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전직 검찰총장 20년 지기의 무죄선고 전말

탐사보도팀 강진구·박주연 기자 입력 2017. 7. 24. 06:15 수정 2017. 7. 2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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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전직 검찰총장에게 전달해달라고 제3자가 건넨 수임료를 가로챈 혐의(사기)로 기소된 건설업자가 “검사 덕분에 무죄가 나왔다”고 밝혀 논란이 예상된다. 임채진 전 검찰총장(65)과 20년가량 알고 지낸 건설업자 박모씨(57)는 수임료 5000만원을 가로챈 혐의로 고소돼 2015년 말 재판에 넘겨졌으나 지난해 12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경향신문 취재 결과 검찰의 수사와 공판 진행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다수 발견됐다.

2010년 9월 국새 사기 사건으로 구속됐던 민홍규씨 부인이 지인과 함께 임채진 전 검찰총장 사무실을 찾아가 사건을 설명하면서 작성한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업무일지의 한 페이지. 김영민 기자

사건의 발단은 2010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국새 사기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대 국새(國璽·국가도장) 제작단장 민홍규씨(62)가 사기 혐의로 구속되자 부인 김모씨(58)는 박씨의 주선으로 그해 9월15일 임 전 총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임 전 총장이 변호사로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이 자리에는 박씨와 공군 정보장교 출신 컨설턴트 ㄱ씨(48)도 동행했다.

ㄱ씨는 “임 변호사가 설명을 듣더니 ‘당신들 말이 맞으면 무죄’라고 했다”며 구체적인 선임 조건도 기억했다. 그는 “임 변호사가 ‘보통 대법관이나 검찰총장 출신은 선임계를 내거나 도장을 찍으면 1억인데, 내가 사건을 맡더라도 선임계는 낼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고 말했다.

2010년 9월15일 민홍규씨의 부인과 함께 임채진 전 총장을 찾아가 사건 수임을 의뢰한 공군 정보장교 출신 ㄱ씨가 당일 업무일지에 기록한 내용. 임 전 총장이 이 사건을 맡더라도 선임계를 내지 못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김영민 기자

하지만 남편이 구속된 상황에서 다른 생계수단이 없던 김씨에게 1억원의 수임료는 부담스러운 액수였다. 김씨 측은 이후 “박씨와 조율을 거쳐 수임료 5000만원을 현금으로 전달했다”고 경향신문에 밝혔다. 수임료는 미리 인출한 5만원권 뭉치를 헝겊 주머니에 넣은 후 보자기로 싸서 건넸다고 했다.

하지만 국새 사기사건으로 구속된 민홍규씨는 이들의 기대와 달리 3년의 실형을 받았다. 이후 남편 민씨가 만기출소하자 김씨는 남편 등과 함께 2014년 10월 임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실형은 살았지만 임 변호사가 나름 도움을 줬다고 판단한 김씨 부부는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하지만 임 변호사 반응은 의외였다. 그는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며 일행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폰으로 박씨와 통화를 시도했다. 임 변호사는 “나한테 5000만원을 가져온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박씨는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결국 김씨는 5000만원의 수임료를 돌려받기 위해 2015년 7월 박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박씨는 경찰과 검찰 수사과정에서 줄곧 “김씨 일행이 보자기에 싼 물건을 들고 와서 서랍속에 보관하고 있다가 곧바로 돌려줬다”고 주장했다. 임 변호사의 수임 건에 대해서는 “임 전 총장이 김씨 일행 면담 후 따로 불러 ‘내가 이 사건을 맡는 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해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임 변호사가 ‘사건 수임은 어렵지만 자문은 해줄 수 있다’고 해서 그 말만 전달했다는 것이다.

박씨는 이후 김씨와 ㄱ씨가 찾아와 헝겊 주머니를 임 변호사에 전달해 달라고 한 건 맞지만 다음날 혼자 사무실을 찾아온 김씨가 “급한 일이 생겼다”며 주머니를 다시 찾아갔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주머니 안에 돈이 들었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았다”고 말했다.

임채진 전 검찰총장의 20년지기 사업가 박모씨에게 수임료 5000만원을 전달한 후 ㄱ씨가 박씨로부터 전해 들은 검찰수사정보를 업무일지에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용 중 일부. 참고인 3명의 소환일시가 적혀 있다. 김영민 기자

그러자 ㄱ씨는 박씨가 돈을 돌려주지 않은 증거로 “돈 전달 후 박씨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이라며 검찰 수사진행 상황을 깨알같이 기록한 업무일지를 증거로 제출했다. 업무일지에는 참고인의 소환일시나 관련자들 진술 내용, 수사쟁점 및 진척 정도 등 검찰 내부관계자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내용이 날짜별로 적혀 있다. ㄱ씨는 “우리는 당연히 임 변호사가 박씨를 통해 전달한 정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반면 검찰과 박씨는 민홍규씨 변호인이 전한 정보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씨 변론을 맡은 김모 변호사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나는 (판검사를 지내지 않고 바로 개업한) 연수원 출신 변호사다. 민씨 수첩에 적힌 검찰수사 정보는 내가 전혀 알 수 없었던 내용”이라고 말했다. 거짓말탐지기 조사결과도 돈을 돌려줬다는 박씨 진술은 ‘거짓’, 김씨 진술은‘진실’ 반응이 나왔다.

수사를 맡았던 서울중앙지검 형사부의 최모 검사는 박씨가 돈을 돌려주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만 최 검사는 박씨가 임 변호사에게 돈을 전달했을 가능성도 없다고 봤다. 최 검사는 임 변호사에 대해 아무런 조사도 진행하지 않았고 공소장에 ‘피고인은 임 변호사에 수임료를 전달할 의사나 능력도 없었다’고 기재했다. 그러나 박씨는 “20년 전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시절 임 변호사를 술자리에서 처음 소개받았고 아내들도 만나면 서로 남편들 흉을 볼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했다. 박씨는 “임 변호사가 총장 후보로 거론되던 시절 딸 결혼식을 치를 때도 청첩장을 보냈다”고 덧붙였다. 법무법인 율현의 강병국 변호사는 “박씨가 사건을 소개시켜주고 5000만원을 받았다면 당연히 변호사법 위반 혐의를 의심해야 하는데, 임 전 총장에 대해 조사 없이 수사를 종결한 것은 정상적 수사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은 최 검사가 근무하는 부산지검 서부지청에 연락했지만 “서울중앙지검에서 처리한 사건이니 그쪽에 물어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공판 과정 또한 석연치 않았다. 공판 수행을 담당한 김모 검사는 지난해 8월24일 첫 증인신문에서 김씨를 상대로 ‘5000만원을 현금으로 인출해서 보관한 돈으로 수임료를 전달한 게 맞느냐’는 부분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ㄱ씨를 상대로도 ‘직접 보자기를 풀어서 돈 액수를 확인해봤냐’고 파고들었다. 그는 또 5000만원의 자금 출처를 밝히겠다며 김씨의 농협계좌에 대한 금융거래 조회도 요청했다. 박씨가 “검사 덕분에 무죄가 나왔다”고 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남편의 중소기업 은행계좌에서 김씨의 계좌로 이체된 전표만 확인하면 게임 끝인데 그게 5년이 지나서 폐기돼 없다는 거에요. 그런데 느닷없이 검사가 김씨 계좌를 추적하자고 나온거야. 변호사야 당연히 동의하지”

고소인을 대리한 판사 출신의 황종국 변호사(65)는 “피고인도 돈 받은 사실 자체는 인정했는데, 변호사가 아닌 검사가 왜 계좌조회까지 신청하며 자금 출처를 쟁점으로 부각하려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검 김지용 공판2부장은 “무죄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김씨가 자금 출처 자료를 가져다줘야 하는데 전화도 안 받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박씨의 설명은 다르다. 검찰이 2010년 국새 사기사건을 수사하면서 이미 계좌추적 결과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죄가 선고되고 며칠 안 돼 김 검사가 조사할 게 있다고 해서 갔더니, 자기네가 (예전) 민홍규씨 사건 때 9100만원의 행적을 조사한 게 있다고 하더라. 오해할 소지가 있으니 조회신청 했다고. 그래서 같이 웃었다.” 박씨 설명대로라면 공판검사가 이미 계좌추적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도 금융거래정보 조회를 또 다시 요청한 게 된다.

공판검사의 석연찮은 행적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공소유지를 하려면 피고인 진술의 허점을 파고들어야 하는데, 검사는 박씨를 상대로는 단 한마디도 신문하지 않았다. 대신 법원이 박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기 한 달 반 전부터 고소인에 대한 무고와 위증죄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김지용 부장검사는 “무죄 선고 전이라도 계좌추적을 통해 고소인의 법정 증언이 사실과 다른 사실이 확인되면 위증죄 수사에 착수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향신문 확인 결과, 법원에 신청한 계좌조회 결과가 나온 것은 지난해 11월15일, 김 검사가 박씨를 상대로 무고죄 피해자 진술조서를 받은 것은 11월8일이었다. 김 부장검사 말과 달리 계좌조회 결과가 나오기 1주일 전 무고·위증죄 수사에 착수했던 것이다. 김씨가 집에 보관 중인 돈으로 5000만원을 마련했거나, 5년 전 일이라 기억이 부정확할 가능성을 배제한 채 검사는 고의적 위증으로 판단했다.

결국 지난해 12월21일 박씨는 증거부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사는 결심공판에서 구형을 포기했고, 무죄가 선고됐음에도 항소하지 않았다. 대신 고소인 김씨를 상대로 무고 및 위증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고소인과 피고인의 처지가 180도 뒤집힌 것이다. 10시간이 넘는 영장실질심사 끝에 무고나 고의적 위증으로 보기 어렵다는 법원 판단으로 영장은 기각됐다. 하지만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검찰은 5월26일 김씨와 ㄱ씨 등 2명을 무고 및 위증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고 지난 4일 첫 재판이 열렸다.

김씨측 대리인인 황 변호사는 “(판사와 변호사로서) 수십년 간 공판을 경험했지만 공소유지를 해야 할 검사가 일방적으로 피고인 편에서 공판을 진행하고 무죄 판결에도 항소를 포기한 경우는 처음 봤다”고 했다.

경향신문 취재 결과, 또 다른 석연찮은 사실도 추가로 확인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됐던 법무법인 바른의 검사장 출신 한모 변호사가 박씨에게 도움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 임 변호사는 경향신문과의 첫 전화 통화에서 “박씨의 변론을 맡은 게 한OO 변호사 아니냐”고 말한 바 있다.

한 변호사는 임 변호사가 검찰총장으로 재직하던 2008년 검사장으로 승진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한 변호사는 “같은 법인의 변호사를 소개시켜줬을 뿐, 사건을 정식 수임한 것은 아니다. 수사과정에서 어떻게 진술하면 좋은지 조언을 해주고 공판이 열릴 때 방청석에 앉아 지켜보기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증인신문 때) 검사가 막 달려드는 것 같지 않아서 후배들이 ‘사건을 잘 보고 있는 건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무고로 인지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후배 검사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사건에 개입한 사실이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공판을 지휘한 김지용 부장검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고 보니 내 후배였는데 사전에는 전혀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한 변호사가 정식 선임도 하지 않은 박씨 공판에 빠짐없이 참석한 것을 단순한 ‘호의’로만 보기는 어렵다. 5000만원 규모 사기 사건에, 한 법무법인에서 9명의 변호사가 대리인으로 이름을 올린 것도 석연찮다. 한 변호사가 박씨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경위를 둘러싼 설명도 엇갈린다. 박씨는 “사기죄로 기소된 후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우연히 한 변호사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고 말했다. 반면 한 변호사는 “수사과정에서 아는 분 소개로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소개해준 사람이 임 (전)총장님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임 전 총장은 “내가 민홍규씨를 위해 자문을 해준다고 말한 적이 없고, 일전 한 푼 받은 적도 없다”며 “자기들끼리 무슨 장난을 쳤는지 모르지만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건”이라고 개입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고소인측 황 변호사는 “불과 5000만원 규모의 사기사건에 검찰이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은폐해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 아니었겠느냐”며 “모종의 손길이 뒤에서 작용하지 않으면 설명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탐사보도팀 강진구·박주연 기자 kangj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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