고작 ‘수퍼 에이스’라는 이름이 주는 든든함과 단단함에 머물지 않는 매력을 가진 투수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는 전형적인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걸어야 할 것을 걸고 노려야 할 것을 노려 확실하고 깔끔하게 완전 연소시켜버리는 처절한 승부사가 바로 최동원 선수였습니다.

만일 그에게 1984년의 롯데 자이언츠보다 좀 더 강한 팀이 허락되었고, 든든하게 뒤를 맡아줄 파트너가 주어졌다면, 그는 좀 더 날카롭고 강하게 질주하는 ‘수퍼 돌격대장’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분명히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가파른 기념비 몇 개를 더 세워두는 선수가 되었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무엇보다 최동원 선수의 1989년을 가슴 아프게 기억합니다. 그가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이 아닌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나타난 그 해입니다. 그 앞으로도 그 뒤로도 느껴본 적이 없는 어색한 풍경이었습니다.

하늘색 라이온즈 유니폼은 마치 얻어 입은 것처럼 겉돌았고, 최동원이 빠지고도 롯데 자이언츠를 여전히 ‘롯데 자이언츠’라고 부른다는 사실 또한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연봉 협상에서 몇십만 원 되지도 않는 돈을 놓고 자존심 싸움을 하느라 질려버린 데다가 선수회 결성을 주도하며 미운 털까지 박힌 골칫덩어리를 치워버리고 싶었던 롯데와, 어떻게든 우승을 하려면 최동원 같은 근성과 투지의 에이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삼성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한국프로야구사상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4승 투수’ 최동원과 ‘최초의 100승 투수’ 김시진이 맞바꾸어지는 초대형 트레이드는 그렇게 이루어졌고, 이후 두 대투수의 전설도 그 순간 서둘러 막을 내리게 됩니다.

홈런을 맞으면 더 호쾌하고 웃으며 날을 세우던 투수 최동원. 소년들은 그를 통해 야구란, 단순히 이기고 지는 순간의 게임이 아니라 투혼을 내던지는 영원의 승부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자란 소년들은 ‘야구’ 대신에 ‘인생’이란 단어를 대입시키게 됩니다. 최동원처럼, 우리 역시 ‘인생’이란 영원한 승부에 투혼을 던지리라. 야구의 대명사, 최동원 선수가 가르쳐준 생존의 법칙이었습니다.

야구의 추억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한국 야구 팬들에게는 애틋함과 아쉬움,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는 영원한 야구의 대명사, 최동원 선수 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리라는 건 알죠. 알지만 경기에 출전할 수 있으면 끝까지 나가서 이겨야죠.”  - 최동원 선수 -

| 원작 : 김은식 <야구의 추억>

다음주 월요일에는 타격의 달인 장효조 선수가 주인공 입니다.

야구의 추억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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